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 연시의 다소 과장된 '마무리의 과잉'을 좋아하지 않지만,

개인적으로 서울 생활을 접었고, 또 10년간 살던 집을 이사해서 

싫든 좋든 많은 감회가 몰려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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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년간 비행기를 진저리나도록 많이 이용했는데, 지난 주 아침 첫 비행기로 김포를 출발해서

지금까지 보지 못한 황홀한 풍경을 만났습니다. 

눈구름이 짙게 깔리고 청회색 아지랑이처럼 경계가 번져있는..그런 지평선 위로 청회색 달이 뜬 풍경이었습니다. 비행기의 오른쪽 풍경이었지요. 한순간 얼이 빠져서 미처 핸드폰을 꺼내지 못해 사진을 못찍었습니다. 잠시 후 비행기가 착륙을 위해 좌현으로 활강하자 저런 일출을 찍었고..

마크로스코의 작품을 백번 감상하는 것 보다는, 눈구름이 깔리고 습도 때문에 구름위도 번져있는 하늘에서 본 청회색 창백한 달은 정말 비교할 수도 없더군요. 그 달을 다시 볼 수 있다면 언제든 비행기삯을 지불하겠단 생각이 들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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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크 로스코의 작품은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에 표지로 쓰이면서 국내에선 많이

   알려졌습니다. 저 위의 색들이 청회색조로 변한다고 상상하시고 달을 머릿속에 그려보세요.


여튼 그런 달을 보니 뭔가 끝났구나 하는 감정이 밀려왔습니다.

우리의 생각이란 이런 식의 비논리적 감정이입을 하는 것에 익숙할 수 밖에 없는 듯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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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어렸을 때 인형들을 매단 모빌을 달기 위해 천장에 나사못을 박은 것입니다.

이제 그 아이들이 사춘기를 맞이하고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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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은 것은 아이들 키재기를 한 흔적입니다. 

 마치 저속촬영을 한 개화처럼 순식간에 모든 일이 일어났고 끝이 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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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들을 모두 빼낸 3층 아파트 공간이 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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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께 갔습니다.

오래된 라디오에서 나오는 '싱글벙글쇼'(한 10년만에 들어봤네요..)가 여전히 울려퍼지고

아버지는 많이 늙으셨지만 여전히 쾌활하시고

어머니는 병원에 계시지만 여전히 자식 걱정은 '지겹고' 정겹습니다.


조금전에 알라딘 중고서적오프매장에 들렀다가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사나이' 등 10여권의 책을 오랜만에 샀습니다.

(예상외로 탐나는 책들이 꽤 들어와 있습니다. 교과서도.)

3개월 동안 책한권 읽지 않을 정도로 내 주위가 수선스러웠던 것도 스스로 새해엔 털어내야겠군요.


오늘밤부터 이제 책을 읽습니다.

끝나지도 않았고 새로 시작하는 것도 없습니다.

시작하는 것은 지금 시작하고 있고,

끝나는 것도 지금 끝나고 있고,

그 사이에 삶이 있다는(호흡사이에 생이 있다는) 정도로

지금까지의 생활을 정리합니다.


2013년 탐사여행을 가볼 수 있는 행운이 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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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일본인 작가의 작품이 아시아나에서 본 청회색 달의 배경과 비슷하군요..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