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박수용 저자는 개성 있다. 서울대 영문과를 나와서 1991년 EBS에 입사해 20년 동안 자연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현장에서 밤을 새고 고생을 하면서 오로지 찍는 스타일이다. 그의 강의를 들었는데 자연다큐멘터리에도 연출이 많다고 한다.
“산에 울타리를 치고 동물원 호랑이를 풀어놓고 다큐를 찍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면 적은 제작비로도 금방 엄청난 양을 찍을 수 있죠.”
‘시베리아의 위대한 영혼’은 호랑이다. 야생 호랑이다. 만주와 우수리 강 일대를 다니는데 시베리아 호랑이, 백두산 호랑이, 만주 호랑이로 불리지만 같은 종류라고 한다. 호랑이에게는 국경이 없기 때문이다. 요즘 중국에서는 동북호랑이로 부른다. 한대 지방에서 사는 유일한 호랑이다. 그들은 추운 지방에서 살아서 털이 길고 몸집이 크다.
박수용 저자가 시베리아 호랑이를 촬영하기 전에 야생 상태에서 찍은 필름이 1시간 정도 밖에 없었다고 한다. 10,000 마리를 넘던 호랑이가 불과 백 여 년 사이에 고작 400마리 정도로 줄어들었으니 그들이 인간을 경계하고 조심하는 행동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인간은 호랑이를 만나지를 못한다. 그러니 무슨 재주로 야생 호랑이를 필름에 담겠는가?
박 피디는 그래서 비상한 수단을 쓴다. 겨울에 호랑이가 다닐만한 길목에 비트를 파서 그 2평 공간에서 3달에서 6달을 버티는 방법이다. 인간으로서 하기 힘든 극한의 노력이다. 고요한 비트 안에서 잠복하면 바람 소리가 전혀 다르게 들린다고 한다. 웬만한 사람은 1주일을 버티지 못하고 뛰쳐나간다. 그런 비트에서 3달을 기다려도 호랑이가 나타나지 않으면 절망한다. 그러면서 카메라를 붙들고 오늘은! 하면서 다시 마음을 다 잡는다.
호랑이가 비트에 숨은 그를 의심하고 공격하는 장면은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이게 정말 사실일까 싶을 정도다. 그는 어미 호랑이와 새끼 호랑이 3마리에게 며칠 동안 공격당하며 비트를 가린 송판이 부셔지기도 하며 생사의 기로를 넘나든다.
박 피디가 산타고 강 오솔길을 오르다 왕대 호랑이를 만나는 장면은 압권이다. 그 지역을 장악한 수컷 호랑이를 왕대라고 부른다. 이마에 왕(王)자, 등에 대(大)자가 뚜렷하게 새겨진 호랑이다. 호랑이는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천천히 무심하게 걸음을 옮긴다. 그때 박 피디는 호랑이의 말을 들었다고 한다. “움직이지 마라. 그대로 있어라.” 왕대가 오솔길로 사라지자 박 피디는 초라함을 느낀다. 자연의 힘에 눌린 느낌이다.
박 피디는 올해 2월에 다시 시베리아 우수리강 지역으로 들어간다. 늘 제작비가 없어서 고생했는데 이번에는 미국 공영방송에서 지원한다. 아내에게 “호랑이 새끼만 챙기지 말고 자기 새끼도 챙겨라”는 타박을 듣지만 열두 달 중 10달은 산에서 지내는 생활은 변하지 않는다.
책은 문장이 유려하고 뛰어나다. 감탄스럽다. 신화와 자연과 동물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우리의 토템이었던 백두산 호랑이가 눈앞에 선하다. 현장을 겪은 사람만이 쓰는 훌륭한 책이다.
이 책은 보물같은 책입니다.
단순히 호랑이를 관찰하는 수준에 머물지 않고 인간과 생태계 본질에 관해서 사색을 하게 만듭니다.
저자는 인생을 송두리채 바쳐 시베리아 호랑이와 대화에 나섭니다.
저자는 "블러디 메리"라는 암호랑이의 영역을 침범하여 목숨걸고 대화를 시작합니다.
비트에 숨어서 관찰하다가 블러디 메리 일가에 발각되어 공격당하며 9시간동안 영하 30도의 추운 밤을
비트안에서 꼼짝 못하고 움직이기는 커녕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한채 지새웁니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위축되어 있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의 힘없는 초라함에 좌절하고,
절망과 희망이 교차하는 매순간을 서술하는 장면에서 긴장감이 책 밖으로 걸어나옵니다.
블러디 메리의 콧털이 손등을 스치는 순간에 몸이 얼음처럼 굳어지는 느낌이 책을 통해 전해옵니다.
호랑이 보다도 더 호랑이의 습성과 생활과 처지를 잘 알게 된 저자는 마침내 호랑이 몸짓과 눈빛만 보고도
대화가 가능한 수준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러다 차츰 같은 생명체로서 동료의 감정을 교감합니다.
블러디 메리가 불법사냥꾼들이 설치해 놓은 총에 마침내 숨을 거두는 장면의 묘사는 어떤 비극적 장면의 묘사보다도 가슴을 울립니다.
우수리강과 동해를 사이에 둔 이 지역의 생태계가 저자의 눈을 통해 아름다운 이야기를 남깁니다.
시호테알린 산맥은 백두대간의 발원지이며, 우수리숲의 생명체들은 한반도 생명체의 기원입니다.
당연히 이지역의 주인공들은 우리와 기원을 같이 하는 퉁구스 족들입니다.
지도를 거꾸로 보면 바다가 이동을 가로막던 시대에 어떤 경로로 한반도에 인간이 정착하게 되었는지
고고학적인 유물이 없어도, DNA와 언어의 기원을 추적하지 않아도 우리의 기원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알래스카 바람같은 이야기를 읽고서 한동안 마음을 다잡지 못했는데,
이 책을 읽으니 가슴 한가운데 구멍이 뚫리고 시베리아 칼바람이 기분좋게 지나갑니다.
마음은 이미 저자와 호랑이와 함께 발해의 옛 땅인 시베리아 밀림을 밟고 있습니다.
1989년에 나온 맹수와 사냥꾼이라는 책에 담을 넘어 소를 물고 가는 호랑이의 사냥법이 나온 적이 있다. 소의 경동맥을 물어 피를 빼어 무게를 줄이고는 목을 물고 단숨에 벽을 넘어 홀연히 사라진다. 이때 벽에는 호랑이의 발톱자국과 소의 무게에 의해 무너진 흙 부스러기가 남는다고 한다. 그 때 읽으면서도 섬찟했는데 왕대 호랑이를 보며 느꼈을 공포감과 그 너머에 있는 의식에서 들려오던 소리를 작가는 어떻게 들었을까?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