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김연수의 산문집 여행할 권리 중에 '봉쇄선 백오십리 너머에서는 익살스럽고 구슬픈'이라는 챕터가 있다. 챕터의 이야기는 2006년 2월 중국 화뻬이셩 후쟈좡 마을에서 만난 스룽 노인의 이야기다. 주 내용은 1942년 12월에 후자좡 마을에 있었던 사건이다.
스룽이라는 노인이 나이 열한 살 때 일이다. 그가 살던 후자좡 마을에서 선전활동을 나온 조선 의용군 스물아홉 명이 일본군과 대치한다. 독립운동을 하는 부대와 테러 집단으로 보는 일본군이 만나는 일촉즉발의 상황이다. 그는 여전히 그 날의 일을 소상히 기억하고 있다. 조선의용군이 어떤 숙소에 어떻게 빠져 나왔는지, 일본군이 어느 기슭에 있었는지 팔로군 지원부대가 어느 쪽에서 접근했는지 하나하나 빠짐없이 이야기 한다.
스룽 노인은 김연수를 비롯한 다큐멘터리 제작진을 조선의용군이 희생된 뒷동산에 데리고 갔다. 그리곤 1942년의 사건을 세세하게 말을 하기 시작한다. 그러다 갑자기 이야기 하던 노인은 격앙된 목소리로 소리를 지른다. 어리둥절해 하는 제작진은 아랑곳없이 격정적인 목소리로 일본군의 잔악성을 말한다.
내가 집중한 이야기는 일본군의 잔학성을 이야기하는 노인의 감정이 아니다. 김연수의 글에는 이렇게 표현한다.
' 어느 순간 느닷없이 스룽 노인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 한 줄기 눈물이 주르르'라는 것과는 아주 거리가 먼, 소매를 두 눈에 비벼가면서 엉엉엉 울어대는, 그런 울음이었다. '
조선의용군이 포위망을 도망치고 난 뒤 마을로 일본군이 돌아왔다. 일본군은 스룽의 할머니를 발길질 한다. 이 이야기를 하며 스룽은 목 놓아 소리를 질렀다. 열한 살 소년처럼, 바로 그 날처럼, 소매로 두 눈을 비벼가면서 엉엉엉 울었다. 눈 앞에 할머니가 발길질을 당하고 있고 아무것도 못하는 어린 소년으로 돌아간 듯이 그렇게 울고 있다.
내가 집중한 장면은 여기 지금 스룽 노인이 열한 살 아이가 되어 우는 장면이다. 열한 살이 될 수 있음을 나는 믿는다. 우리는 우리네 삶 안에서 앞으로만 나아간다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내 의지에 따라 어디든 갈 수가 있다. 스룽 노인은 어느 누구의 열한 살 때로 더 자주 기억을 더듬어야 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덜덜 떨었던 기억이, 거기 그대로 남겨진 눈물 자욱이, 그 곳으로 노인을 데리고 갔다.
그 장소, 그 사람, 그 사건, 그 냄새...... .
이 모두가 할머니가 일본군에게 맞고 있던 모습을 보았던 그 날로 스룽 노인을 데려간다. 내게 첫 키스, 첫 사랑, 군대 가던 날, 내 할아버지 눈 감으시던 날이 마치 어제처럼 선명한 이유와 같다. 내 기억이 지금 여기 있다.
왜 내게는 몇 일전보다 저 푸른 기억의 그날이 더 선명한 것일까?
모든 사건이 내게 기억되지 않으면 없다. 모든 현실 세계는 내가 기억하는 것 안에서만 존재한다. 내게 존재하는 세계는 그 기억에 의해 다른 사람의 세계와 구별된다. 내가 나로서 그 아름다울 수 있음은 타인과 기억이 다르기 때문이다. 나는 혹은 너는 모두, 세상을 기억 하는 사람이다. 동시에 추억하는 사람이다. 이것은 노인의 열한 살의 눈물과 같다. 어느 누군가와도 다른 그 세계가 그 노인에게 있다. 여기에 빛나는 아름다움이 있다.
시간과 시간 사이에 시간을 되돌리는 시간이 존재한다. 일을 하다 잠깐 쉬는 시간에 그러하고, 길을 걷다 우연히 스친 향기에 그러하고, 멍하니 하늘을 보다 떨어지는 별똥별을 볼 때 그러하다.
선명한 기억으로 시간이 내게 넘치기를 바란다. 의미 짓고 표현하는 시간보다 쌓이고 채워지는 지식을 더 갈망 한다. 왜 그럴까 하는 질문을 할 때 더 많은 세상이 내게 쌓인다.
스룽 노인의 눈물은 지금 흐르는 상념이다. 이미 눈물이 지금이지 않는가. 그러하기에 더 귀중하다. 모든 기억은 지금 일어난 신경세포의 현상이라면 우리는 언제나 지금에 머문다.
지금 이 순간에 모든 시간이 담겨있다.
가끔씩 멍하니 사람 지나다니는 것 보다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다는 섬에 가고 싶은 생각을 합니다.
어떤 시간은 정현종 시인이 이야기 한 것처럼 노다지였습니다.
둘 만의 이야기는 절대 하면 안되었는데 뭔 부귀 영화를 누리겠다고 떠들고 다녔기도 하였습니다.
사람들과 이야기를 많이 하는 직업인지라 이야기하는 법 하나 배웠지요.
내가 하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다만 뉘앙스가 남는다는 사실 하나 15년 남짓 한
세월 속에서 건졌습니다.
박문호 박사님에게 자연을 배웠다고 하는 것이 맞습니다. 스스로 그러한 사실에 대해 열거하여
내 안에 쌓는 법을 배우고 있지요.
그래서인지 언젠가부터 모든 사물과 현상, 사람의 얼굴 표정 하나도 함부로 여기지 못하는 나를
발견합니다.
먹물스런 표현이라는 메타와 메타와 메타에 관한...이라는 표현이 내내 울리고 있습니다.
기억하는 것과 기억하지 못하는 것 사이에 어쩌면 선택을 하고 사는지도 모릅니다.
뭐 쉽게 말해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한 다는 말이지요.
참 묵직한 말입니다.
.."이 땅의 기억의 짐을 별로 지고 있지 않은 새로운 인간" 이라는 표현 말입니다.
점점 침묵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이 되고 있습니다.
무언가 설명하려는 순간 설명할 것이 너무 많아서 어떤 단어를 선택해야 할 지 모르는
순간이 도래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부끄러워졌습니다. 기실 잘 알지도 못하는 그 것 하나 박자세에서 배웠는데
써먹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딜레마 이지요. 아는 순간 모르는 것을 알게 되고, 모른다고 하는 순간 다시 알 수 있다는
인우재의 이야기 말입니다.
어쩌면 우린 모두 덕택에 살고 있는 존재입니다.
그게 홀로된 시간에 의무처럼 책을 뒤지게 하나 봅니다. 누구의 덕택인가 하고 말입니다.
존재한다 나는 기억이 머무는 곳에...... .
드래곤 라자라는 판타지 소설이 있습니다. 그 소설의 최고 명 대사는
'나는 단수가 아니다.'입니다.
나눌 수 없는 존재가 나이지요. 나라고 하는 존재는 너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아무도 없는 공간을 동경하여 박자세 학습탐사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굴레는 벗어날 수 없음에 한 동안 몸부림쳤습니다. 그리고 알게 되었지요.
나는 단수가 아닙니다. 내 안에 너와 너 안에 내가. 우리 안에 나와 나안에 우리가 공존하는 삶 속에
살고 있습니다.
나는 이미 나이며 동시에 너이기도 합니다. 그것을 선명하게 느끼는 시간이 박자세 학습탐사입니다.
도저히 벗어날 수 없고, 홀로된 자아는 성립할 수 없는 시간에 머무는 가냘픈 나임을 느끼고 오는 시간입니다.
기억이 머무는 모든 공간과 시간에 내가 아는 모든 것이 함께합니다.
착각하면 안됩니다. 인간은 단수가 아닙니다.
많은 현인들이 지금, 현재에 집중하는 것이 올바른 삶이라고.... 인간다운 삶이라고 얘기하지만....
가끔씩은 기억 저편을 끄집어 내어서 펼쳐놓고 이모 저모 살피면서 새롭게 색을 입히기도 하면서...
그 시간 그 기억의 끝을 놓지 못하는 것.....
내 안의 수많은 그 기억 속의 나를 저버리면 하얗게 퇴색해버린 나를 찾아 헤메일 것 같아서....
솔다님의 '기억이 머무는 모든 공간과 시간에 내가 아는 모든 것이 함께' 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
직무연수 강의 준비 등등으로 오랜만에 들어와 본 박자세 마당의 풍성한 좋은 글 가득한 한 귀퉁이에서
매번 받기만 하는 죄송한 마음 뿐~ ~~ 감사하게 잘 읽었습니다~!!!
정현종 시인의 '빈방'이라는 시에서
.."이 땅의 기억의 짐을 별로 지고 있지 않은 새로운 인간".. 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정현종 시인이 어느 외국 시인의 시에서 따온 구절이라고 들었는데
육체(!)와 오관을 통한 기억의 상관관계를 집요하게, 때론 지겹게 변주했던 정현종의 시를
'기억'하는 독자 라는 인간... 기억과 기억에 관한, 그것에 관한 또 그에 관한..
먹물스럽게 표현하면
메타와 메타와 메타에 관한.. 이런 것들이 인간 현상이라고 볼 수도..
기억의 짐을 가볍게 부릴 수 있는 자가 성인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