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거실 창밖을 보니 앙상한 가지만 남은 나무가 우두커니 서 있습니다.
문태준 시인이 말한 김광석의 <나무>노래가 생각났습니다.
제가 22살 무렵 띠동갑 선배가 건네준 김광석 앨범에 들어있는 노래입니다.
그의 부드러운 듯 힘 있는 목소리가 좋아서 듣고 또 듣고.
봄으로 넘어갈듯 말 듯한 2월에 잘 어울렸던 기억이 납니다.
김윤성 시인의 <나무>라는 시를 노랫말로 사용했지요.
문자화 된 시인의 감성을 멜로디와 가수의 목소리가 더해져 새롭게 탄생했네요.
영화 <산책>에서 레코드점 주인인 주인공의 테마 노래이기도 했습니다.
다시 노래를 들으니, 외가댁 동네 어귀에 있던 수백 년 된 나무가 생각납니다.
처음 뿌린 내린 곳에서 묵묵히 살아가지만, 그 침묵의 향기가 은은한 자태의 이미지로 남아있습니다.
나무 몸통에 두 손을 가만히 올려놓고 귀를 대고 소리도 들어봤었지요.
쿵...쿵...쿵... 나무의 울림에 따라 심장도 울렸던 기억이 나네요.
지금은 아무도 살고 있지 않은 외가댁에 가고 싶어집니다.
나무 / 김윤성
한결같은 빗속에 서서 젓는
나무를 보면
황금색 햇빛과 개인 하늘을
나는 잊었다.
누가 나를 찾지 않는다.
또 기다리지도 않는다.
한결같은 망각 속에
나는 구태여 움직이지 않아도 좋다.
나는 소리쳐 부르지 않아도 좋다.
시작도 끝도 없는 나의 침묵은
아무도 건드리지 못한다.
무서운 것이 내게는 없다.
누구에게 감사 받을 생각도 없이
나는 나에게 황홀을 느낄 뿐이다.
나는 하늘을 찌를 때까지
자라려고 한다.
무성한가지와 그늘을 펴려고 한다.
나무의 헛물관과 껍질의 생성과정을 보면 그 경이로움에 숙연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생명에 있어서 삶과 죽음은 서로 얽혀있습니다.
생명은 다른 세포와 생명의 죽음을 기반으로 유지됩니다.
식물의 목질부는 죽은 세포들의 관상기둥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뿌리에서 모은 무기물을 함유한 물을 잎으로 올려보내는 기능을 하며 나무 전체가 중력을 이기고 위로 자라는 것을 지탱합니다.
헛물관이 없었으면 지구의 대지위 깊숙한 곳에는 숲이나 초지를 비롯한 녹색 생명들이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고 작은 이끼무리와 광합성을 하는 박테리아와 조류가 초라하게 지면을 덮고 있을 것입니다.
물론 대지위에 동물의 출현은 상상조차 못할 일입니다.
4억 년 전 진화가 헛물관을 발명하지 않았더라면 오늘날 대지는 황량하기만 할 것입니다.
헛물관은 기능을 하는 세포 시체들입니다.
헛물관 형성은 세포의 순수한 희생입니다.
나무의 껍질은 체관세포들이 잎이 광합성을 해서 만든 영양을 줄기와 뿌리에 운송하는 기능을 하고
1년주기로 죽어서 즉시 껍질이 되어 나무전체를 보호하는 역할을 합니다.
체관세포층이 유용한 창조적인 죽음을 하여 매년 겹겹이 쌓아 놓은 나무 껍질은 살아있는 모든 세포에 도움을 줍니다.
우뚝 솟은 나무의 몸 안에서 기능적으로 죽은 희생자 세포가 살아있는 식물 전체에 꼭 필요한 영구적인 기관이 되어 나무의 삶을 조각하고 나아가 동물과 다른 생명을 뒷바침합니다.
희생하는 죽은 세포와 살아있는 세포가 합쳐 하나의 큰 생명체를 이루는 나무를 보면
살아있음과 죽음이 얽혀있어 그 구분이 사라지는 경이로움에 사로잡힙니다.
죽음이란 개념도 자연에는 애초 없는 현상일 것입니다.
인간의 뇌가 만든 사회문화적 현상에 불과할 것입니다.
이런 눈으로 나무의 시구를 읽으니 감동이 배가됩니다.
"시작도 끝도 없는 나의 침묵은 아무도 건드리지 못한다."
생명의 운명을 홀로 지고 있는 나무의 침묵을 쉽게 깨뜨려서는 안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