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내 가는 길

법념

향곡(香谷) 큰스님 기일이라 오랜만에 월내(月內) 묘관음사에 가기로 했다. 경주에서 바로 가는 차편이 없어 부산까지 가서 노포동 종점에서 월내로 가는 시내버스에 올랐다. 차창을 비껴가는 바깥 경치를 바라보며 이런 저런 생각에 잠긴다. 돌아가신지 벌써 35년이 지났으니 세월이 정말로 빠르게 지나간 것을 새삼 느낀다.

처음으로 큰스님을 모시고 월내로 갈 때 기차를 탔다. 대구에서 월내까지는 대략 네 시간쯤 걸렸다. 삼등열차 안은 언제나 퀴퀴한 냄새와 함께 사람들의 시끌벅적한 소리로 가득했다. 시자로 따라간 나는 긴 시간을 가야하니까 빈자리 확보가 제일 문제였다. 요행히도 자리를 잡을 수 있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피로가 몰려와 이내 잠이 들었다. 이런 나를 보고 큰스님이 물었다.

“너는 차만 타면 잠이 오나?”

“저는 길 떠나느라 큰스님 것까지 준비하느라 바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당연한 듯이 말하는 나를 보고 암말도 안 하시고 웃으셨지만, 속으로는 같잖게 여겼을 것 같다.

그 뒤로도 월내에서는 항상 기차를 탔다. 역으로 오갈 때 길 옆의 솔밭 사이로 살짝살짝 보이는 바다는 언제보아도 좋았다. 시골의 작은 역이라 특급은 물론 급행조차 머물지 않는 곳이라서 삼등열차밖에 없던 시절이었다.

월내는 임랑(林浪)이라는 예쁜 이름을 가진 아름다운 어촌이다. 절 뒤에 있는 야트막한 산에 올라 내려다보면 도로변에 늙은 해송이 드문드문 서있고, 쪽빛 바다가 끝없이 펼쳐져 있는 것이 보인다. 큰스님 시자로 사는 동안, 틈틈이 뒷산에 올라 바다를 바라보면 가슴이 후련하게 뚫어지는 듯해서 기분이 상쾌했다. 절 안에 키가 큰 맹죽(孟竹) 너머로 보이는 바다는 피난시절의 항구도시 부산에서 바라보는 것과는 사뭇 느낌이 달랐다.

절로 출가한지 얼마 되지 않는 나로서는 큰스님 시봉하는 일이 너무 힘들었다. 그런 속에서 일상을 벗어나는 일이 가끔 생겼다. 큰스님이 출타하시는 날이다. 거의 같이 나가게 되기 때문에 큰 걸망에 짐을 가득 넣어 짊어지고 따라나섰다. 어디를 가던 역으로 가서 기차를 탔다. 차에 오르자마자 자리 잡고 앉으면 언제나처럼 잠에 빠졌다. 그러면 큰스님이 나를 깨웠다.

“잠만 자지 말고 경치도 내다보고 이야기도 좀 해봐라!”

눈을 뜬 순간 차창 너머로 하늘과 맞닿은 바다가 보였다. 파란 하늘, 짙푸른 바다는 언제 봐도 눈을 즐겁게 했다.

생각에 빠져 월내 묘관음사를 지나쳐 한 정거장 더 가서 내렸다. 걸어오면서 보는 바다는 예전과 다름없었다. 절 입구의 해송은 그전보다 크게 자랐지만, 눈에 익은 풍광이었다. 큰스님은 특히 동백꽃을 좋아해서 절 도량의 여기저기에 심어 놓았다. 이제는 제법 많이 커서 꽃망울을 많이 달고 있는 것으로 봐서 빨간 동백이 얼마 안 있어 지천으로 필 것 같다.

돌아가신 기일이 음력으로 12월 18일이라 월내 앞바다에 미역이 많이 나오는 철이다. 미역 이외에 가시리, 톳 나물도 상위에 올랐다. 해조류라면 뭐든 잘 드시는 큰스님이 생각나서 가슴이 울컥했다. 그중에서도 미역귀를 즐겼다. 생 미역귀를 물만 약간 두르고 가마솥에 볶아내면 진한 초록빛이 나면서 진이 줄줄 흘렀는데, 손으로 먹어야 제 맛이라 끈적거리기는 해도 큰 접시로 하나는 거뜬히 먹어치웠다.

돌아오는 길에 절에서 미역을 한 자루씩 주었다. 그전에는 그 무거운 미역을 걸망에 지고 손에 나눠서 들고 역까지 걸어갔지만, 세월이 좋아 모두들 각자의 차에 실었다. 나는 다시 버스를 탔다. 이젠 느린 삼등열차를 탈 수 없다. 느리게 가지만 밖에 보이는 경치를 마음껏 누리며 갈 수 있는 특권도 사라졌다.

지나간 일은 다 좋은 기억으로 남는 것은 아니지만, 느린 완행열차는 내 머릿속에 아련한 추억을 떠 올리게 한다. 느린 열차를 타고 월내로 가면서 한 번 더 차창 밖으로 동해의 짙푸른 물결을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