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우연히 만나진 한 여류시인의 시에 붙들려 일상의 분주한 준비를 접어두고, 밀쳐두고
하염없이 익어가는 밤입니다.
시간이 사각사각 -- 최승자
한 아름다운 결정체로서의
시간들이 있습니다.
사각사각 아름다운 설탕의 시간들
사각사각 아름다운 눈(雪)의 시간들
한 불안한 결정체로서의
시간들도 있습니다.
사각사각 바스러지는 시간들
사각사각 무너지는 시간들
사각사각 시간이 지나갑니다
시간의 마술사는 깃발을 휘두르지 않습니다
사회가 휙,
역사가 휙,
문명이 휙,
시간의 마술사가 사각사각 지나갑니다
아하 사실은
(동시성의 하늘 아래서
공시성인 인류의 집단 무의식 속에서
시간이 바스락거리는 소리입니다)
시간이 사각사각
시간이 아삭아삭
시간이 바삭바삭
아하 기실은
사회가 휙,
역사가 휙,
문명이 휙,
시간의 마술사가 사각사각 지나갑니다.
내 옆에서 사각이며 사라지고 있는 시간들,
눈처럼, 설탕처럼 아름다운 결정체 하나 만드는 시간이었으면 하는데
눈 깜짝할 사이 흔적도 없이 휙 하고 사라지는 시간일 것만 같아,
마냥 흔들립니다.
무작정 앞만 보고 달리다 문득 멈춰서 돌아보면
그렇게 흘러간 세월의 잔해가 스산하게 널부러져 있습니다.
그 안에서 오래 오래 보고 싶은 스냅사진 한 장이라도 건질 수 있다면
좋겠다, 생각하며 사각이는 시간의 소리를 듣습니다.
사각사각, 아삭아삭, 바삭바삭
바스라져 사라져버리는 것들 속에서
오래 오래 의미 있는 기억으로 남을 수 있는 한 순간 새길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어린 나이인 내가 시 한 편을 통채로 외워 가슴 달램을 하였습니다.
꽃이 지기로 서니 바람을 탓하랴. 입니다.
그 시를 바람 저물고 눈 꽃 고요히 내려 앉는 이은호 선생님 댁에서 태양 에너지 가득 한
그 공간에서 들었습니다.
가슴이 저미는 날에는 가슴 저미는 시가 나를 달랩니다.
나도 너도, 우리도, 첫 사랑도 못 하는 그 것을
하이얀 종이 위에 나린 검은 글자가 그 일을 합니다.
조용히 입에 속삭이는 시 한 구절이 형제보다 낫고, 친구보다 좋으며
연인보다, 애인보다 더 나를 달랩니다.
서글퍼 못 내 중얼거리는 입 가 수런거림이 나보다 더 나를 달랩니다.
바람이 불고, 소리가 스치며, 햇살 뒹구는 그런 날에
사각거리는 뒤척임이 나를 달래는 시간을 선물합니다.
그대, 사건이 누르고, 가슴이 억하며, 사람이 그늘져 사그라들지 않는 시간에,
처음이자 마지막 비행을 하고 있는 낙엽이 떨어집니다.
떨어지는 소리는 햇살 어리는 소리와 같아
눈 감으면 못 내 내린 눈물 소리 듣게 될테니.
그냥 눈 감아 즐기는 시간
아삭 아삭, 사각 사각
그렇게 소리 쌓이는 소리
잊지 않고 기억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