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자세의 학습법과 그 의미




1. 정철은 왜 이렇게 오래 살았어요?



  고 1학생들이 2학기 중간고사 기간인 9월에 풀죽은 목소리로 선생님~ 하고 길게 부르면 아이구 올 것이 왔구나 싶습니다. 한 번의 설명과 이해로 내 것이 되지 않아 외국어처럼 낯선 지식을 만난 아이들의 반응인데 대체로 고전 시가를 배울 때 나타나는 증세입니다.  여러 편의 시조와 가사 작품인 사미인곡, 속미인곡에 이어 너무나 긴 관동별곡을 접한 학생들은 읽기도 어려운데 제대로 감상해야 풀 수 있는 문제를 앞에 두고 난감해합니다. 그런 아이들의 다양한 반응 중 하나가 바로 “정철은 왜 그렇게 오래 살았어요? ”하는 애꿎은 투정입니다. 어떻게 좀 해달라는 요구이지요.

  

  저는 일단 제가 제시하는 비법대로 1년을 공부하고 나면 정철이 오래 살아서 아름다운 작품들을 창조한 것에 고마움을 느끼게 될 거라고 호언장담 하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그리고 시간마다 소리 내어 작품을 같이 읽습니다. 중세 표기이긴 하지만 우리글인데도 외국어처럼 버벅거리며 읽는 아이들에게 운율을 맞추어 따라 읽기를 시킨 뒤 현대어로 풀이하고 문학적 표현의 상징적 의미를 해석합니다. 정철이  금강산 비로봉을 바라보며 공자의 경지를 노래하는 부분이나,  자신이 천년 노룡 되어 삼일우를 내리고 음지에 시든 풀같은 백성들을 다 살려내겠다고 한 구절, 동해 바다를 신선주 삼아 북두칠성을 술국자로 신선과 대작 하는 장면은 설명할 때마다 작가의 멋진 표현에 감동받아 읽다가 눈물까지 글썽이며 찬탄합니다.  “ 정철은 정말  멋지지 않냐, 대단한  사람이야.  볼수록 재미있지? ” 하는 감탄사를 적재적소에 넣어 줍니다.


  그렇게 되풀이해서 같이 낭송하고 공책에 쓰고 핸드폰에 녹음해오기 같은 과제도 냅니다. 학생 스스로 능숙하게 읽고 풀이하여 구두 테스트를 통과하면 한 작품의 배움이 완전히 끝납니다. 모든 작품을 이리 점검할 수는 없지만 어렵고 중요한 고전 작품 몇 개를 그리합니다. 송년모임에서는 아름다운 고전시가 하나를 정해서 모두 암송하게 하고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시를 하나씩 정해서 따로 발표합니다. 그렇게 작은 교실에 모여서 고전시가를 같은 소리로 암송합니다. 한마음으로 정철을 사랑하게 되는 비법은 바로 암송입니다.






2. 몸에 새기는 기억, 암기.


 

  박자세식 공부법은 한 마디로 말하면 철저한 암기입니다. 때로는 수단이 목적을 능가하거나 발명이 필요의 어머니가 되듯이 박자세식 공부법은 공부의 의미를 견인하는 역할을 톡톡히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익숙하지만 처음 천뇌 발표를 준비 하면서는 어찌나 막막하던지요. 사계절 별자리를 그냥 써가면서 외우고 그려서 발표하라니 말이 되나. 잘못 알려준 것은 아닐까.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나이에 그걸 어찌 다 외울것이며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건가 싶었습니다. 암기 말고 별자리를 알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아 이리저리 기웃거려 보았으나 외우는 것 말고 공부에 왕도는 없었습니다. 세상에는 자신이 직접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좋은 것들이 있는데 자연과학 공부와 공부의 방식이 그 중 하나라는 것을 천뇌 발표 후에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득 다른 사람들의 마음이 궁금해집니다. 먹고 사는데 하등의 지장이 없는 과학적 지식을 무모하리만큼 집약적으로 공부하는 박자세 회원들은 무슨 심정들인지, 이런 전문 지식의 이해자는 천 명 중에 한 명도 안되어 타인들의 공감조차 어려울텐데 왜 이렇게 힘든 공부를 하는 것인지 의문입니다. 0.001%의 선택이라는 희소성이 주는 만족감 하나를 얻기 위한 노력으로 치부하기엔  과도합니다. 사이트에 올라온 옛글을 살펴보고 실마리를 얻습니다. 개인마다 표현의 방식은 다르지만 만족감은 한결 같습니다. 모두들 자연과학이라는 새로운 렌즈를 하나 얻었고 그 눈으로 보는 세상은 전과 같지 않아 일상에서 경이로움을 느낍니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는 각자의 감각으로 세상을 지각할 수밖에 없는 물리적 한계를 숙명으로 지녔기에 인간의 눈으로 박쥐의 시야를 볼 수 없고 인간의 청각으로 돌고래의 노래를 온전히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인간은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을 거리 두고 볼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그렇게 인간은 자연을 ‘우리의 관점’에서 벗어나서 ‘스스로 그러함’에  접근하는 노력을 합니다. 이런 노력중 하나가 박자세 회원들이 말하는 자연과학을 통한 세상보기입니다. 식물의 광합성과 미토콘드리아의 호흡을 모른다는 것은 자연의 물리적 측면 99%를 등한시하는 것이며, 이를 이해하는 것은 물질적 측면에서 보자면 우주와 자연에 존재하는 생명의 이치 99%를 아는 것입니다. 이는 자연과학적 지식을 삶의 철학으로 내면화한 사람들이 누리는 풍요입니다. 그리하여 뜻 깊은 지식의 성찬을 맛 본 사람들은 더 열심히 공부합니다.


  강의 중에는 쉴 틈 없이 내용을 따라서 말하고 쓰고 그립니다. 집에 돌아와서는 틈틈이 강의 동영상을 보며 복습하고 관련된 책을 찾아서 읽은 뒤, 천뇌 발표를 통해 구술과 암송으로 다시 한 번 지식을 공유합니다. 글을 처음 배우는 아이가 천자문과 소학을 암송하고 문리가 트이듯, 정철의 관동별곡이 얼마나 대작인지 실감나게 알기 위해서는 한없이 중얼거리고 낭독해야 하듯 고급 지식을 기억하지 않고 내 것으로 만드는 방법이란 없습니다. 하여 박자세는 가장 최근의 지식인 자연과학을 가장 오래된 방식으로 우리의 몸에 새깁니다.



 


3. 리얼한 선택


  영화  매트릭스를 보면 눈을 감고 황홀한 표정으로 포도주를 음미하는 남자가 등장합니다. 그는 슈퍼 컴퓨터에 의해 조작된 현실의 허구성을 분병히 알면서도 함께하던 레지스탕스 동지들을 밀고합니다. 리얼 세계를 배신하는 댓가로 그가 받은 것은 바로 가짜 포도주의 달콤한 맛입니다. 그마저도 그의 혀가 아닌 뇌에 전달되는 기억을 조작하여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합니다. 그는 모든 것이 조작임을 알고도 그리 선택하였습니다. 헛되고 헛된 그의 선택이 짠해서 오랫동안 기억에 남습니다. 얼마나 허무하였으면 그리하였지 그는 희망이 부족했었나 봅니다. 저도 그런 적이 있습니다. 우리도, 우리 사회도 그런 적이 있습니다.


  생명이 있는 존재들에게 시련이란 매우 주관적인 것입니다. 출산이나 육체적 질병 뿐 아니라 경쟁과 열등감에서 오는 고통이나 피로감에 대한 반응은 동물과 인간 같은 종간의 차이 뿐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말할 수 없이 큰 간격이 있습니다. 고통에 대한 민감성은 인간 종이 발전시켜온 특수성이며 그것을 바탕으로 동물과 다른 방식의 문화를 구축해 왔으며 시련과 고통에 대한 천착이 위대한 예술의 모태로 작동한 경우도 허다합니다. 또한 개인과 사회의 병리적 현상을 분석하고 명명하여 바로잡으려는 노력도 필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역사상 어느 때보다 물질적으로 풍족한 시기에 살면서도 결핍의 고통을 호소하는 역설적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조금 뜸해졌지만 모두들 힐링을 이야기합니다. 웰빙을 외치면서 몸과 마음의 건강을 주장했던 구호들이 더 나아가 힐링을 통해 병의 근원을 제거하기 위한 휴식과 치유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사회 전체가 몇십 년을 숨가쁘게 달려왔으니 쉼이 필요하지요. 하지만 ‘스트레스’라는 단어가 일상화되지 않았을 적엔 스트레스에 대한 민감도가 훨씬 덜 했듯이 과잉진료에 따른 힐링도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전문가들이 말하는 갖가지 이름의 증세에 눌리지 않는다면 더 잘 걷고 웃고 달릴 수 있습니다. 내 처지가 남들보다 나은 상황이니 괜찮다는 식의 비교우위나, 온갖 종류의 가볍고 달콤한 위안에 기댄 프라시보(위약) 효과를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자연이 인간의 목적성과는 달리 원래 그러한 것임을 여실히 알고 인정하면 우리는 인간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하여 우주 안에서 모든 종류의 죽음은 커다란 자연사의 일부이며 생명에의 시련이 고통에만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면 삶이 과도한 절망이나 분에 넘치는 희망에 사로잡히지 않고 균형있는 시각을 갖게 됩니다.  허무함에 지쳐 가짜 포도주의 위약 효과에 나를 맡기지 않고 벼락과 비바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은행 나무나, 쪼개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를 닮은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자연을 통해 배웁니다. 그런데 자연을 접하는 방식이 한쪽에만 편중되어 아쉬움이 큽니다.


  인문학은 인간을 위한 학문이므로 인간 사회에서 널리 회자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나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니 본능적으로 익숙한 까닭입니다. 하지만 자연과학은 ‘나’에 관한 이야기를 넘어서는 학문입니다. 돌과 나무와 그 구성성분인 원자들이 내 이야기처럼 느껴지는데는 시간이 좀 걸립니다. 학창 시절 이후로는 과학 언어를 접할 기회가 적어서 과학적 언어와 사고 방식은 낯선 외국어와 같아 익숙해지는데 의도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무엇보다 과학적 지식은 어려워서 전문가만 접할 수 있다는 식의 사회적 편견을 스스로 깨는 용기가 우선입니다. 자연과학이 생소한 또 하나의 이유는 인간이 자연에서 너무 멀리 왔고 다른 종들에 비해 너무 빠르게 진화해왔기 때문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인간도 자연의 한 부분에 속해 있지만 어떤 면에서는 자연을 벗어난 특이한 위상을 지닌 존재인거죠.


  어쨌든 자연 과학 공부를 통해 사물을 인식하는 방식이 다양해지자 일상이 다채로워졌습니다. 그리고 리얼해졌습니다. 초신성인 슈퍼노바의 잔해가 무기물인 바위가 되고 그 다음에 유기물인 꽃이 되어가는 과정을 알고 ‘별이 바위에 스며들어 꽃이 되었네’ 하는 시구절를 읽으면 그 감동이 배가 됩니다.  얼마전 신생대를 다룬 책 ‘공룡 이후’를 읽고 조류가 공룡의 후예라는 걸 알았습니다. 그리고  아침마다 창가에서 공룡의 노랫소리를 기상 알람으로 듣는 즐거움을 누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