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래비티 -  중력으로 거듭나다

 


영화 그래비티의 주인공 닥터 스톤 라이언은 허블 망원경을 고치기 위해 우주 정거장에 파견근무를 나온 과학자다. 동료이자 지휘관인 매트 코왈스키는 오늘이 마지막 임무라서 여유롭게 우주 유영을 하고 있다. 그러다 갑자기 밀려드는 인공위성의 잔해와 우주선이 충돌하고 둘은 우주에 내동댕이쳐진다.

 

그러나 그래비티는 재난 영화가 아니다. 화려한 액션이나 영웅적 전투장면이 없다. 달콤한 로맨스의 기미는 더더구나 없다. 하지만 잠시도 다른 생각을 할 수 없게 만드는 진짜 우주의 모습이 있다. 슬프도록 아름다운 우주의 시공과 푸른 지구, 그리고 인간. 신기하게도 이야기는 먼 곳이 아니라 가까이 있는 바로 우리의 스토리로 읽힌다. 그만큼 몰입도가 있다. 지구에서 600KM 떨어진 상공은 소리를 전할 매질인 공기나 기압이 전무한 진공의 침묵만 이 있다. 스톤 박사는 지구의 소란스러움을 떠나 검은 우주의 고요함으로 피신했지만 그 고요함은 평화와 위로가 되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 단말마조차 허용되지 않는 절대적 침묵이되기도 한다.

 

우주에 속한 모든 존재는 탄생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중력을 받으며 살아간다. 중력은 때로 감당하기 어려운 무게가 되어 삶을 짓누르는데 스톤에게는 어린 딸의 갑작스런 죽음이 그러했다. 이런 고통은 생명이 있는 자에게 지속되어 온 일로 천 년 전의 고려가요 ‘청산별곡’ 역시 숙명적 고통을 노래한다. ‘어디서 날아온 돌인가. 누구를 맞히려던 돌인가, 미워할 이도 사랑할 이도 없이 맞아서 우니노라’ 근원을 알 수 없는 고통 앞에서 저항해볼 엄두도 없이 탄식하고 체념의 눈물을 흘리는 인간들. 스톤은 딸의 죽음 이후 밤마다 라디오를 틀어둔 채로 지칠 때까지 차를 몰고 달려야만 했다. 고통을 피해 우주로 날아온 그녀에게 침묵과 무중력은 안식처가 되어 주었다. 아무것도 없는 검은 우주는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고 생명의 흔적조차 없다. 게다가 우주에서 물질의 분포는 너무도 희소하여 생명 자체가 매우 드문 현상이다. 하지만 더 큰 슬픔이 작은 슬픔을 위로하듯이 우주의 삭막함은 그녀의 고통을 눌러주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다.  90분마다 인공위성의 잔해가 거대한 돌덩이가 되어 그녀의 삶은 다시 휘청거린다 .

 

우주선과 자신을 묶어 주었던 끈에서 튕겨 나온 스톤은 한없이 회전하며 자신이 어디 있는지 가늠도 못하고 스스로의 숨소리에 귀가 멀 것만 같은 공포를 경험한다. 이때만 해도 주인공은 중력의 양가적 의미를 아직 모른다. 중력은 자기 몸무게만큼 짊어져야하는 물리량을 넘어 각자 사는 동안 책임져야할 인생의 무게이며 분량이다. 감독의 의도를 빌자면 중력은 지구(집)로 끌어당기는 힘이며, 고난을 이기고 살아가게 하는 삶의 의지이자 사람들 사이에 서로 끌어당기는 관계의 힘이다. 중력은 고통의 원인이기도 하지만 절망을 벗어나 삶을 버티게 하는 원동력인 셈이다.

 


지휘관이었던 매트 코왈스키는 스톤을 구하기 위해 줄을 놓고 갠지스 강의 노을이 아름답다는 인사를 남긴 채 영원한 우주 유영을 떠난다. 혼자 남은 스톤에게 지구의 전파가 잡히고 구조신호를 외치지만 개가 짖는 소리와 우는 아기를 달래는 자장가 소리가 들린다. 그녀는 죽음을 두려워하며 기도를 부탁한다. 이때 흘리는 그녀의 눈물은 화면을 넘어 우리에게 전해지지만, 우리는 멀리서 가장 외롭고 고요한 죽음을 지켜볼 뿐. 산소를 내리고 죽음을 준비하던 그녀를 구원하는 것은 역시 매트다. 산 자를 찾아온 죽은 자는 그녀를 다시 생으로 끌어내어 이륙과 착륙은 같은 원리라는 가르침을 주고 갠지스의 황혼처럼 아름답게 사라진다. 죽은 자가 말하는 삶의 원리에 따라 그녀는 착륙을 준비한다. 고통과 죽음마저도 맞설 준비가 되어있는 그녀의 한 마디

 “ I'm ready ! ”

 

 

이륙을 위해 착륙의 핸들을 당긴 그녀의 작은 우주선은 무사히 지구에 착륙한다. 그리고 호수 속에서 수면위로 헤엄쳐 오를 적 그녀 옆의 개구리 한 마리. 이 유머러스하고 마음 따뜻해지는 동행에 웃음 지을 때 물 위에 누운 시선으로 바라본 잠자리의 윙윙대는 날갯짓, 바람에 산들대는 물결과 풀잎의 소곤거림, 푸른 하늘과 흰구름은 전의 지구와 다른 느낌으로 펼쳐진다. 그녀는 갈색 흙을 손에 쥐고 일어서고 오랜만의 중력으로 인해 휘청거리지만 두발로 우뚝 선다. 그녀 앞에 펼쳐진 풍경이 아름답기만 한 것은 아니다. 서호주 사막처럼 붉은 흙 위에 드문드문 가시풀과 돌맹이들이 놓인 거친 곳이다. 하지만 그녀의 이름은 스톤(STONE)이다. 바위는 온 몸으로 중력을 견디며 고통스런 풍화작용 끝에 자갈이 되고 흙이 되어 생물의 뿌리를 붙잡아준다. 그녀는 중력으로 묶여진 관계속의 존재로서 책임을 다할 것이다.

 

2.  변호인 - 지상의 중력

 

광대한 우주에서 인간 존재와 관계의 소중함을 느끼고 지구로 귀환한 사람이라면, 돼지국밥집 홀어미의 절망과 그 아들의 멍든 몸뚱이를 무심히 지나칠 수 없다. 힘겹게 공부해서 일류의 길에 들어선 주인공은 바다가 보이는 넓은 아파트에 살고 요트로 세계일주를 즐기는 삶을 선택했고 그것은 고생 끝에 낙이 온 것처럼 지당했다. 그러나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무게로 공명해버린 변호인 송우석은 그 전의 잘 나가는 세금 전문 송변호사로 맘 편하게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어린 청년에게 던져진 부당한 돌멩이를 보고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를 외치는 송우석의 모습은 진솔하다 못해 답답해 보일 지경이다. 그러면 안 되는 걸 누가 모르나, 세상이란 원래 부조리한 걸 어쩌라구 싶은데 그는 일어나 움직이기 시작한다.

 

 

영화 변호인을 보고 알았다. 생의 중력을 느끼는 것도 감수성이 있어야하고, 특히나 타인 삶의 무게를 느끼려면 어지간한 이상의 감정 이입과 훈련이 필요하며 이것은 대단한 능력이라는 것. 현재의 상태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삶이란 원래 이러이러한 것이라 여겨 못돼먹은 돌멩이를 맞고도 덤벼보질 못한다. 그저 나에게 날아온 것이 아니길 바랄 뿐 지레 겁먹고 포기하고 만다. 그런데 질문하고 항의하면 모난 돌이라고 망치를 들이대는 사회에서 송우석은 모난 돌을 자처했다. 그는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지당한 말을 책처럼 읊지 않고 울컥 토해낸다.

 

 

아인슈타인의 중력장 방정식에 의하면 중력은 공간을 휘게 하고 시간마저도 왜곡한다. 즉 중력에 의해 시공의 곡률이 생겨나고 그 곡률은 지구 어디서나 같은 포물선을 그린다. 우리의 눈이 그것을 인식하지 못할 뿐 그것이 우주의 법칙이란 것이다. 송우석의 항변은 다른 변호사들의 공감을 끌어내어 꼼작도 안할 것 같았던 그들의 삶에 곡률을 주었고 임계치에 다다르자 변하지 않을 것 같았던 사회에도 변화가 온다. 타인의 중력에 공명하는 능력은 영웅을 낳고 세상을 바꾼다.

 

 

3.  또 하나의 약속 - 눈물의 중력

 

또 하나의 약속은 수업용으로 선택한 영화였다. 방학이 끝나기 전 즐거운 추억 하나 만들자고 계획한 것이 영화 비평 수업이었고 개봉관이 많지 않아 내가 미리 보질 못하고 그냥 간 것이 실수의 시작이었다. 영화 시작하고 5분도 안돼서 벌써 아이들의 반응이 걱정 되었다. 봐라, 약자는 밟힌다. 이러니까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 가고 화이트 칼라가 되어야 한다. 이렇게 뻔한 결론을 내리지 않을까 싶어서 영화를 보는 초반에 안달이 나 옆에 앉은 학생들을 슬쩍 본다. 녀석들은 미동도 없이 집중해서 본다. 별다른 기미가 없다. 그리고 조금 뒤 나는 이 걱정이 학생들을 향해서 하는 것인지 교사인 나를 향해서 하는 것인지 헷갈린다.

 


영화 속 윤미의 집은 고등학교 시절까지 살던 나의 시골집의 풍경과 닮아있다. 바다의 파도 대신 실개천과 얕은 산이 둘러쳐 있다는 것만 빼면, 춥고 낡은 집의 모양새나 온수가 나오지 않아 빨간 고무 다라이에 더운 물을 부어 몸을 씻는 화장실의 장면도 비슷하다. 진성 반도체 직원인 윤미는 반도체 원판을 화학 물질에 담그는 작업을 한다. 대기업에 취직 했다고 좋아라 했지만 취직 18개월 만에 백혈병에 걸리고 발병 2년을 못 넘긴 채 숨지고 만다. 딸의 죽음을 산재로 인정받기 위해 아버지 상구씨는 소송을 무마하는 대가로 합의금 10억을 내미는 회사의 제안을 거부한 채 6년 동안 고군분투 한다. 그는 지금도 속초에서 택시 운전을 하고 있다.

 

영화가 끝나고 바로 일어설 수가 없었다. 어깨를 들썩이는 내 옆에 중학생 제자가 앉아있었다. 이 녀석, 화장실이라도 갈 것이지.  울음을 참느라 고개를 숙인 채 얼굴을 손에 묻었더니  어깨가 아프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울음은 오열에 가까웠다. 내가 왜 이러는지 나도 모르겠다 싶을 정도로 목메어 울었다.  내 어린 시절 가난하고 소박한 시골살이와 닮아서일까. 아니면 고등학교 졸업 후 취업 전선에서 너무도 빨리 전사해버린 윤미의 삶에 대한 동정인가.  아니다. 그런 식의 슬픔이 아니다. 이것은  ‘인정 욕구’ 때문이다. 나는 이런 사람이고 이러한 상황이었음을 사실 그대로 인정해 달라는 그들의 지당한 요구가 묵살되고 왜곡되어 짓밟히는 모멸감에 대한 분노와 슬픔 때문이었다. 노동자의 권리라고 부르든 인간의 존엄성이라 부르든 내가 여기 이렇게 있다는 것을 알아 달라는, 그냥 사람으로서 대우해 달라는 인정투쟁이다.

 


나는 그런 사람들이 있는지도 몰랐다. 가끔 신문과 뉴스를 통해 전해 듣지만 그냥 몰랐다. “누나가 죽은 것은 기업 때문이 아니라 가난한 아버지 때문이에요” 대기업의 횡포에 동조하는 상구씨 아들의 말을 들으며 피해자가 스스로를 인정하지 못하도록 자기부정의 논리를 만들고 이식한 자들은 누구인가 생각해 본다. 그리고 그러한 세력이 판을 치도록 어쩌면 나도 애써 모른척 한 것 아닌가까지 생각이 미친다. 이제는 정말 아이들이 아니라 내가 걱정되어 침을 꼴깍 삼킨다.

 


부은 눈으로 어린 제자들과 김밥에 우동을 먹으며 물었다.

영화 재미 있었니?

- 아뇨, 우는 영화 싫어해요.

- 이런 거 별로 안좋아해요.

 

아이들은 울지 않았다.  우는 영화가 싫다고 했다. 그러나 영화 비평 수업에 대한 불만은 없어 보인다. 중학교 2학년 남학생들이 감당하기엔 조금 버거웠지만  아이들은 이것도 외면할 수 없는 현실임을 알고 있다. 지금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이 녀석들이 찔끔 혹은 펑펑 울어 주기를 바란다. 공감의 눈물이 보태질수록 억울한 눈물이 줄어드는 세상이 될 것이다. 눈물의 중력을 믿기 때문이다. 영화 그래비티가 우주에서 정제된 묵직한 눈물 한 방울을 우리에게 보내 주었다면, 변호인은 지상의 아픔을 공감하게 주루륵 흐르는 눈물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약속은 눈물이 우리 삶에 얼마나 대단한 중력을 발휘하는지 밀도 높게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