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박자세 공부법 중 하나는 교과서 주의입니다. 오랜 세월 검증받은 교과서로 공부하는 것이 그 분야를 제대로 학습하는 지름길이라고 박사님께서는 늘 말씀 하십니다.
박자세에서 중요시 하는 글쓰기 훈련 또한, 글쓰기를 업으로 하는 사람처럼 해야지만 실력이 눈에 띄게 향상될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미 많은 회원 분들께서 이 훈련을 하셨고, 아직도 계속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글 쓰는 행위가 왜 이리 간단치 않은지, 게다가 좋은 글은 과연 어떤 것일까요.
박자세 홈페이지를 뒤적이다 실마리를 제공해 준 두 편의 글이 있어 소개합니다.
생각하기는 의도적 행위이다. 생각하기는 의도된 기억탐색 과정이다.
학습은 합당한 기억을 찾아가는 생각하기 과정이다.
말하기는 생각하기의 부분집합이다. 생각하지 않았던 것을 말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말을 잘하는 것은 잘 생각하는 능력의 일부이다.
1000번의 생각이 100번의 말하기로 축약되고 아마 한 두 번의 글쓰기로 응축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글쓰기가 거의 모든 사람에게 힘든 이유일 것이다.
생각하기, 말하기, 글쓰기의 상호관계를 면밀히 관찰해 보면 그 바탕이 궁금해진다.
이 세가지 능력은 모두가 몸 동작이 정교화 되어서 가능해진 진화된 운동성에서 생겨났다.
몸이 피곤하여 집중력이 저하된 상태에서도 생각은 흐릿한 흐름을 계속한다.
그러나 말은 어렵고 글쓰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이 세 가지는 몸 상태의 종속변수이다. 정치한 생각과 일관된 의식흐름이 형성된 후에야 글이 가능해진다.
결국 좋은 문장력은 면밀한 관찰력과 다양한 느낌을 갖는 기억이 필요하다.
글쓰기는 관찰 훈련과 독서를 통한 기억 확장을 바탕으로 한다.
습관화된 세밀한 관찰과 광범위한 독서를 위한 단단한 몸 상태가 글 쓰기 훈련의 바탕일 것이다.
ㅡ 박문호, [말과 글] , 박자세 홈페이지 ㅡ
글 쓰기는 1000번의 생각하기와 같다니, 어렵습니다.
박자세 수첩을 손에 꼭 쥐고, 지나치기 쉬운 사물과 사건도 면밀히 살펴보아 기록하는 버릇을 습관화해야겠습니다.
더불어 박자세 베스트 북을 탐독해야 겠습니다.
다음 글은, 문태준 시인에 대한 비평으로 큰 상을 받은 이홍섭 시인의 글입니다.
문태준 시인의 글이 좋은 이유를 적어 놓았는데,
이는 또한 좋은 글의 특징에 대한 설명이라 생각되어 축약해 보았습니다.
그의 작품에서는 인간을 향한, 삶을 향한 무량한 연민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
문태준 시인의 시는 대부분 우리가 잃어버린 것, 우리가 잊고 사는 것, 우리가 애써 돌아보지 않으려 하는 것들을 펼쳐 보임으로써 김소월이 말한 영혼의 소리를 듣게 만든다.
그가 보여주고 싶은 존재의 실상이란 환한 빛 속에서가 아니라 어둠 속에서, 그늘 속에서, 적막 속에서, 슬픔 속에서 비로서 그 모습을 온전하게 드러낸다.
그의 시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 개의 통로를 지나야 한다.
'수런거리는 뒤란'으로 상징되는 고향의 정경과 그 속에서 살아온 가족사적 내력, 그리고 그가 시의 안팎에 저며 넣은 불교적 사유가 그것이다.
자신의 체험과 세계관 속에 불교적 사유를 저며 넣으며 시의 밀도를 한층 두텁게 한다.
널리 알려진 이 작품은 그가 지나온 시적 세계가 집약되어 있는 작품이다.
이 시 속에는 그늘진 뒤란이 있고, 늘 캄캄하게 입을 다물던 가난한 아버지가 있고, 큰 자비와 큰 슬픔을 보여준 대자대비한 부처가 있다.
시인은 이 세계를 반죽해 묽지도 않고, 그렇다고 굳어 딱딱해져 버리지도 않은, '울음이 목젖에 걸린 세계'를 보여준다.
좋은 시의 실상이란 이런 것이리라.
문태준이 여느 시인과 다른 남다른 개성으로는,
일찍 시를 만났던 사람이 갖지 못하는 맑음과 순결함같은 것이 배어 있고,
그가 시골에서 '서당적 사유'를 할 수 있었다는 점이며,
문재준 시의 근간을 이루는 직유이다.
직유는 '에둘러 가는 세계'라고 할 수 있겠다. 에둘러가는 것은 옆모습을 그려냄으로써 그 존재의 실상을 그려내는 시작법이다. 그의 시는 에둘러 가되 끊임없이 인간화(의인화)를 통해 실상에 접근한다.
ㅡ 제21회 소월시문학상 작가론 (문태준) : 이홍섭 글 중에서 ㅡ
두 글을 읽은 후, 글쓰기가 아주 조금은 쉽게 다가옵니다. 그래, 내 모든 이야기가 글이 될 수 있구나.
삶의 궤적을 잘 살펴보면 수없이 많은 소재들을 찾아 볼 수 있겠군요.
작지만 제가 가지고 있는 보물 이야기를, 부담 갖지는 말되 신중하고 묵묵하게 꾸준한 '글쓰기'를 해 보려 합니다.
익숙지 않은 '글쓰기'라는 행위, 이 어색하고 불편한 느낌을 숨 쉬듯, 매 끼니 챙겨먹듯 자연스럽게 지속한다면, 그간 가지고 있던 저의 좁은 세계관을 확장시킬 큰 발판이 되리라 생각됩니다.
참고한 두 편의 글을 아래에 링크했습니다.
1. 박문호
http://mhpark.or.kr/index.php?mid=Essay&search_srl=6054&page=19&document_srl=6054
2. 이홍섭
http://mhpark.or.kr/index.php?mid=freeboard&document_srl=86999
네...아주 좋은 말씀을 해 주셨어요.
박자세가 단지 자연과학만을 추구하는 곳이 아니라 인생 전반을 소재로.
인생의 궁극을 추구하는 학문인 '철학'을 하는 곳이란 걸 더욱 절감하게 해주는군요.
갈수록 끌리고만 있는데,여여 욕심을 버리고 나서야겠단 다짐을 하게 됩니다.
마구 뛰어들고 싶어서 몸이 근질거립니다.
어려서 중학교에 들어갈 때 어머니께서 두꺼운 일기장을 선물해 주셨어요.
처음엔 일기를 쓴다는 게 정말 어려운 걸 절감하며 거의 절망에 가까운 경험을 했는데...
처음엔 한 줄 두 줄짜리 일기가 다였는데,신기하게도 점차 늘어가고 ...
급기야는 몇 페이지를 써도 부족할만치 사고의 양과 습작의 양이 늘어만 가더군요.
글쓰기는 외국어 공부나 기타 공부와도 같은 것 같죠?
하면 할 수록 늘어가는데,안 하면 갈피조차 잡기가 힘들어지잖아요~
말을 아주 잘하는 사람도 글을 쓰는 덴 서툴기만한 사람도 많이 보죠?
전 제 블로그에서 오늘의 명언쯤을 주워다 올리며,그에 대한 제 생각을 정리해 버릇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언론 매체 등에서 잘못 쓰여지고 있는 말들에의 숙고를 하며,
다시 배우고 ,잘못 생각하고 있던 것들을 깨달아 가고 있어요.
박자세에서 잘못 쓰여지고 있는 말들에의 고찰도 해나가면 좋겠습니다.
너무너무,믿기다,...것 같다,내노라,그리고 일체와 일절을 같은 말로 혼돈 하는 등...
무질서해진 우리의 의식세계의 ,우리 문화의 근간을 이룬다고도 할 수 있는 한글에의 위기의식을 느끼고
지키고 가꾸는 일에 동참하는 사람들의 층을 넓혀가는 데 기여했으면 합니다!
참 춥군요.
다들 건강하시고 행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방긋!
문자의 기원을 보면 상형문자에서 상징 문자로 발달합니다.
이미지가 문자화 된것이지요.
잉가르덴이라는 언어학자는 글쓰기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예술의 본질은 생생한 경험을 매개하는데 있다. 예술 작품은 독자의 도움으로
비로서 성립된다."
'가다머'는 글쓴이 - 텍스트 - 독자" 라는 삼각형의 놀이라고 했고,
잉가르덴은 텍스트는 오직 독자의 구체화 작업을 통해서만 작품으로 탄생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출발한 것이 수용미학인데 독자에 의해 구체화된다는 말은
텍스트는 도식적 구조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다시말해, 독자가 채워야 할 빈 곳이 존재한다는 의미입니다.
의미를 들어내고, 부사와 형용사를 남발하게 되면 독자가 채워야 할
빈 곳을 글쓴이가 뺏어버리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말입니다.
실재라는 세상에는 빈곳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문학적 글쓰기에는
빈 곳을 통해 허구가 등장합니다.
글쓴이가 생생한 경험을 통해 텍스트(문자)로 글을 쓰면
글을 읽는 이도 글을 보며 자신의 경험에 기댈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아는 만큼 보인다고 말합니다.
잉가르덴은 수용미학에 대해 이렇게 덧붙입니다.
"독자의 구체화를 통해서만 텍스트가 작품으로 탄생한다.
작가와 독자 사이엔 일반적 관계만 있을 뿐이다.
결국, 구성되지 않은 '빈 곳'은 채워져야 할 공백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 공백은 원작의 의도에 맞게끔 구성되어야 한다."
글쓰기 훈련중에 박문호 박사님께서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 글은 시골길을 걸어가는 것처럼 되어야 한다. 굽이진 길을 지나 무엇이
나올까 궁금해 하듯이 하여야 한다. 의미를 숨기고 이미지를 들어내야
독자가 빈 곳을 채울 수 있다. '
제가 처음 박자세 글쓰기 훈련을 할 때 가장 많이 들은 말입니다.
심지어 부사와 형용사의 미사여구를 쓰는 순간 독자가 채워야 할 빈 곳까지
뺏는 것이기 때문에 읽는이의 해석할 자유를 없애는 결과를 만든다는
얘기도 해 주셨습니다.
글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과 어떻게 해석될 것인가도 생각하는 것입니다.
읽는이에게 글이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자유가 주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생생한 경험에 기대 글이 쓰여지고, 읽는 이는 자신의 기억으로 글을 완성합니다.
생각하기는 의도적 행위입니다. 의도적 행위가 완성되는 글쓰기는 결국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이야기로 남습니다.
박사님께서 젊은 시절로 돌아가면 글쓰기 훈련을 하겠다고 하신 의미를 조금씩
알아가고 있습니다.
함께 하시지요. 글은 의도적 생각하기의 훈련이라면 글쓰기 훈련은
의식의 체계화가 될테니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