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물리학 이론에서는 시간이 거꾸로 흐를 수도 있다고 하지만
평범한 일상인의 관점으로 볼 때 시간의 속성은 물론 시간의 누적조차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한다.
운전할 때 듣는 몇몇 강의가 있는데 박사님 강의 중 화이트 보드를 볼 필요가 없는 외부 강좌나
몇몇 철학 강좌 - 내용 그 자체보다 시대적 맥락에 따라 그들의 아이디어를 어떻게 전개시켜나가느냐 하는 것은 흥미롭다 - 가 있다. 어제는 베르그송이 말하는 시간에 대한 관념, 혹은 시간의 지속, 공간과 분리된 시간 등의 개념의 설명을 들었다. 베르그송은 철학자로서 아인쉬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대한 반박 논문을 쓴 바 있지만 이후 본인 스스로 그 책을 자신의 전집에서 뺐다는 것을 생각하면 철학자가 과학자의 이론을 상대하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아인쉬타인이라는 인물이 예술적 감각과 시적 상상력이 풍부한 상대였음은 (노벨문학상을 탄 철학자인) 베르그송도 뒤늦게 깨달았을 지 모른다, 순전한 내 추측이지만.
최근 친구들과의 대화를 가만히 듣게 되었는 바, 이를테면 신학에서부터 인식론까지 또는 과학의 영역 문제 등 굳이 내가 끼어들 필요도 능력도 없어서 끝까지 조용히 들은 적이 있다. 그러나 대화 중 딱 하나 끼어들고 싶은 것은 바로 시간의 문제였다. 15년 전 쯤인가 한 프로그램에서 본 앵무조개(?)의 사냥 장면은 매우 인상깊었다. 앵무조개는 먹잇감에 조그맣고 하얀 화살을 발사하는데 그 모양이 화살촉과 완전히 닮아 있었다. 독을 묻힌 아주 조그만 그 화살은 먹이의 몸에서 빠지지 않도록 화살촉 모양으로 생긴 것. 일견 조물주가 아니면 그런 지적 설계는 불가능할 것이라는 착각을 하게 하는데 이 후 곰곰이 생각하면서 장구한 진화의 시간은 우리의 인식 능력 너머에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이를테면 뇌과학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나 혹은 아트만 등 유아론에 근거한 인도철학에서부터 과도하게 밀어붙이는 관념론 등은 '인간존재라는 존엄성'에 바탕을 둔다(내 생각이다)는 점에서 이해는 된다. 하지만 과학의 영역이 인간적 정서가 메마른 기계적 벌판이라는 것은 오해가 크다는 생각을 해본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뇌과학 강의를 들으며 진화를 생각하면 오히려 소름끼치는 인간의 존엄성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허무의 다른 모습이 아니다.
박자세 베스트 북 [내 안의 물고기]를 주문하면서 딸아이와 외할머니의 사진을 찾아보았다.
어쩌면 아름다움 그 이상이 거기에 있다.
시간과 자아를 느끼고 의식하는 것은 우리의 뇌세포 덕분일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철학이나 종교, 과학 그 모든 사유체계를 동원해서 알고자 하는 진리의 세계도
뇌세포의 연속성에 기인한다고 여겨집니다.
우리몸을 구성하는 거의 모든 세포는 매일 매순간 죽음과 삶을 통해서 교환됩니다.
새롭게 대체되는 세포들은 시간의 흐름을 인지할 수가 없겠죠.
시간의 흐름을 인지하지 못하면 자아를 느끼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신경세포는 한번만 탄생하고 죽을 때까지 존재하며 연속성을 갖습니다.
만일 뇌세포가 다른 여늬 세포처럼 매순간 교체된다면 시간이나 자아를 느끼거나 인식할 수 없을 것입니다.
몸과 뇌란 조직 이전 단계의 세포에 대해서 더 세밀히 공부하면
철학의 실마리 대부분이 풀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거대담론인 몸과 철학에 집중할 수록 궁금증과 질문이 더욱 복잡해질 거라고 예상합니다.
세포의 종류와 기능과 사멸에 집중하면 생명의 실마리가 모두 풀릴 것입니다.
인간존재를 둘러싼 거대담론은 신경세포의 연속성에 주목하면 해답을 쉽게 구할 수 있을거라 예상합니다.
할머니와 손녀의 외출인가요,
물고기를 바라보는 할머니와 손녀의 표정이 참 행복하고 아름답습니다.
혹시 알아버린 것 아니지요, 내안의 물고기를
내안의 물고기 책 읽고서 딸님에게 들려주시겠지요, 그리고 장모님께도 들려주세요,
점수를 듬뿍 딸 수 있는 기회가 될것입니다.
저도 고등학교 때 생물시간에 배웠던 멘델의 유전법칙을 우연히(매 해마다 마당에 심는 완두콩 종자를 이야기하다가)할머니에게 설명해드렸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후로 할머니는 열혈팬이 되어 용돈도 듬뿍, 만화책을 봐도 다 눈감아주셨지요, 무엇을 해도 믿는다는 표정이셨지요,
내안의 물고기, 발생배우면서 읽었는데, 물고기를 보면서 사진찍어봐야겠어요,
저렇게 행복한 표정이 나오는지.^^*
최근에는 자연과학 서적을 주로 읽고 있습니다만, 싫증이 날때면 철학서적을 꺼내 읽곤 합니다. 철학자들의 전문저서를 읽을 능력은 안되지만 국내에 번역되어 있는 철학사 관련 도서들은 꽤 재미가 있습니다. 최근에 읽은 철학사 책중에 <세계철학사>(슈퇴리히, 자음과모음, 2008)를 아주 재미있게 봤습니다. 이책은 1950년에 초판이 나와 지금 번역된 책은 1999년에 나온 15판의 번역입니다.
이 책은 앞부분에 인도철학사, 중국철학사를 한파트씩 서술한 후 서양철학사를 전통적인 방식에 따라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20세기초반까지 서술하고 있습니다. 특히 칸트에 관한 부분이 매우 좋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책에서 흥미로운 것은 (지금은 21세기이지만) 20세기 현재의 철학을 서술한 부분에서 마지막 챕터를 현대철학의 주제와 문제를 서술하면서 각각 1)인간의 모습, 2)언어, 3)인식과 지식, 4)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5)뇌, 의식, 정신 을 각각 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이 뇌, 의식, 정신이라는 것이 재미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19세기까지 철학이 담당하는 역할을 20세기에는 과학이 완전히 대신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수 있었습니다. 앞으로 자연과학을 이해하지 않고 철학을 한다는 것은 완전한 넌센스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 책도 이런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철학의 핵심적 주제를 인간의 의식이라고 말하고 있고, 이를 위해서는 철학과 과학의 협력이 필수적이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자연과학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가 바론 여기에 있지 않을지.
칸트는 시간과 공간을 인간의 선험적 인식의 틀이라고 했습니다. 비록 과학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칸트의 주장에는 분명 역사적 의의가 있을 것입니다. 칸트는 "성운설"이라는 태양계 기원설을 주장하기도 했지요. 그 시절 칸트는 철학자이면서 분명 일면 과학자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에서는 자연과학, 철학이 구분되지 않고 "자연철학"이라는 말로 통합되어 있었겠지요. 그렇다면 자연과학을 공부하면서도 철학을 한쪽에 완전히 젖혀둘수만은 없지 않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