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포틀래치


한 단어의  매력에 빠져 마음에 담아두고 지내는 경우가 있다. 중학교 윤리 시간에 들었던 신독[愼獨]이 그러했고 여고 시절 알게 된 휴머니즘이 그러했다. 신독[獨]은 삼갈 신[愼]에 홀로 독[獨]을 써서 자기 홀로 있을 때에도 도리에 어그러지는 일을 하지 않고 삼가라는 것으로 퇴계 이황 선생이 특히 강조하였다. 자아를 깨닫고 순수함을 추구하는 나이에 빠져들만한 개념이었다. 휴머니즘은 흔히 인문주의로 번역하는데 인간다움을 중시여기며 진정한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할 10대 후반에 관심 가질만한 개념으로 인간 사회를 바라보는 지향을 세워준 개념이다. 그 뒤 진보나 개혁, 진화와 공생 같은 단어들이 덧붙여졌다.


몇 년 전 접한 포틀래치라는 말은 앞의 개념들보다 소박하지만 강한 일상성으로 인해 한동한 매료되었던 말이다. 모두들 받으려고만 하는 세상에서, 어쩌다 자기 것을 나눠 주는 자가 있어도 과시가 넘쳐나 베푸는 겸손은 드문 현실에서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포틀래치는 깊은 울림을 주었다. 집안이나 부족의 중요 행사에서 많은 선물을 한 사람일수록 명예를 얻는 것으로 선물을 받은 사람들은 다음 행사에 조금씩 이자를 얹어서 되돌려 주는 선물의 순환을 만들어낸다. 많은 선물을 한 사람일수록 큰 명예와 존경을 얻어 추장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나중엔 이 역시 과시적이고 낭비적인 소비로 이어지는 폐단을 낳기도 했다.하지만 철학자 들뢰즈와 가타리의 해설서를 쓴 ‘노마디즘’의 필자 이진경 교수의 포틀래치 풀이에 따르면 선물 경제로 인해 명예와 물적 풍요가 쏠리지 않아서 남을 지배할 만한 절대 권력이 형성되지 않으니 사회를 건강하게 유지하는 메커니즘이란 것이다.


이처럼 선물의 순환을 통해 사회적 협동을 끌어내고 공동체를 유지하는 원주민들의 삶의 방식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경재 규모를 늘리지 않고 필요만큼만 생산하고 누리는 생활이니 잉여가 없고 따라서 많은 양의 축적이나 낭비도 없다. 선물로 나누어지니 빈부의 격차가 크지 않고 극빈의 삶도 없다. 더 확장해서 보면 자연도 선물의 순환이다. 식물이 광합성을 통해 산소를 주고 동물은 분비물과 죽은 신체로 돌아가 식물에 영양분으로 답해주는 일.


포틀래치를 알고 난 뒤 나는 대학원을 다니면서 수업 뿐 아니라 크고 작은 모임에 간식을 챙기기 시작했다. 나누어 먹으며 공부를 하는 즐거움은 물론이요, 어느새 사람들이 나를 많이 베푸는 너그러운 사람으로 대하고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최근 들은 마이다스 아이티와 엑셈의 선물 사연은 더욱 놀랍다. 천뇌 발표 때 본 엑셈의 ‘기술자의 길’ 이란 액자는 기술로 세상에 기여하는 철학으로 읽혀서 인상적이었다. 철학이나 정신은 상징이기에 소진되지 않고 얼마든지 나누어 가질 수 가 있다. 어떤 철학의 효시는 있을지라도 그대로 보존해야 하는 원본이 따로 있지는 않다. 오히려 상황에 맞는 변주로 더 다양하고 아름답게 확장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글씨는 물리적인 것이라 한 예술가의 작업이라 해도 매번 달라질 것이다. 그런데 엑셈의 조종암 사장은 마이다스 아이티의기술자의 철학 뿐 아니라 글씨까지도 온전히 원본을 갖고 싶어했다. 그리고 마이다스 아이티의 이형우 사장에게 그 뜻을 전했고 바람은 이루어졌다. 글씨는 알아보고 원하는 자가 주인이라는 답과 함께 기술자의 길은 엑셈으로 전파되었다. 달라는 사람이나 주는 사람이나 범인의 경지가 아닌 두 CEO의 사연을 들으며 온전한 증여의 조건을 생각하게 된다. 신라 화랑이나 조선 선비들의 선문답에 비견할 만한 그들의 격조 높은 포틀래치에는 선물을 나눌 마음과 알아보는 눈, 서로 감당할 만한 여유가 있었다.  




2. 박자세의 책 만들기

 

박자세 스토리 책을 만들기로 하고 며칠 뒤 집에 노트북이 배달되어 왔다. 내가 주문한 것이 아니다. 새로 산 노트북을 본인은 만져 보지도 않고 나에게 곧장 보내준 조서연 선생님의 것이다. 수천장의 이미지를 전송하고 화면에 띄워두고 작업해야 하는데 내가 쓰는 컴퓨터가 느려서 감당할 수 없던 차에 조 선생님이 새로 장만한 것을 나한테 먼저 빌려준 것이다. 전자 제품은 소모품이니 마구 쓰라는 당부와 함께. 나라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다 보니 고마움을 표현하는 것도 민망하여 며칠이나 지난 뒤에 겨우 문자로 감사 인사를 보냈을 뿐이다.


책을 만드는 과정 자체가 공부를 하는 일이다. 가령 아인슈타인의 중력장 방정식에 대해 편집을 해야 하면 그것을 완전히 이해하고 쓰는 것은 아니라 해도 기본적인 지식이 필요하니 박자세 사이트에서 관련된 강의를 다시 듣고 책을 찾아보게 된다. 게다가 몰입해서 작업하는 시간이 아니어도 노상 아인슈타인을 염두에 두고 있게 된다. 오래 전 연애할 때 외에는 이렇게 한 사람을 계속 떠올려 본 경험이 얼마만인가. 일주일 내리 아인슈타인과 시공의 곡률에 대해 생각했다.


박자세 스토리는 사이트에 다 올라와 있는 글과 사진, 이미지 자료 등을 마음껏 조합해서 박자세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책이다. 무언가 새로 만들어내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한 영화배우의 유명한 수상소감을 떠올렸다. “다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 하나 얹었을 뿐인데 이리도 좋은 책이 완성되다니요.” 하지만 오판이었다. 나는 중력장 방정식과 상대성 이론이 같은 말인지 몰랐다. 숟가락만 하나 얹고 싶어도 수저를 구별하지 못하고 밥상의 어디에 놓아야 할 줄도 모르니 일이 진척 되질 않았다. 이렇게 박자세의 선물이 부담가고 고달파질 즈음 박혜진 선생님과 조승연 선생님이 합류했다. 명확하게 수저를 구분할 수 있는 분들이다. 미국 책이 편집 마무리에 들어가자 미국 책을 맡아 쓰던 이진홍 선생님과 박순천 선생님도 가세했다. 밥상을 제대로 차려 본 분들이다. 초기 우주와 별 이야기, 상대성 이론과 힉스 질량 같은 챕터를 나눠서 작업하기로 했다. 마무리하지 못하고 넘긴 미안함이 크고, 부담은 여전하지만 일단 이 분들을 따라하고 익혀가야겠다. 


이주일 동안 디자인에 몰입하라는 박사님의 주문도 수용하기로 한다. 배고픈 것은 참아도 아름답지 못한 것은 참을 수 없다는 명언에 감동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의 문제가 무엇인지도 알았다. 나는 배고픈 것도, 아름답지 못한 것도 너무 잘 참는다. 그래서 몸은 축나고 미적 감각은 부족하다. 이빨 빠진 호랑이처럼 먹이를 들었다놨다 되풀이하는 중이다. 그래도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디자인의 원칙 열 개를 적어서 책상에 붙여두고 우물거리기로 한다.

 

편집팀 회의를 마치고 헤어질 때 초기 우주 파트를 맡게 된 박순천 선생님의 인사말이다.

“선물 , 고마워요”

어제는 이메일도 왔다.

“보내주신 원고 감사합니다.

선물로 알고 열심히 하려고 맘을 먹는데

원고를 보니 앞이 막막합니다.

며칠 초기 우주의 세계를 유영해야 할까봐요.”


박자세 덕분에 나는 ‘초기 우주’를 선물하는 사람이 되었다.


유쾌한 저술가 빌 브라이슨이 쓴 ‘거의 모든 것의 역사’를 보면 과학자들의 업적을 통시적으로 고찰하는데 특히 서양의 18-19 세기가 독특하다. 연구를 업으로 삼는 프로 과학자들뿐 아니라 여러 분야의 지식인들이 과학에 관심을 두고 직업 과학자와는 다른 방식으로 아마추어 과학자의 역할을 한다. 그들은 생물학이나 지질학과 화학 등 그 시대에 새로 알려진 과학 지식의 금맥에 접속해서 진리의 금을 보태는 데 크고 작은 기여를 했다. 굳이 과학사에 기여를 하겠다는 목표가 있어서라기보다는 그저 재미있고 알고 싶어서 달려든 사람들이 많았다. (여기서 박자세가 생각 안날 수가 없다) 이런 현상은 붐처럼 일어서 문학 작품에도 그와 관련된 인물들이 등장한다. 셜록홈즈만 하더라도 식물학, 지리학, 화학, 생물학적 지식에 근거하여 범인을 추리하고 그의 유일한 친구인 존 왓슨은 의사다. 유럽에 비해 과학의 발달이 한참 뒤쳐진 러시아조차도 19세기 소설인 ‘죄와 벌’을 보면 귀족이나 인텔리들의 대사에 신앙 못지않게 과학적 근거를 중시여기는 사고가 등장한다.


박자세의 치열한 공부는 그 시기와 닮아있다. 그런데 18-19세기의 아마추어 과학자나 소설 속의 인물은 주로 부르조아 계층이다. 그들은 먹고 사는데 문제가 없고 생계 노동에서 자유롭다. 풍요에서 오는 여유를 진리 탐구에 갖다 댈 수 있는 구조였다. 21세기 우리들의 사정은 좀 다르다. 계급은 없으나 계층은 엄존하여 개인의 노력으로 인텔리까지는 진입이 가능하지만 부르조아의 여유를 누리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비루한 처지는 아니더라도 생계의 노동을 하고 남은 시간에 공부를 해야 한다. 특히나 큰 돈이 들어가는 해외 학습탐사는 미리 적금이라도 들어두지 않으면 그림의 떡이요 닭 좆던 개 지붕 보는 격이 된다. 그럼에도 박자세는 해마다 두 번씩 꼬박꼬박 해외 학습 탐사를 간다. 한 번이라도 다녀와 본 사람은 그 가치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사회 일반의 시각은 다를 수 있다.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들에겐 박자세의 공부와 탐사가 유한계급의 지적놀음으로 곡해될 여지가 있다.


여기서 박자세 책 만들기의 의미가 드러난다. 박자세의 책은 박자세 회원들의 치열한 학습의 결과물이다. 아마추어라 하지만 전문가적 향연이며 지식의 포틀래치다. 이 지식의 나눔이 현실과 깊은 연관이 없어 보이는 공부를 부끄럽지 않게 지탱하는 근거가 되어준다.  박자세는 세상을 향한 선물을 준비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