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꼬마야! 꼬마야! 만세를 불러라!
내가 사는 동네는 40여 년 전엔 아이들이 바글거렸다. 골목어귀를 들어서면 놀면서 떠드는 소리가 큰길까지 들렸다. 어쩌다 지나치다 만나면 “스님! 성불하세요.”라며 반갑게 인사를 건네곤 했다. 그러던 것이 10여 년 전부터는 한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다 어디에 숨었는지 모르겠다. 예전 같으면 애들이 떠드는 목소리와 노래 소리가 들려 올 터인데 말이다.
항구도시인 부산은 산중턱에 집들이 옹기종기 붙어있어 뛰어놀 수 있는 마당이 거의 없었다. 어릴 적 우리들에겐 좁은 골목길이 유일한 놀이터였다. 단칸방의 좁은 공간을 벗어나는 길은 밖으로 나오는 것이었다. 모여서 하는 놀이라고는 새끼줄로 만든 줄넘기나 고무줄뛰기가 고작이었다. 무엇을 하던 노래가 뒤따랐다. 제목은 “우리는 대한의 아들딸”, “무찌르자 오랑캐”와 같은 군가 비슷한 것 이외에 “따오기”, “오빠 생각”, “기러기”, “달마중” 등 시대상을 반영하는 것들이었다. 아마 그 시절 그 노래를 부르며 뛰놀던 사람들은 다 아는 동요이리라!
피난시절! 어렵고 각박했지만, 아이들은 해맑은 얼굴로 놀면서 꿈을 키웠던 것이다. 어른들은 먹고살기 힘들어 했지만, 아이들은 그런 환경 속에서도 고무줄이나 새끼줄 하나만 있으면 하루 종일 놀며 즐길 수 있는 놀이를 개발했던 것이다. 해질 때, 엄마가 저녁 먹으라고 불러도 못 들은 척 하고 노는 데 정신이 팔렸었다. 숙제를 안 해가는 것도 보통이어서, 공부는 뒷전이었다.
줄넘기도 그냥 하는 게 아니었다. 뮤지컬과 연극을 합친 것 같은 노래를 만들어 불렀던 것이다. “손님이요! 들어오세요! 들어와서 인사합시다! 가위바위보! 가위바위보! 진 사람은 나가주세요!” 하면 그 아이가 또 술래가 되어 계속했다. 그 다음은 등장인물들이 들어온다. “손님 들어와라! 색시 들어와라! 두부장수 들어와라!” 이런 식으로 여러 명이 들어오면 차례로 내보내는 줄넘기였다. 줄넘기로 들어오는 아이 중에는 꼬마도 있는데 여러 가지 재주를 부려야 했다. “꼬마야! 꼬마야! 만세를 불러라! 꼬마야! 꼬마야! 땅을 짚어라! 꼬마야! 꼬마야! 뒤를 돌아라!” 등등. 시키는 대로 하다가 잘못하면 술래가 되는 것이었다. 그때그때에 따라 부르는 인물들이 달라지는 놀이였다. 술래가 나올 때까지 새끼줄을 잡고 또 돌렸다. 다 닳아 없어질 때까지 놀았다. 고무줄은 끊어지면 서로 이어서 쓸 수 있지만, 새끼는 떨어지면 이어서 쓸 수가 없어 줄을 구하러 다녀야 했다. 어쩌다가 굵은 밧줄이 생기면 한동안은 잘 뛸 수 있어 밧줄 주인은 애지중지여기며 잘 간수했다.
골목길마다 퍼지던 그 노래가 지금은 없어졌다. 뛰놀던 어린 아이들도 자취를 감추었다. 그 대신 PC방이나 컴퓨터게임에 푹 빠져서 밖으로 나올 줄 모른다. 방안이나 한정된 공간에 들여 박혀서 혼자서만 논다. 즐긴다기보다 시간을 보낸다고 봐야겠다. 나 홀로 한 곳에 오래 있다 보니 친구도 없고 말 할 상대가 없으니 사회성이 떨어지게 마련이다. 아이들을 보면 서로 대화가 없어서인지 말하는 방법을 잘 모른다. 그냥 나오는 대로 말을 하기 때문에 비속어나 욕설을 잘 뱉어내게 된다. 옆에서 보면 한심스럽기 짝이 없다.
기계의 노예가 되는 것은 대학생이라고 별다르지 않다. 스마트폰에만 매달려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손에서 놓지 않는다. 수업에 들어와서도 번쩍거리며 검색을 하거나 문자를 보낸다. 첫 시간에 주의를 줬건만 들켜야만 슬그머니 집어넣는다. 좀 더 규율을 잡기 위해 극단의 조치를 내렸다. 앞에 나오게 해서 폰을 머리위에 얹고 수업이 끝날 때까지 세워 놓았다. 초등학생에게나 줄 벌이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는 안 되는 갑갑한 현실이다.
세월의 흐름과 함께 아이들 놀이가 이렇게 변할 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지금은 현실을 직시하고 그 속에서 잘 살 수 있도록 해야 할 것 같다. 옛말만 하고 있어봐야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괜히 슬퍼지는 건 나만이 느끼는 감정일까? 다 커버린 대학생들을 바라다보는 내 마음은 밝지만은 않다.
봄 햇살이 따사롭다. 따스한 기운을 받으니 내 발걸음이 가볍다. 옛 생각이 나서 깨금발을 뛰어 보았다. 갑자기 몸이 휘청하며 넘어지려고 한다. 이젠 늙었구나! 고무줄 뛰고 줄넘기 놀던 시절은 노래가사처럼 “아! 옛날이여!” 가 되어버렸다.
30대 중반인 제가 아마도 골목에서 놀았던 마지막 세대인거 같습니다.
고무줄 놀이, 한발뛰기, 공기놀이, 땅따먹기, 말뚝박기,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초여름 저녁 어스름해질때,
"밥 먹어라" 라는 엄마의 부름이 있어야만 집에 들어갔었지요.
저녁을 후딱 먹은 후 다시 모여,
달빛 받으며 뛰어 놀았습니다.
제가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는 이런 즐거움을 모를텐데' 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 한켠이 회색빛이 되네요.
글을 읽으며 시골집에서 친구들과 고무줄 놀이, 공기놀이 하던때가 생각이 나네요.
검정고무줄을 가지고 놀고 있으면 개구장이 남자아이들이 확 달려와 고무줄을 끈어버렸던 추억도
새록 새록 생각 납니다. 어릴적 추억은 오랜 세월이 흘러도 영화의 한 장면 처럼 그대로 남아 있는 것 같아요.
그때는 마을 앞마당이 놀이터 였는데, 엄마는 저녁때가 되면 커다란 빗자루를 들려주면 청소를 해야 한다고 했었지요. 방, 마루, 봉당, 집마당, 집 바깥마당을 쓸다보면 골목길까지 쓸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마을 앞 어귀 큰길까지 빗자루질로 쓱쓱 마당 청소를 했던 기억이 나네요.
그때 그 기억속의 동네 큰길은 굉장히 길어 보였는데, 어른된후에 다시 가보니 그 길은 여전한데 느낌은 완전히 달리 다가 오더라구요. 친구들과 뛰어 놀던 그 시절, 그때가 스님의 글속에서 다시 한번 살아납니다.
어렸을 때 시골에서 아이들과 우르르 몰려다니며 저녁 늦게까지 쏘 다니던 기억이 납니다.
동네 앞 마당에서 구슬치기, 딱지 치기(동그란 딱지, 네모 딱지), 목자 놀이, 주수마기(주로 여자아이들과) 등을 하기도 하며, 이 동네를 평정하면 옆 동네로 원정을 가서 놀기도 하고...
동네 저수지(둠벙)에서 개구리도 잡고, 때론 구워 먹기도 하고(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때론 괴롭히기도 했던 일들도 떠오릅니다. 산과 들판을 함께 마냥 어울리며 돌아다니던 그 때의 아련한 기억이 되살아납니다.
유년의 기억을 불러오게 만드는 매직같네요^^
나는 우선 먹는 거.
보슬비가 오는 어느 날 오후 송이버섯 등을 포대에 담아와서 팔았던(당시엔 라면값보다 더 쌌던) 옆 동네 할머니의 실루엣. 고모댁(고흥 녹동)에 갔을 때 두부장수의 핑경소리. 초등학교 6학년때 담임선생님따라 도시 구경나온 첫날 밤 골목길에서 '뻔~ 뻔~'하던 소리에 선생님딸아이가 뻔데기를 사왔고 놀라움과 충격 속에 그 뻔데기를 먹던 기억 등등..
ㅎㅎㅎ, 깜짝 놀랐어요,
정말 똑같네요,
저 부산 산동네 골목에서도
저 아래 제주도 중산간 동네 길에서도
그 시대의 꼬마들은
꼬마야 꼬마야 만세를 불려라,
그러고보니깐 우린 줄넘기 무대에서
조명감독 달빛아래서 뮤지컬 주인공였고, 총감독이였네요,
정말 재미있는 놀이들이 많아 공부할 시간이 없었던 그 때,
놀이의 즐거움에 푹 빠진 행복한 꼬마~!
흥미로운 공부할 내용들이 많아 놀 시간이 없는 요즈음
공부의 즐거움에 빠진 어른은 행복한 꼬마~!
공부도 놀이처럼, 놀이도 공부처럼
스님 모든 것이 공부이고 놀이인것 같습니다.
뵙고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