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의 전화를 받고 오늘이 41일이란 걸 떠올렸습니다. 동생이 전하는 내용이 만우절 특집이길 바랐지만 알고 있습니다. 농담이 아니란 것을. 엄마나 다름없는 큰이모의 병환 소식이 실감나질 않았습니다. 당뇨 합병증에 뇌출혈로 3번을 쓰러지셨다 합니다. 군산 해망동. 이모가 오래 살아온 곳입니다. 선장인 남편을 바다에 내어주고 청상이 되어 역시 홀로 된 시어머니와 외아들을 뒷바라지하며 살아온 이모는 억척스러워서 대장부 같습니다. 몇 년 전 아들마저 저 세상으로 보내고 어린 손녀를 의지하며 살고 있는 곳, 해망동은 바다를 굽어보는 달동네입니다. 바닷가라지만 산동네란 말이 더 어울리는 이곳은 제가 일곱 살까지 유년시절을 보낸 곳입니다.

 

 

낮은 시멘트 담벼락에 얼굴을 대고 바라보던 붉은 일몰과 손바닥만한 땅뙈기마다 심겨진 푸성귀, 좁은 옥상에 널어놓은 생선의 꾸들꾸들한 비린내, 고양이를 볼 적마다 홰를 치는 닭과 고샅의 바지 벗은 아이들의 고함 소리가 섞여 있는 곳. 어른 두 사람이 어깨를 나란히 할 수도 없는 좁은 골목을 따라 호랑이 바위까지 걸어가면 그 아래 잔뜩 모여있는 뱀딸기. 해망동 뒤편 월명 공원의 울창하고 그늘진 숲은 음침하고 신비한 음영으로 남아 눈 감아도 훤히 보이는 풍경입니다. 그 유년의 터무니가 안팎으로 허물어졌습니다.

 

 

쓰러진 이모는 뇌출혈의 후유증인지 우물거리는 소처럼 말을 자꾸 되새김질합니다. 저는 이모의 어눌한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이모는 40여년의 세월을 거슬러 기어이 일곱 살의 저를 불러냅니다. 여든의 이모가 제 볼을 쓰다듬으며 왜 이렇게 늙었냐고 눈물을 훕칩니다.

 

 

병원을 나와 해망동엘 가보았습니다. 갯벌의 굴딱지인냥 바다를 향해 붙어있던 집들이 모두 허물어져 빈 터만 남았습니다. 폐자재만 뒹구는 게 가을걷이 다음날 다랑이 논처럼 층층이 어수선한 곳에서 동생이 우리가 살던 집터를 묻습니다. 저도 알 수 없지만 눈대중으로 가늠하며 그냥 저기 푸른 보리싹 있는 곳이라고 손을 들어 가리킵니다. 집과 사람뿐 아니라 길도 사라지고 길 아닌 것들도 묻혀버린 유년의 터에 철거반 일꾼들이 던져둔 면장갑 한 짝이 뒹굴고 있습니다. 그래도 봄은 비켜가지 않고 돌벽엔 새끼 손톱만한 꽃마리가 피어있고 구릉엔 붉은 동백이 만개했습니다. 벚나무도 사이사이 꽃망울을 달고 있습니다. 저는 나무처럼, 잔꽃처럼, 무심하고 멍하게 바다를 눈에 담았습니다.

 

 

약간의 두통이 있지만 세 시간을 달려온 멀미 증세라 우기며 공원 계단에 떨어진 동백꽃 한 송이만 손에 얹고 오는 길, 해망굴의 바람은 유난히 차가워 발걸음을 총총하게 합니다. 오늘밤에도 바다에는 검보라빛 노을이 지고 밤바람 소리가 호랑이 바위 건너 해망굴까지 쏘다닐겁니다. 그 바람이 나의 두통과 신열을 내려주길, 부디 이모의 굳은 혀를 시원하게 쓸어주길 바랍니다.

 

 

산화되어 무너진 해망동과 이모를 보며 가난하지만 아름다웠고, 슬펐지만 기억에서 놓고 싶지 않은 제 유년의 터를 되새깁니다. 봄날 유년의 터무늬를 보고 왔습니다



찾아보니 2009년에 썼던 시조가 하나 있더군요.

마치 예견이라도 한 듯이.

 

 

군산시 해망동

 

바다가 굽어 뵈는 산중턱 달동네

크레타섬 미궁인지 갈매기도 길을 잃어

꾸불텅 백팔 계단을 날개접어 오르네

 

아침부터 까막까치 때죽때죽 짖는데

깃발처럼 으스대는 검은 연기 굴뚝에

하꼬방 코딱지 마당 붉은 놀에 잠긴다

 

달뜨고 별이 총총 하늘에다 집짓는 곳

열하루 세어나 봐도 가고 오지 않더냐

참말로 어째야쓰까 스러져갈 해망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