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리[綱]가 되는 개념

 


 

   삼강오륜(三綱五倫)은 유교 질서의 사회에서 인간 관계의 질서를 정하는 표지의 역할을 한다. 이때 강(綱)이란 벼리인데 그물의 코를 꿰어 잡는 동아줄 부분이다. 그물의 위쪽 코를 꿰어 오므렸다 폈다 하는 벼릿줄을 잡아당기면 그물안의 모든 물고기가 쓸려 오듯 벼리는 어떤 일의 가장 주가 되는 것이다. 벼리처럼 지식을 한 번에 엮여내는 것은 바로 ‘개념’이다. 명확한 개념어는 지식의 새로운 문을 여는 열쇠가 되고 다음 차원으로 나아가기 위한 화두가 되기도 한다.

 

 

   박문호 박사는 5년에 걸친 300시간의 강의를 한 번의 결강도 없이 지속했다. 이 집요함에는 자연과 우주를 치밀하게 개념화한 힘이 작동했다. 그는 빅뱅부터 인간의 의식까지를 광자, 전자, 양성자 3개의 변화로 온전히 설명하고자 했다. 이 목표를 위해 5년 전 봄에 시작한 137억년 우주의 역사 강의를 시공의 춤, 원자의 춤, 세포의 춤으로 범주화하여 각각 상대성 이론, 영자역학, 분자 생물학을 안배했다. 가을에 강의하는 특별한 뇌과학은 신경 시스템을 바탕으로 한 인간의 의식을 파헤친다. 말하자면 우주라는 외부의 객관적 세계를 바탕으로 해서 자연을 바라보는 인간의 주관적 의식 진화까지를 다루는 과정인데, 강의의 내용은 검증된 자연과학 교과서와 논문을 바탕으로 선정하고 구성한다. 또한 이 모두는 철저한 개념화를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박자세의 탑다운식 공부 방식이나 천뇌 발표는 모두 이런 틀을 바탕으로 계획된 훈련 코스다.

 

 


   박자세가 추구하는 인간형은 개념의 본질적 힘을 알고 능숙하게 사용하는 자다. ‘실크로드’라는 용어가 동서 문명 교류사의 많은 부분을 함의하고, ‘통섭’이 우리시대 나아가야 할 지식의 방향을 아우르며 등장했듯이 박자세는 강의실에서 익힌 개념을 벼리로 삼아 천뇌발표를 하고 , 학습탐사에서 그물코를 잡아당겨 지식을 온몸으로 체화한다. 이는 박자세 특유의 학습 방식과 문화로 자리 잡았다.  이처럼 개념을 이해하고 만들고 능숙하게 사용하는 것은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는 행위다.  새로운 용어는 그에 걸맞는 문화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에서 항상 동작하는 것은 무의식뿐이다. 자나 깨나 극도로 피곤하거나  화가 났거나 혹은 평온할지라도 무의식은 쉬지 않고 작동한다. 그런데 일상속의 무의식은 위급하지 않은 이상 현재의 평안함을 유지하려는 속성이 있다. 그래서 무의식을 바탕으로 한 일상은 대체로 안이함과 망각의 형태로 드러난다. 다윈과 프로이드에 기대어 말하자면 이는 생명의 진화 과정에서 생존과 번식에 유리한 쪽으로 진화한 우리의 성향이 인류의 무의식 속에 누적되어 온 결과다. 우리가 그 과정을 명명하여 설명한 것은 100년 남짓이지만 생명의 역사 속에서 무의식의 역사는 그보다 훨씬 장구하다.


 

   그런데 인간의 무의식에 대항하여 항시성을 가지고 작동할 수 있는 유일한 의식 상태가 바로 ‘개념화’ 다. 이것은 여실히 알고 있는 상태로서 원하면 언제든지 의식으로 불러낼 수 있는 지식의 대기 모드이고 조건만 맞으면 계속 작동하는 의식화의 에너지원이다. 개념화는 관습과 같은 사회적 기제뿐 아니라 개인적 노력과 의지에 의해서도 획득이 가능하다. 그리고 제대로 체득되어 자기 안에 자리 잡은 개념은 일상의 안이함을 타파하는 원동력이 되고 더 나아가  사회 변화의 추동력이 되기도 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개념은 우리의 삶을 전일적으로 지배하는 강력한 문화가 된다.



   박문호 박사의 강의는 대학 수준 이상의 자연 과학을 내용으로 하면서도 강의 교재나 자료가 없다. 자신이 학습한 것을 바탕으로 칠판에 풀어낸 내용을 회원들은 그대로 노트하고 암기한다. 그는 공부에서 어떤 방식을 가지고 어떻게 맥락을 만들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 이는 한 개인이 10여 년 동안 치열하게 공부하고 체득한 결과로서  다양한 공부법 또한 아낌없이 쏟아 놓는데 그때마다 그가 요구하는 몇 가지의 조건이 있다. 중요 개념을 중심으로 암기하여 공부할 것, 천뇌 발표시 개인의 의견을 첨가하지 말 것, 평소에 운동을 통한 몸 훈련을 할 것, 종교나 정치 논쟁을 하지 말 것, 학습탐사의 주인공은 학습이니 철저하게 학습에 몰입할 것 등이다. 그 중에서도 그가 가장 강조하는 것은 개념화다. 한편 까다로워 보이는 이런 방식은 그가  시행착오를 겪은 뒤 평소에 자신이 세운 교과서주의와 몸 훈련주의 같은 원칙을 철저하게 지키고 검증된 결과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지독하리만큼 확신에 찬 개념주의자다.


 

 

   그러나 박문호 박사가 지식을 두루 섭렵했다는 이유로 그를 백과사전적 지식인이라 칭하면 명백한 오류다. 암기를 공부의 주요 방법으로 채택했다고 하여 A부터 Z까지 서로 무관한 지식들이 나열된 사전의 목록을 떠올리면 곤란하다. 그가 원하는 개념화는 여러 분야의 개념들이 통섭되어 시냅스를 이루고 전일적인 체계를 세우는 것이다. 오히려 그에게는 ‘지구 최초의 우주인’과 같이 선구적이고 종합적인 지식인을 아우르는 표현이 어울린다. 그는 개념의 진정한 힘을 아는 문화 운동가답게 자연과학적 지식을 시적인 언어로 풀어내는데 탁월하다. 이번 천뇌 발표에서는 의상 대사의 법계도 풀이가 그러했다. 한자로 쓰여진 7언(言) 30구(句)  210자의 법성게(法性偈). 지극한 추상화의 결정체인 게를 역시 최고 수준의 개념인 양자역학을 접합해서 우주 대자연의 존재 원리를 한 편의 시처럼 풀어냈다. 진리에 가까운 것들은 모조리 아름답다.


 

 

  우리가 만들고 사용하는 용어가 우리 삶의 수준이요 질을 가늠하는 잣대가 된다. 엽기, 완소남 등은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서 시작하여 이미 일상어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오래된 철학적 명제인 소유와 존재를 비롯하여 근대의 고독한 군중과 피로사회, 몇 년 동안 익숙하게 들어온 웰빙과 힐링, 관음증과 감정 노동,  21세기 노마디즘과 다문화 사회, 우리가 바라는 노블레스 오블리주까지 사회 현상을 개념화한 온갖 명칭이 넘쳐난다. 여기에 시공의 춤, 원자의 춤, 세포의 춤과 같은 자연과학적 개념까지 더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면 우리는 보다 다양한 시선으로 세상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개념을 만들기는 어렵지만  일단 만들어져 회자될수록 스스로가 눈덩이처럼 커져서 우리가 만든 개념에 우리의 의식과 행위가  눌리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지식에 바다에 풍덩 빠지되 빠지지 않는 경지를 위해 제대로 된, 균형잡힌 개념이 절실하다.


 

 

   이쯤에서 나는 박문호 박사와 박자세에 좀 미안하다. 그를 백과사전 지식인이라 칭하는 우를 범하진 않았으나 앞선 글에서 지극히 사적인 관점에서 바라본 그의 모습 일부만을 묘사했다. 그 바람에 광대한 우주 속 지구라는 행성의 인간 현상을 탐구하는 구도자를 몰라 보았으며 박자세를 통한 그의 공부는 수행의 여정이라는 것 또한 미처 깨닫지 못했다. 박자세 안에서 박문호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이미 새로운 차원의 과학문화 운동단체를 대표하는 일반 명사로 작동하고 있다. 박자세의 사단법인 정관에도 명시하였듯 박자세는 사회 전반에 자연과학 기반의 세계관을 확산시켜 우리사회의 균형 있는 학문간 융합을 실천하고 대중의 과학화를 통한 합리적 삶의 양식을 구현하려는 과학문화 운동단체다. 실로 엄청난 포부다.  박문호 박사와 박자세 회원들은 새로운 패러다임을 지향하는 운동가이며 앞서가는 문화의 창조자들이다. 그들은  개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