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폐아의 상동행동를 통해 인간의 당위의식을 다르게 보기

 

 

브레인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기 전에는 인간의 의식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대한 과학적인 접근이 어려웠었다. 즉 인간이 사유를 하는 것, 언어를 사용하는 것 등등 뇌와 관련된 모든 것이 자체적으로 분석이 안되었기 때믄이다. 다만 의식 등에 관련하여 인류역사상 그 많은 사람들이 각기 나름의 관점에서 자신의 견해를 이야기하였을 뿐이다. 

 

생각해보면 이전에 살던 그들은 우리와 비교해서 무어 대단한 사유도구를 가진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니 과학적인 분석이 없을 때 자신의 이론을 펴는 것은 중구난방식으로 핀다 하여 이상할 것은 없다. 그런데도 그들은 의식에 대하여 나름의 기준을 세우고 그에 접근하면서 학설을 정립하며 일정한 이야기를 하여왔다. 하지만 의식에 관련하여서는 우리들이 오히려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듯하다. 그것은 현대에 이르러 뇌에 대한 연구가 상당하게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전의 학자들은 어떻게 뇌와 의식에 대해 이야기 하였을까? 아무래도 뇌가 작동되고 있는 지평, 즉 인간이 관계맺고 있는 주위 환경과의 교류속에서 그 결과를 가지고 추정하는 방식을 썼을 것이다. 즉 우리에게 던져진 삶은 즉 뇌가 작동되고 있는 지점은 홀로써가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은 각기 독립적인 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은 환경과 타인과의 관계에서 상호간 이야기가 계속 전개된다는 이야기이다. 아마도 그들의 이론은 이 지점에서 시작되었으리라.

 

물론 왜 그런 뇌의 현상이 자기에게 주어진 것인지는 물을 수 없었다. 다만 어떻게 뇌가 작동되는지를 삶의 지평에서 찾아내려 했던 것이다. 즉 누구라도 살아야만 하고, 또 그런 삶의 경험에 의해 만들어진 기억들이 있을 것이며, 따라서 이들을 종합하면서 전체의 논리를 맞출 수 있었던 것이다. 이를 통해 학자들은 뇌와 의식 등에 대해 추측하고 추정하였던 것이다. 그 다음 아귀가 맞는 논리틀을 만들어내고, 그래서 그것이 인간의 모든 경험들을 대략 두들겨 맞추어 내면 당대의 이론과 학술이 되었으리라. 즉 그 시대의 패러다임이 된 것이다.

 

이렇게 예전에는 의식에 관한 이야기들의 정립방식은 과학적인 근거가 분명한 것은 아이었다. 전지전능한 신이 아닌 한 이전 시대의 학자들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생긴 경험들을 역으로 추론 추정하여 브레인의 작용과 의식의 문제를 말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전의 뇌의 논리들은 이렇게 역추정에 의해 성립하게 됬다. 그러면 이전의 논리를 대략 뭉뚱그린다면, 먼저 의식은 이미 주어진 어떤 것으로 보았는데, 즉 의식은 그냥 전제된 흐름인 것이다. 주어진 그것을 바탕으로 이런저런 사유, 감정의 흥기와 판단의 문제 등을 고찰하였던 것 같다. 물론 냉철한 이들에게는 뇌 혹은 의식 등의 흐름이 무엇인지는 물었을 것이다.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당위의식이다. 유독 인간만이 갖고 있는 당위의식에 대해 어떻게 유래하는 것인지 궁금하다. 이전에는 당위의식도 인간에게 이미 주어진 따라서 당연히 전제되어야할 어떤 것이었는데.. 이전의 학자들은 그 자체보다도 당위의식의 내용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왜냐하면 의식의 활용, 즉 사용설명서를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 의식을 이렇게 사용해야한다, 마음먹어야 한다, 좋다 나쁘다, 옳다 그르다, 등등 그야말로 엄청난 정보를 다루는 지점인 것이다. 의식이 오히려 주로 논리학 등의 사유사용법에 국한되는 좁은 측면을 다른다면, 당위의식은 전방위적인 측면을 건드리는 것이다.

 

당위의식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또 어떻게 진화된 것일까? 지금까지 아는 바로 소략하게 말하면 진화사로 볼 때 인간의 의식이 나타나고 나서 점차 당위의 세계까지 만들어내기에 이르는 듯하다. 즉 우리가 말하는 도덕의식 윤리의식 책임의식 등은 의식이 진화한 것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다. 윤리문제는 이런 브레인의 의식이 진화되어 온 최상위층의 의식이리라. 그리고 그것은 어쨌든 현재 사회를 이뤄온 다양한 분업의 분화와 무수한 층위를 통합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상태이다.

이렇기에 인간은 거대한 문명의 진보를 이루고 자연의 상태를 벗어날 수 있었을테고...하지만 이 정도의 인식만 하면 되는 것일까?

   

솔다렐라님이 말한 자폐아들의 이야기를 보았다.

 

그 아이들은 좀처럼 한 자리에 머물지를 못하고 돌아다니거나 아니면 끊임없이 같은 행동을 반복을 한다. 물론 자페의 종류도 증상도 그들의 숫자만큼이나 많다. 하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이 하루종일 돌아다니는 것이 그들의 일인것처럼 보인다. 상동행동이라는 것이 있는데 손을 계속해서 빨거나 혹은 손뼉을 치거나, 소리를 지르는 등의 반복적인 행동을 말한다. 치료사들은 그것을 병적행동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각성을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보고 치료적 접근을 한다. “

 

자폐아들은 의식의 각성을 위해 정상인들이 보기에 비정상적인 행동을 하는데, 치료사들은 그것이 의식의 각성을 위해 한다고 보고 있다. 그들은 의식의 통합 문제에 부딪쳐서 정상인과는 다른 나름의 경로를 사용하여 통합하여 행위한다는 이야기다. 박박사님이 강의한 내용중 인간이 의식을 감각과 운동의 통합형태로 이루어왔다 라는 부분이 있다. 이 시각은 자폐아 문제를 보는데 매우 중요한 관점을 제공한다고 솔다렐라님은 보고있다. 자폐아는 그들도 나름 의식을 지탱하기위해 본능적이고 자연발생적으로 손뼉치고 돌아다닌다는 것이다. 즉 그들의 상동행동은 자신들에게 너무나 자연스런 뇌의 현상인데, 우리는 다만 그것을 정상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해석을 할 뿐인 것이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당위의식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우리는 당위의식에 의해 마땅히 어느 수준이 정상이다 라고 기준을 짓고 그렇지 못한 것은 마땅히 아니다 라는 판단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인간은 마땅히 이래야 돼 라는 강렬한 당위의식이 전제되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물론 이런 당위의식은 의식의 흐름을 전제한 이후에야 가능하다. 우리는 인간에 대해 판단을 하고 선택 등을 하고 난 이후에야  인간은 마땅히 이래야 인간인 것이지 라는 생각을 갖게 되니 말이다. 이렇게 인간은 당위의식을 전제하여 왔고, 더불어 일정한 기준이라는 지표를 세우고 모든 행위들을 재단하였으리라. 그리하여 자폐아들의 이상한 행동을 비인간적인 병리적인 것으로 보고 도외시하였으리라. 그리고 그런 방식의 점철로 이 사회와 문명을 지탱해왔으리라.

 

자폐아들의 행동에 대한 위의 견해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 듯하다. 그들이 그런 행동으로 의식의 각성을 유지한다는 것은 그 행동들이 매우 유의미한 어떤 행위였기 때문이다. 이는 개인적으로 이전에 그다지 생각하지 못했던 측면이다. 그로 미루어 추정하면 인간도 나름 어느 정도 의식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여야 하며, 더불어 일정한 방식을 취하고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에는 얼마나 많은 행동들을 수반하는 것일까? 아마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전제들이 중층으로 깔려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전제는 일정한 틀을 요구할 것이다. 아니 그의 온 뇌가 떠받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왜냐면 뇌는 의식만이 아니라 무의식도 그 부분을 구성하는 기제이기 때문이다. 무의식은 이미 전제된 것으로 동화된 즉 정보의 흐름이 하나가 되어 지극히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일종의 의식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만약 인간의 뇌가 주위의 모든 정보를 담아내려면 넘 힘들지 않을까?  인간의 뇌는 집중과 동화라는 사용기제를 만들었다. 집중은 몰입을, 동화는 무의식을. 너무 많은 정보들은 뇌가 계속 당할 수 없기에 보다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기제로 동화되어 있는 상태로 더 이상의 정보처리에 에너지가 많이 들어가지 않은 무의식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을 당위의식이라고 말하면 안될까? 아무래도 자신할 수 없다. 다만 그런 동화된 상태가 의식이 일정한 판단을 거친 후에 이루어진 어떤 것이라면 당위의식이 될 것이다. 즉 당위의식은 생리적인 무의식이 아니라, 의식을 거치고 난 다음 즉 학습되어 더 이상 정보처리가 필요치 않은 어떤 상태이며, 이후의 정보처리를 위해 전제되는 의식을 말하는 것이라면 당위의식의 형태라고 말해도 좋을 듯하다. 

 

우리의 의식상태 변화를 살펴보자. 분명히 의식은 지금의 상태로 진화하여 왔고, 또 그것은 개인적인 편차와 몸의 상태에 따라 매우 다양하게 변위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또한 우리가 하루 종일 동일한 자세로 같은 의식수준을 유지할 수 없다. 무엇인가를 반복하거나 잠자거나 수다떨거나 집중하여 일처리하거나 멍청히 있는 등등의 상태로 의식을 지속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전체의 과정들이 유기적인 연속을 깨지 않고 유지되는 것인가? 그 흐름들이 왜 계속 변동되는 것일까? 여기에 인간은 당위의식이라는 정교한 시스템을 만들어 온 것이라고 추론하면 안될까?

 

당위는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로 나타나는 것일까? 사회적인 이데올로기를 살펴보자. 예를 들어 신자유주의 사회에서는 이렇게 자본주의적 자세를 유지해야 돼. 혹은 무한적인 경쟁을 하는 사회이며 승자독식사회이므로 따라서 스펙을 쌓아야 된다 등등.. 이렇게 우리를 몰고 가는 즉 우리의 의식을 만들어가는 그 밑바닥에는 당위의 전제가 있다. 이 사회에 있는 누구도 이를 쉬이 부정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심지어 사회전체가 그와 맞물려 재구성되고 건립되는 것이다. 이렇게 사회적으로도 우리의의식을 구속하는 당위의 세계가 있다. 이것이 있으므로 우리는 쉬이 소통할 수 있고, 힘을 모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당위가 언제부터 있었던 것인가?  예전의 당위의식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야 한다는 성리학의 당위가 있었다. 즉 주위를 배려하고 도덕당위를 지키고, 정절을 지키고 지조를 지키고 등등 윤리적 당위를 위주로 한 사회가 얼마 전에 있었던 것이다. 지금은 인간에 대한 배려보다는 인간이 인간에 대한 무한한 경쟁이라는 또 다른 당위논리가 그를 대체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당위의식이 무엇이 옳다 그르다 이런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의식은 그렇게 당위의 전제를 하고 있다는 것, 그것은 사회를 일정하게 유지하기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려고 한다.

 

의식과 마찬가지로 당위의식도 오랜 진화로 발달해온 것이리라. 그런데 그것의 역할은 인간 내면에 있는 여러 의식 상태를 조화롭게 유지하기 위하여 전제되는 어떤 상태이다. 또한 정보처리를 보다 간편히 해주는 기능도 가지고 있다. 이상으로 보면,  여러 정보들 즉 뉴런 활동들이 보다 쉬이 조화롭게 경제적이고 유기적으로 의식활동들이 이루어지게 하는 고도의 의식활동이 당위의식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 듯하다. 

 

이전의 뇌와 의식의 연구는 뇌의 분석이 없었고, 또 의식 자체보다도 당위의식의 사용설명서와 관련하여 이루어졌다. 지금의 뇌연구는 뇌의 분석이 점차 깊어져 의식 등의 작동기제에 대한 분석이 예전에 비해 심화되었다. 다양한 뇌의 기능들이 밝혀지고 있다. 이 즈음 당위의식에 대해서도 연구하면 좋을 듯하다. 그것이 가지는 중요성은 의식의 경제적이고 조화로운 안정적인 유지와 관련이 있다는 면에서 그렇다.

 

솔다렐라님이 말한 부분을 다시 보자.

 

"의식의 출발은 바로 감각과 운동의 통합에 있었고, 인식의 통합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뉴런 연결 상태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이었다. 섬세한 감각이 섬세한(정교한)운동을 만든다. 각각의 감각이 하나로 통합되고 조합되어 만들어져야만 운동이라는 형태의 출력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감각과 운동이라는 것도 사실은 뉴런의 연결에 따른 과정이다."

 

이상은 물론 박박사님의 강의 내용이다. 의식이 뇌의 차원으로 보면 어떤 상태에서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뇌의 의식을 다루기 위해서는 여기에다 이 정도의 분석만이 아니라 우주진화사를 넣어야 할 것이고, 조금 좁히면 지구 진화사를, 더 좁히면 아니 최소한도로 생명의 진화사를 통별하여야 의식의 진화가 가슴에 다가옴을 느낄 수 있다라고 생각해본다. 이것은 강의에서 매번 지적하는 이야기다. 생명의진화는 137억년이라는 전체흐름의 계보속에 털어넣어야 비로소 이해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는 인간의 뇌만을 완전히 분석한다해도 의식 혹은 당위의식을 충분히 알 수 없다는 말이다. 그것을 운동의 진화와 관련하여 생각해봐야 한다. 생명체가 35억여년 이상 진화해오면서 운동을 하기 위해 진화해온 뇌를 이해하여야만 뇌기능에 대한 전체적인 통찰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왜냐면 의식은 운동을 보다 정교히 하기위한 것이지, 그것 자체가 그렇게 작동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즉 뇌는 즉 의식은 지금도 변화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기에 어떤 일정한 틀이 없다는 말이다. 운동을 고도화하는 방향으로도 아니면 퇴화하는 방향으로 갈 수도 있다는... 즉 이것도 생명의 주위에 환경의 충분여부에 따라 진보하거나 아니면 다시 퇴화할 것이다. 그래야만 생존할 수 있다면 말이다. 즉 당위의식은 진화의 전체과정에서 볼 때 비로소 이해될 수 있다는 말이 되겠다.

 

솔다렐라님의 이야기에 나름 살을 붙여 이야기를 하여 봤다. 자연과학을 공부하다보니 이제는 이해되는 부분들이 넓어져가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