초보자를 위한 자연과학 사용 설명서

-  박자세 1년을 돌아보며

 

 

1. 노는 물이 다른 박자세의 도반들

 


 

  공부를 같이 하는 사람들은 서로 상처 주는 관계가 아니다. 서로를 살리는 사람들이다. 언젠가 박사님이 강의중 했던 말이다. 나는 작년에 한 잡지글을 보고 박자세 공부를 시작했다. 자연과학을 통해 앞으로 남은 50년동안 재미있을 공부를 찾았다는 필자의 고백에는 행간마다 절절함이 배어있었고 사람을 끌어당기는 인력이 작동했다. 그러나 사실 지난 1년동안 낯선 수식과 알아들을 수 없는 유니버셜 랭귀지 때문에 힘들었다. 가끔은 내가 왜 이러고 있나 하는 자괴감이 들기도 했다. 올 봄에 작성한 ‘137억년 우주의 역사’  노트 필기를 보면 부호들마다 연필로 그 이름을 적어 두었다. 미분과 적분의 기호와 의미를 모르는 것은 물론이요, 수식은 그냥 베껴 쓴 것이다. 그러니 앞 장에서 쓴 이름이 뒷장에도 되풀이해 적혀있다. 모르기는 지금도 매한가지다. 이런 걸 그렇게 재미있다고 하며 매번 강의 정리 노트를 올리다니 그의 열정에 의구심을 품고 따져볼까 하는 생각마저 했다.

 


 

  그러던 중 올해 6월 서호주 탐사에서 우리 집 가훈이 ‘각자 잘 살자’라고 했더니 그가 와서 자기 집 가훈을 말해 주었다. ‘해봤냐? 해보고 말해라’  안 해봤으면 말을 말라는 거다. 문제를 제기하든 포기를 하든 그것은 최선을 다해 본 자의 몫이란 얘기로 해석했다.  독심술도 하나? 그에게 성급하게 따져 묻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귀국 길 비행기에서 옆자리에 앉은 박 선생님이 들려주신 박자세 공부 이야기도 인상적이었다. 137억년 우주의 역사 강의를 듣다가 수학을 익히려고 초등학교 3학년 수학 학습지를 배달받고 날마다  특히 주말에는 몇 시간씩 풀었다고 한다. 봄날 꽃놀이부터 가을 단풍놀이, 겨울의 눈구경 대신에 식탁에 앉아 서너 시간을 수학과 씨름했고 중학교를 거쳐 고등부 수학까지 내리 훈련을 했다. 그런 저력으로 박선생님은 천뇌모임에도 매번 충실한 발표를 하고 있다.

 


 

  박자세에서 공부를 시작할 적 내 목표는 ‘출석’이었다. 작년 뇌과학 강의는 몇 번 결석했으나 올 봄 우주의 역사 강의는 개근을 했다. 소박한 목표는 달성했으나 못알아듣는 것에 대한 스트레스는 컸다. 공부 선수인 김현미 선생님한테 이 답답함을 호소하다 결국엔 눈물까지 쏟았다. 하소연은 이러했다. 


 

 

  “ 딸아이와 나는 최소한 강의 1시간 전에 강의실에 도착해서 칠판이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아요. 강의 중엔 절대로 졸지 앉고 딴 생각하지 앉고 집중해서 듣고 열심히 필기해요. 뒤를 돌아보는 일도 거의 없어요. 옆자리도 안보고 오로지 박사님만 해바라기하죠. 사실 두렵거든요. 나말고 다른 사람들은 거의 알아듣는 것 같은데, 뒤를 보았다가 다들 환희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웃고 있으면 제가 자신감이 더 떨어지니 주변에 투명막을 친듯 오로지 칠판과 박사님만 보는겁니다.  그리고 수시로 유행가 가사처럼 되뇌며 위로를 해요. “ 이제와 새삼 이 나이에 나에게 실망한다는 것은 우습지 뭘~” 그렇게 앉아서 버티는 중이에요. 모르는 중에도 콩나물 자라듯 뭔가 나아지겠지 하는 기대도 있고 무엇보다 함께 강의를 듣는 딸아이 때문에...... 분명 나보다 더 알아듣는 것도 아닌데 매주 전라도 광주에서 서울까지 혼자 오가기를 반복하며 군소리 한마디 없으니 엄마 체면에 힘들다고 투정하거나 그만둘 수는 없잖아요. 그래도 내 평생 이렇게 못알아듣는 강의는 처음이에요. 나만 그런거에요? ”

 


 

  김현미 선생님은 며칠 뒤 초보에게 도움이 될만한 책 2권을 소개해 주었다. 다 읽어보진 않았지만 올 겨울에 읽어두면 내년 봄 우주의 역사를 공부할적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다시 평범한 이치를 떠올리며 마음을 진정시킨다. 누구나 무엇에든 시작이 있고 처음은 모두들 낯설고 힘들다는 것. 익숙해지기까지 연습의 과정은 어렵고 고되다는 것. 그러나 다행히도 훈련한 만큼 나아진다는 사실 또한 예외가 없다. 다만 공부가 어느 정도의 수준이 되면 훈련에 재미와 가속이 붙어 공부의 수준이 껑충 수직상승한다. 자연과학 공부도 그래 보인다. 그러니 해보는 수밖에 답이 없다.


 

 

2. 이상한 나라의 단백질


 

  봄 강의 전강 출석을 이루었다기보다 버티고 나니, 올 가을 뇌과학 공부는 종아리에 묶었던 모래 주머니를 풀고 달리는 기분이라고 좋아라했다. 뇌과학은 일단 수식이 안나오고 작년 가을에 들었던 것이니 훨씬 낫지 않을까 내심 기대가 컸다. 영어가 많이 나와서 어렵기는 하지만 그건 좀 외우면 되겠지 하고 한껏 감동받을 준비를 하고 강의장엘 갔다. 그리고 뇌과학 3강까지 듣고 나서야 나의 기대가 얼마나 섣부른 판단이었는지 깨달았다. 강의는 기대 이상이어서 내 기대를 깨트렸다. 역설이다.

 


 

  우선 강의 내용이 작년과 달랐다. 겹치는 부분도 있었으나 해마다 기존 내용을 바탕으로 업그레이드 되는 것이다. 나같은 초보자에겐 점점 더 어려워진다와 같은 말이다. 이 공부를  5년전에 진작 시작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전의 동영상을 열어보기도 하기만 지금 공부하는 것을 따라가기도 벅차다. 그런데 소위 박자세의 선수라 불리는 몇몇 선생님들은 나와 매우 다른 반응이다. 전의 강의도 좋았지만 지금이 가장 좋다고, 군더더기(내가 생각하기엔 기본 개념 설명) 없이 엑기스만 추출해서 전체를 아우르는 현재의 강의가 매우 만족스럽다고 한다. 선수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자면 한국어로 하는 외국말을 듣는 기분이다. 그럴 때마다 분자 생물학과 인문학을 가로지르고 아우르는 명강의가 내게로 와서 개발에 주석편자가 되는 건 아닌가 염려가 된다.

 


 

  뇌과학 3강은 기억의 본질이 단백질 활동이며, 단백질이 어떤 과정으로 기억을 생성하는지 그림으로 보여준다. 강의 내용이 생소하기도 했지만 며칠이 지나서 공책을 보니 생각나는 것이 거의 없었다. 망각이 뇌의 본질이라지만 이렇게 깡그리 잊어버리다니 억울해서 뭐라도 단서를 잡으려고 공책을 뚫어져라 보았다. 여전히 이름도 떠오르지 않는다. 하지만 공책을 멀리 놓고 보자 우선 아름답고 신기한 모습이다. 문득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떠오른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의 수학교수이자 연구원이었던 루이스 캐럴이 쓴 이 환상소설은 그림만 보면서 읽어도 정말 재미나다. 기억의 본질인 단백질의 모습이 그 그림과 닮은 이미지다.  

 


 

  인지질 이중막은 앨리스의 현실인 지상과 , 지하의 환상세계를 가르는 경계다. 그 사이 이온 채널이 열리면 칼슘 이온이 유입되고  Ephr, Ephrin, SynCAM, β-neurexin, neuregulin 같은 이름의 단백질이 서로 만나 연쇄작용을 한다.  수백만의 단백질 병사들은 각기 다른 이름이 있다.  마치 이상한 나라의 카드 병사들 같다. 엉뚱하고 예민한 여왕의 명령에 맞추어 이리저리 이동하는 병사들처럼 단백질은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이행한다. 다만 언제 어떤 상황에서 누구랑 만나느냐에 따라 명령 이행의 결과가 다르게 나타난다. 사람마다 같은 약을 써도 다른 약효가 나타나듯이.

 

앨리스가 이상한 나라를 몰랐을 적에도 그 나라는 있었다. 하지만 앨리스가 토끼를 따라 이상한 나라를 방문한 뒤로 이상한 나라와 앨리스는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달라진다. 우리가 굳이 인식하고 불러주지 않아도 단백질들은 우리의 기억을 만드느라 열심히 움직이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이름을 불러주면 아주 의미있게 다가와 완전히 다른 새 세상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환상 세계를 맛본 우리는 그 전과는 다른 관점으로 기억과 인간, 생명 현상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이상한 나라의 단백질들의 규칙을 인간이 알아내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고,  그림으로 설명하는 것도 놀랍고, 그 중 으뜸으로 놀라운 것은 최신 논문 수준의 이 규칙을 기어이 알아야겠다는 박자세의 회원들이다. 벌써 몇 명이나 천뇌모임에서 이 도표를 발표했다.


 

 

  박사님은 분자생물학이 삼국지보다 열 배나 재미있으며 앞으로 과학계의 핫이슈가 될거라고 전망했다. 삼국지는 다 읽지 않아서 비교가 어렵지만 소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수학자의 작품답게 환상적이면서도 논리성을 갖춘 면이 규칙적인 단백질의 작동과 잘 어울린다.  소설이 논리학자와 언어학자를 비롯한 많은 철학자들의 관심을 불러내었듯 단백질의 활동 보고서 역시 뜨거운 관심아래 많은 논문이 쏟아져 나온다. 게다가 중구난방의 해석이 아니라 상상력을 발휘하되 확실한 검증을 거친 결과들이다. 우리가 몰랐던 미시 세계의 법칙인 단백질의 열렬한 활동 덕분에 인간이 보고 듣고 느낀 것을 기억하고 인출하는 모든 의식 행위가 가능하다는 것. 기존 지식으로 알 수 없던 영역이 신비의 베일을 벗고 우리가 알 수 있는 언어로 설명되고 있다. 역시 박자세는 에둘러 가지 않고 자연 과학 공부의 핵심으로 직진중이다. 


 

3.  공부 선수로 가는 훈련코스, 천뇌발표


4.  나는 공부한다. 고로 써 먹는다  -  공부와 삶의 연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