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태권도를 배우기 시작한지 2년이 되었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태권도장에 등록한게 2년 전이고 배우기 시작한건 그 후의 일이죠. 적응하는데만도 몇 달이 걸렸으니까요. 처음엔 한 시간 수업에 30분도 못 버텼고 '집에 가겠다고 소리지르지 않고 체육관에 머무는것' 자체가 목표였지요. 감각통합치료사 선생님께서 시지각발달과 신체조절 등에 도움이 된다고 하며 추천하신 것만 아니었으면,  태권도는 학교가서나 배우자며 진작에 관두었을지도 모릅니다. 


   남이 하는 동작을 보고 따라하는 것에 약한 아이는 버벅대면서도 조금씩 배워나갔습니다. 주의력도 좋지 않으니 사범님이 동작을 보여주시거나  지시를 내릴때, 또는 게임규칙을 설명할 때 혼자 딴 데 보고 있기가 일쑤였죠.  그러고는 옆에 아이들이 하는 것 보고 한 템포 느리게 따라가고요.  옆에 아이 보면서 따라할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게 어디냐 생각하며 하루에 작은 것 하나라도 배우라는 생각으로 꾸준히 보냈습니다. 느리게나마 아이는 그곳에 적응을 하고 어느덧 자기가 좋아서 태권도장에 가는 날들이 오더군요. 여전히 팔벌려뛰기(PT체조) 할때 팔동작만 제대로 하고 발은 모은 채로 점프를 하긴 하지만^^;;


  태권도장에서는 한 달에 한 번 승급심사를 봅니다. 급수가 두 단계 올라가면 띠 색깔이 바뀌죠. 태권도를 배우는 아이들에게 띠 색깔은 자부심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한 해에 한두번 쯤은 체육관 자체심사가 아니라 공개심사를 보는데 부모님들도 다 오셔서 그동안 아이들이 열심히 수련한 결과를 지켜봅니다.  지난봄의 공개심사는 심사위원으로 외부인사가 오셔서 심사를 해 주셨죠.


아이들이 품새와 발차기를 하고 나서 심사평을 듣는 시간이었습니다. 심사위원 분이 제 아이와 또 한 아이의 이름을 부르시더니 말씀하셨습니다. 

 " 지금 이름 부른 두 사람, 그 동안 수련 열심히 안 했죠?  아니면 꾸준히 출석 안하고 많이 빼먹었든가.  제가 보면 다 알아요.  자기 띠 색깔에 비해서 실력이 많이 부족해요.  앞으로는 더 노력하도록 하세요~!"

 

 학부모 관람석 맨 앞줄에 앉은 저는 마음속으로 대답했습니다.

  " 아닌데요.  정말 열심히 출석했는데요.  많이 아플때만 빼고는 매일 나왔는데요.  우리 아들은요 꾸준히 했기에 저만큼 하는거에요 선생님.."   아이 얼굴을 슬쩍 보니 심사위원의 말을 잘 듣고 이해하기는 한 건지 부끄러운 기색도 속상한 기색도 없이 그냥 그렇게 서 있습니다. 

 

  원래 빨간띠까지 가면 그 다음은 국기원에 가서 품띠를 따는 것이 목표인데, 실력이 안 되는 제 아들은 빨간띠를 아주 여러 달 매었답니다.  자기보다 늦게 태권도를 배우기 시작한 친구들이 똑같이 빨간띠를 매게 될 때까지요.  이 녀석의 수준을 너무 잘 아는지라 국기원 도전은 아직도 멀었다고만 생각했는데, 한 달 전 쯤 관장님께서 전화를 주셔서 "이제 호야도 국기원 갈 준비를 시켜볼 수 있을 것 같아요." 라고 말씀하셨을 때 얼마나 기쁘고 감사했는지... 


  같은 동작을 반복해서 연습하느라 힘들어도 하고 그래도 이제 품띠 딴다는 일념으로 참고 해보기도 하고. 또 어떤 날은 어색한 자세를 반복해서 고쳐주시는 사범님께 “왜 또 하라는 거야!”라고 대들기도 하며 아들은 국기원 갈 준비를 했습니다.    오늘이 바로 국기원 심사보러 가는 날이었습니다.  흰 도복에 빨간띠를 매고 나서는 아들의 손을 잡고 도장에 데려다 주면서 당부를 했습니다.  " 오늘은 특별히 관장님이랑 사범님 말씀 잘 듣고, 품새는 평소에 연습한대로만 하면 돼.  그리고 겨루기 할 때는 지난번에 도장에서 OO이랑 겨루기할 때처럼 몇 번 차고나서 그냥 가만히 서있으면 안 돼. 높이, 힘있게 차고. 계속~ 여러 번 차야 돼, 알았지! "  아이는 시선이 다른 곳에 간 채로 네. 네. 합니다.  내 말이 녀석의 귓전에만 도달했는지 아니면 마음에까지 가 닿았는지 오늘 같은 날은 더욱 궁금합니다.


  제가 중학교때 배우다 만 태권도를 다시 해야겠다고 마음먹은것도 이 녀석 때문이었네요. 엄마가 먼저 도복을 입고 열심히 수련하면 조금이나마 보고 배우는것이 있지않을까 하는 바램으로요.  어른이 되어 배우는 태권도는 십대때 배우던 태권도와는 다른 무엇이었습니다.  단순히 몸을 움직이는 기술로서가 아니라 동작의 의도나 맥락을 생각하며 배우게 되기도 하고, 무엇보다 스트레스 해소기능이 탁월했습니다.

 

 돌아서면 쌓이는 집안일과 아이의 치료실 일정에 따라 짜여진 하루 일과를 마치고 나면 몸보다 마음이 지칩니다.  치료실이나 유치원에서 들은 말들 때문에 마음이 꽉 차 버릴때 '걱정하지 말자. 걱정한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닌데 뭐.' 하고 되뇌어 보아도 잘 되지 않고.  그럴 땐 도복으로 갈아입으며 벌써 기분도 새로워지는 듯 합니다.  미트(발차기 할 때 타격목표로 쓰는 물건)가 마치 나를 괴롭히는 근심걱정 덩어리라도 되는 것처럼,  깨부숴버리겠다는 듯 뻥뻥 차기도 하고, 몸 움직임과 정확한 동작에만 집중하며 한 시간 동안 땀을 뻘뻘 흘리고 나면 무겁고 답답한 마음은 어느 샌가 사라져있습니다.  남아있는 경우라도 수위가 훨씬 낮아져 있습니다.

 

 운동 한 시간 했다고 내 마음상태가 확연히 바뀌어있는 경험이 반복되면서  '이게 뭐지? 내게 주어진 조건이나 상황은 그대로인데 나는 한 시간 전과는 달리 긍정적인 관점에서 아이와 내 삶을 바라보고 있네.  그렇다면 정해진 문제나 고통이 있다기보다는 그걸 받아들이는 자세와 관점이 중요한 거로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강남역에서 내려 큰 아이 손을 잡고 국기원까지 뜨거운 햇살을 받으며 걸었습니다.  태권도 선배인 큰 아이가 아침에 제 동생에게 진지한 목소리로 " 호야, 오늘 잘하고 와. 꼭 심사 합격해야 돼. 겨루기 심사 볼 때는 집에서 형하고 싸울 때처럼 세게! 높이 차야돼. 알았지? 태권도장에서 하던 것처럼 대충 차지 말고." 하던 것이 생각나 푸후훗 웃음이 났습니다.

 

심사위원들 앞에 선 아이는 살짝 미소를 띠고 있었고 조금도 긴장한 기색이 없었습니다. 나이가 좀 있는 학생들 또는 어른들이나 심사볼 때 긴장을 하지 뭣모르는 어린아이들은 긴장 안하고 평소대로 잘 한다네요.^^  여러번 연습해서 몸에 익은 대로 태극 1장과 8장을 실수없이 마치고 아이는 겨루기 심사를 보는 곳으로 이동했습니다.

 

 저는 이층 난간을 따라 아이가 있는 쪽으로 가서 아래쪽을 보며 큰소리로 얘기했죠. " 호야, 잘 했어!  겨루기도 잘 해~  가만있지 말고 발차기 계속 해야 돼. 계속 차! "  말을 마치자마자 그제서야 제 아들 옆에 있던 아이가 눈에 들어오더군요. 제 아이와 겨루기 할 상대방인 아이....    아이코.  내 아들이 계속 차면 저 아이는 맞으라는 말이 되잖아.  귓속말도 아니고 다 들리게 외쳤으니 이를 어째...  어른으로서 좀 부끄러웠습니다.

 

 아이는  제 형하고 싸울 때만큼은 아니지만 평소보다는 세게 그리고 여러 번 발차기를 했고 겨루기 심사도 무사히 마쳤습니다.  안도. 안심. 감사함. 시원한 마음. 


 녀석은 천진한 얼굴로 사범님을 따라 대기석으로 돌아와서는 저를 보자마자 " 엄마, 뭐 가져왔어?(간식 찾는 멘트)" 그럽니다.   "호야, 오늘 진짜 잘했어. 엄마는 너무 기쁘고 호야가 정말 자랑스러워! " 아이를 품에 꼭 안고 칭찬을 퍼붓는데 아이는 내 품에서 빠져나가며 한 손을 내밀고 말합니다.   " 엄마, 나 잘했으니깐 마이쭈 하나 줘."

 

 다 끝나고 체육관 전 수련생이 단체사진을 찍는 타임인데 이 녀석은 "엄마, 찍지 마!" 하며 발을 구르고 성질을 부립니다. 다른 엄마아빠들 다 핸드폰 들이대고 사진 찍는데 왜 나한테만 그러는거야~ ㅋ

돌려차기도 제대로 못하고 성질도 드러운 녀석이 이제 품띠 따게 생겼습니다. 태권도 정신 (예의, 염치, 인내, 극기, 백절불굴) 중에 제일 첫 덕목이 예의인데요.

 

 오늘은 그 동안 이 녀석 가르치시느라 애쓰신 관장님과 사범님들께 감사하다는 문자 한 통 넣어야겠습니다.  


                                                                                                                2014. 8.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