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수업시간에 교수님께서, 나의 뇌리에 오래도록 자리잡은

한국 소설의 명장면은 무엇인지 한 번 떠올려보는 시간을 가져보라 하셨어요.

아주 짧고 쉬운 소설이지만, 저는 화수분의 마지막 장면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더라구요.

그 이유가 무엇인지 곱씹어보게 되었어요.

박자세분들께서 꼽으시는 한국 소설의 명장면은 무엇인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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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수분은 양평서 오정이 거의 되어서 떠나서 해져갈 즈음에서 백 리를 거의 와서 어떤 높은 고개를 올라섰다. 칼날같은 바람이 뺨을 친다. 그는 고개를 숙여 앞을 내려다 보다가 소나무 밑에 희끄무레한 사람의 모양을 보았다. 그것을 곧 달려가 보았다. 가 본즉 그것은 옥분과 그의 어머니다. 나무밑 눈 위에 나뭇가지를 깔고 어린것 업은 헌누더기를 쓰고 한끝으로 어린 것을 꼭 안아 가지고 웅크리고 떨고 있다. 화수분은 왁 달려 들어 안았다. 어멈은 눈을 떴으나 말을 못한다. 화수분도 말을 못한다. 어린 것을 가운데 두고 그냥 껴안고 밤을 지낸 모양이다. 이튿날 아침에 나무장사가 지나다가 그 고개에 젊은 남녀의 껴안은 시체와, 그 가운데 아직 막 자다 깨인 어린애가 등에 따뜻한 햇볕을 받고 앉아서 시체를 툭툭 치고 있는 것을 발견하여 어린 것만 소에 싣고 갔다.

 ㅡ전영택, 「화수분」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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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작된 지 고작 십여 쪽 만에 끝나고 마는 이 소설에는, 군더더기가 없다. 사건이라야, 큰딸 귀동이를 입양시키는 사건과, 작은딸 옥분이를 지켜내고 부부가 세상을 떠나는 사건 딱 두 가지다. 지게와 홑누더기, 이 둘이 전부인 화수분가족의 세간살이와도 닮아 있다. 소설에 이제 막 빠져 들기 시작한 독자에게, 이 성급한 마무리는 다소 당황스럽다. 남주인공과 여주인공이 동시에 죽어 버리는 바람에, 앙코르를 외쳐볼 여지도 없다. 막이 내리고, 불이 꺼지고, 독자는 하릴없이 극장 밖으로 쫓겨난다. 어떻게 손 써보지도 못하고 끝나버린 한 가족의 인생 드라마는, 이로써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된다. 간결한 구성과 절제된 어조는 아마 작가에 의해 철저히 의도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두 사건 모두, 이미 벌어진 뒤에 단지 전해 듣는 형식으로 처리된다. 아범의 울음소리로 인해 귀동이의 입양소식을 전해듣게 되고, S의 방문으로 인해 부부의 죽음소식을 전해듣게 된다. 이는 운명을 적극적으로 개척해나가지 못하고 주어진 숙명에 수동적으로 끌려가는 화수분가족의 삶의 단면이며, 단지 관찰자일 뿐인 주인집가족의 수동성까지 반영하며, 소설을 읽는 우리마저도 무력하게 만든다. 화수분가족의 비극적 파멸을 둘러싸고, 우리 모두는 방관자 혹은 공범자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인물묘사 역시 건조하기는 마찬가지다. 전지적작가가 없고 주인집이 관찰자시점에서 이야기를 전개하므로, 화수분가족의 내면적 심리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전반부에는 인물들의 외부적 모습이 그려질 뿐이고, 후반부 역시 S의 목소리로 처리된다. 독자는 인물의 바깥에서 서성일 수 있일 뿐인데, 단 두 곳에서 화수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귀동이의 입양 후 “으으으 으으으”하는 울음소리와, 거부댁에서 앓아누워 “어이어이”하고 우는 장면이다. 이 때에야 비로소 독자는 가늘게 열린 틈으로 인물의 내면을 엿보게 된다. 기다렸던만큼, 이 짧고 응축된 울음소리는 독자에게 선명하게 각인된다. 이는 처음부터 인물에 동화되어 내면을 따라가는 것 이상으로 극적인 효과를 낸다. 생계문제에 시달리는 이들에게 감정은 사치일 뿐이라는 듯이 담담하고 건조한 서술이 이어지다가, 불현듯 인물의 너무도 인간적인 감정이 행간을 비집고 흘러나올 때, 독자는 원래부터 거기에 서 있던 한 인간을 발견하는 것이다. 아무리 가난해도, 사람은 사람인 것이다. 갖가지 사소한 감정에 무뎌질대로 무뎌진 부부지만, 자식 앞에서는 더도 덜도 아닌 보통의, 부모인 것이다. 결국 부부는 죽음으로, 두 딸을 모두 지켜냈다. 부모의 시체 사이에서 아이가 새싹처럼 고개를 내민 마지막 장면에서, 화수분이라는 자신의 이름을, 자신의 몸뚱아리로 빚어낸 한 아비의 뜨거운 부정을 본다. 십오년 째 나의 눈에 선한, 한국소설의 명장면이라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