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좋아하는 시인, 이수명이 새 시집을 냈습니다.

제목은 <언제나 너무 많은 비들>입니다.

이수명의 시를 읽으며, 함께 읽고 싶어 시 몇 편과 간단한 저의 견해를 적습니다.

시는 읽기 나름이고, 워낙 제 방식대로 해석한 것이어서

제 해석은 제외하고 시들만 읽으시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날씨가 하루가 다르게 쌀쌀해 지네요. 감기 조심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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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명의 시는 읽는 이로 하여금 ‘시’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과 싸우게 한다. 쓰는 이도 매번 마찬가지의 물음 앞에 서기 때문이지 않을까. 그녀의 시는 편편이 하나의 실험이다. 실험대 위에 올라가는 것은 하나의 대상이나 문장이다. 자기 자신은 가급적 실험대 바깥에서 집요한 물음만을 던진다. 혹은 자신 역시 해부되기를 기다리는 시체처럼 실험대 위에 누워 대상화된다.

 

        <포장품>

 

        물건은 묶여 있다. 나는 줄을 풀고 있다. 누군가 포장된

        도로 위를 달린다.

 

        물건은 포장되어 묶여 있다. 나는 포장을 동여맨 줄을 풀

        고 있다. 누군가 포장된 도로 위를 달린다.

 

        물건은 여러 겹의 비닐로 포장되어 묶여 있다. 나는 비닐

        을 조르고 있는 줄을 풀고 있다. 누군가 포장된 도로 위를

        달린다.

 

        물건은 토막 내져 검은 비닐에 담긴 채 묶여 있다. 나는

        풀수록 조여드는 줄을 풀고 있다. 이쪽을 풀면 저쪽이 엉

        킨다. 이쪽을 풀면 누군가 이쪽을 다시 묶는다. 누군가 포

        장된 도로 위를 달린다.

 

        물건은 묶여 있다.

 

 

<포장품>에서 ‘물건’과 ‘나’와 ‘누군가는 나란히 해부된다. 각각은 서로에게 무관심한 채 각자의 리듬으로 운동한다. ‘물건’은 점점 꽁꽁 묶이는 것 같이 보이지만, 처음부터 그대로였던 것 같다. 오직 겉봉에 관해서 알 뿐이었던 우리는, 정보가 누적되면서 겹겹의 포장을 발견한다. 우리는 물건의 X-ray사진을 정교화해가고, 물건이 토막나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그러나 결국 물건이 무엇인지는 알아내지 못한다. 인식의 한계에 부딪힌다. 우리는 껍데기를 보다 잘 이해하게 되었을 뿐이다. ‘누군가'는 처음부터 끝까지 가장 일관성있게 달리고, ‘나’는 물건과 누군가 사이에서, 가장 동적으로 운동한다. 처음에는 단독으로 줄을 풀지만, 2연에서 ‘포장’과 연결되고, 4연에서 ‘누군가'가 뛰어든다. 셋은 다른 세계에 속한 듯하면서도 하나의 시공간에서 교묘하게 교차하다가, 마지막 연에서 몽땅 하나로 묶인다. 1연에서 출발한 세 문장은 구체화, 개별화되려고 발버둥치다가 결국 동일한 실패로 귀결된다. 세 개의 대상을 삼켜버린 채 포장품은 더 비대해졌을 뿐. 남은 것은 더 아리송해진 물건 하나다. 마지막 문장은 절망적이다. 그러나 묘하게 희망적이다. 물건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나와 누군가는 물건에 포섭되었다. 셋은 하나의 세계에 속하게 되었다.

 

        <야구선수 K>

 

        그가 야구방망이를 휘두른다. 그는 달린다. 야구방망이

        가 달린다. 높이 떠오른 그의 얼굴이 달린다. 사람들의 함

        성이 운동장을 달린다.

 

        그는 달린다. 야구방망이보다 빨리 달린다. 그의 얼굴보

        다 빨리 달린다. 사람들의 함성보다 더 빨리 달린다.

 

        그는 달린다. 운동장은 텅 비어 있다.

 

        그는 더 빨리 달린다. 저 하늘은, 저 하늘 한가운데로 높

        이 떠오르는 글러브는 텅 비어 있다.

 

        그는 달린다. 원 밖으로 달린다. 운동장 밖으로, 자신이

        높이 날려보낸 그의 얼굴 밖으로 달린다. 그는 달아난다.

 

        죽을힘을 다하여 그는 작아진다.

 

        그는 쓰러진다. 사람들이 일제히 그를 에워싼다. 그리고

        목에

 

        그의 얼굴을 걸어준다.

 

 

<야구선수 K>에서도 해체와 분열은 계속된다. 1연의 세계에는 그, 야구방망이, 그의 얼굴, 사람들, 이렇게 넷이 있다. 2연에서 ‘그’는 나머지 셋을 추월하고, 운동장에 혼자 남는다. 외로운 경주이다. 이 순간의 선수에게는 아무것도 들리거나 보이지 않고, 자신의 얼굴 표정도 기억나지 않는다. 5연에서 ‘그’마저 운동장에서 사라진다. 자신을 잊는다. 달리는 행위 그 자체가 된다. 빛이 되어 달린다. 자신은 극복된다. 그리고 그 대가는 톡톡하다. 경주가 끝나고 그는 사람들을 되찾는다. 사람들은 그의 얼굴을 되찾아준다. 그리고 자신들의 목에도 그의 얼굴을 걸어준다. 이수명의 시에서는 자신의 감정이 배제된다. 사물화된 나는 비인간적이고 차갑게 느껴진다. 그러나 사물과 사물화된 나는 비로소 평등해지고, 비로소 같은 층위에 놓인다. 대부분의 시에서 화자는 사물을 인식하고 판단하는 주체의 지위에 올라서 있고, 따라서 필연적으로 상호적인 소통은 실패한다. 그러나 이수명의 시에서 그들은 처음으로 동일한 출발선 상에 놓인다. 이것은 그동안 없었던 많은 세계를 가능하게 한다.

 

이 세계에서의 교감은 낯설고 위험하고 진하다. 별개의 사물은 파괴되지 않으면 이미완전해서 서로에게 들어갈 수 없다. <얼룩말 현상학>에서 나는 얼룩말을 파괴하고 그 속으로 들어간다. 파괴된 얼룩말은 절룩거리고, 자신의 목을 가지고 있는 나의 주변을 맴돈다. 얼룩말은 나를 포위해서 삼키고, 나는 얼룩말의 일부분, 목, 혹은 얼룩이 된다. 얼룩말과 나 사이에는 시작과 끝의 구분이 사라지고, 함께 빙글빙글 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