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외우기로 했다. 무슨 원대한 뜻을 품은 것은 아니고 좋은 시 100편 정도 자유롭게 출력 할 수 있다면 인생이 참 풍요로워지지 않을까, 막연하게 생각해서이다.

사춘기 시절 외웠던 몇 편의 시가 삶이 팍팍해 지는 순간들마다 따스한 위안의 손길을 내밀어 주었던 기억도 났기 때문이다. 지난 연말 시와 함께 했던 박자세 송년회가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막상 시작하니 생각보다 쉽지가 않다.

3일에 하나 정도는 외우겠지 했는데, 아니다. 1주일에 하나도 힘들다.

나이에 따른 기억력 탓이야 라고 쉬운 핑계를 대고 싶기는 한데 딱히 그것만이 주요한 이유 같지가 않다. 분명히 제대로 다 외웠는데 되새기면 네모바퀴를 단 수레바퀴가 굴러 가듯이 덜커덕 덜커덕 매끄럽게 넘어가 지지가 않는다.

어렵게, 진땀 흘려가며 한 편의 시를 외우고, 다음 번에는 조금 짧으면서도 쉬운 어휘의 시를 골라본다. 여전히 덜컹거린다. 나이 탓만 하기에는 뭔가 이상하다. 덜커덕 거리는 지점을 세심하게 들여다본다. 예전에 외우던 것과 무엇이 다른가, 살펴본다. 그러다가 아주 나쁜 버릇 하나를 발견했다.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조사를 바꾸고, 혹은 없는 조사를 붙이기도 하고, 시에 쓰여진 단어와 비슷한 단어가 불쑥 튀어나와 그 자리를 메꾸고 있다.

예민하지가 않은 것이다. 시인이 썼던 어휘와 흐름, 뉘앙스를 감지해 내는 감각이 예전과는 다르다. 시에서 멀어져 있던 세월만큼 무뎌진 것도 있을 것이고, 시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단어의 세계 안에 매몰되어 있었던 탓이기도 하다. 그러면서 깨닫는다. 시인이 왜 시인일 수 밖에 없는지를.

비슷한 의미의 말. 그 단어를 쓴다고 해도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달라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바뀌어진 단어 하나로 시는 전체가 달라져 버린다. 날카롭고 비범한 천재성이 한 순간 바닥으로 곤두박질친다. 유전자에 새겨진 예민한 촉수와 감수성을 천형처럼 지닌 채 그것을 언제나 날 선 감각으로 벼리고 갈고 닦으며 사는 이가 시인이 아닐런지.

나이 들어가는 것이 때로 쓸쓸해지는 것은, 무디어지는 감각 때문이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정교한 운동을 위해서 반드시 전제되어야 할 것은 섬세한 감각의 입력이다. Brain이 그렇다. 잘 운동하기 위해서도, 잘 살아가기 위해서도 시인의 경지 까지는 아니어도 좋은 시를 제대로 읽을 수 있는 감각 하나 만큼이라도 갈고 닦아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