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2월 3일 제 64차 천문 + 뇌과학 모임에서 박문호 박사님께서 강의하신  " 시론 " 을 그대로 옮긴 녹취록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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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태준 시인의 강의가 몇 일전에 있었죠. 근래에 보기 드문 느낌 있는 강의를 듣고 나름대로 3가지로 요약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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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상의 순간 관리가 사실은 문태준 시인의 강의를 돌이켜보면 모든 내용에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요. 제어, 조절이 아닙니다. 관리입니다. 기억이 나시나요. 제가 질문을 했잖아요. 궁극적으로 글을 잘 쓸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의 질문에 대해 문태준 시인은 결국에는 천진함을 유지해야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고독한 방을 얘기했잖아요.

 

생각해 보세요. 조용함과 고요함, 고독함에 대해서 설명해 보세요. 의미가 다릅니다.

 


조용함, 외적 소음 X

고요함 내적 소음 X

고독함 → 침묵의 몸부림


 

이 세 가지는 순차적인 것을 알 수 있겠죠. 그리고 순차적 전제 조건이지요. 조용함과 고요함은 시의 생성을 할 수 있는 조건은 되지 않는 거지요. 고독함만이 시의 생성 조건이 됩니다. 왜 침묵의 몸부림이기 때문이죠. 침묵은 일종의 에너지입니다. 연상의 에너지이지요. 이게 핵심입니다. 언어가 이미지를 앞서지 않습니다. 침묵으로 언어를 제어하고 이미지를 내면에 생성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관습적 연상에서 벗어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하느냐. 감각의 전환입니다. 강의 시간에 다루어졌던 많은 주제가 감각의 전환이었죠. 시각과 후각이 왔다갔다하고

분수처럼 품어지는 푸른 종소리청각과 시각으로 왔다 갔다 하는 거죠. 감각의 스위칭을 하고, 그 다음이 무엇이냐. 감관의 제어가 있어야 되요.


시각이든 청각이든 바뀌었으면 바뀐 감각에 멈춰서야 해요. 왔다 갔다 하면 안 되요.

바뀐 감각을 전환하여 고정시킬 때 감각의 지연이 가능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술의 본질을 감각의 지연이라고 하잖아요.


이런 노력이 바로 관습적 연상을 이탈하기 위한 몸부림입니다. 뒤집으면 관습적 연상이 워낙 막강하다는 겁니다. 이것을 일상용어라고 하잖아요. 제가 혐오하고 공부길로 들어서는 사람이 일상용어를 쓰지 말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시인이 일상용어를 쓰나요. 물론 시인은 밥을 먹고, 아내와 이야기를 나눌 때는 일상용어를 쓰겠죠. 하지만 시를 작업할 때 일상용어를 씁니까. 아니잖아요.

 

피아니스트 등 모든 고급 예술에 있어서는 일상용어를 쓰지 않습니다. 예술은 일상용어에서 벗어나는 몸부림이기 때문이죠.

 


사물이 사물을 설명하게 하라는 말은 무엇일까요.  바로 이미지를 생성하라는 말입니다.

봄은 고양이로소이다.’ 이장희 시인의 시죠. 이장희 시인은 이 시 한 편으로 우리나라 시 문학사에 영원히 이름을 남긴 사람입니다. 봄의 이미지와 고양이의 이미지를 견준 것 입니다. 봄과 고양이는 논리적으로 연결이 되지 않죠. 그래서 견줌으로써 두 개의 이미지가 모아지며 새로운 이미지를 탄생시키게 됩니다. 견주기 때문에 감각이 지연되기 때문에 감관을 제어 해주어야 합니다.


 

봄은 고양이로소이다 

이장희
 

꽃가루와 같이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에
고운 봄의 향기가 어리우도다

 

금방울과 같이 호동그란 고양이의 눈에
미친 봄의 불길이 흐르도다.

 

고요히 다물은 고양이의 입술에
포근한 봄의 졸음이 떠돌아라 

 

날카롭게 쭉 뻗은 고양이의 수염에
               푸른 봄의 생기가 뛰놀아라             

 

언어로 들어가면 안되요. 이미지를 보는 순간 언어로 고정되는 순간 일상용어가 되어 버립니다.

시인은 날 것의 이미지에 언어의 올가미를 던지는 사람입니다.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서는 모두 동참시켜야 합니다. 배경에서 전경으로 전환되는 것이 시이기 때문에 이미지를 모두 동참 시켜야 합니다. 이 때 모아진 이미지는 수평적 관계를 형성하게 됩니다.

그래서 세 가지 이야기를 정리하는데 유심히 들어보면 문태준 시인의 언질에서 하나로 관통되는 말이 있습니다. 문태준 시인은

“ 내가 시를 쓴 것 같지 않다.”

는 말을 썼습니다. 아주 진실한 토로에서 한 말입니다. 도대체 누가 쓴 것인지 모른다는 이야기 잖아요.

내가 썼다고 해버리면 이미 시는 언어의 레벨로 올라와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시인은 개별 감각이 모여서 개념이 등장하기 이전의 날 것의 감각을 포착해서 언어로 올가미를 던지는 사람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당연히내가 시를 쓴 것 같지 않다.’는 표현이 나올 수 밖에 없는 이야기입니다.

언어로 물들기 이전에 나오는 것이 시라는 것이죠. 언어로 물든다는 말은 일상용어를 말합니다. 시인이 쓰는 언어는 개념화 되기 이전의 언어, 태초의 언어입니다.

자의식이 참여하는 언어는 일상 언어입니다. 그러나 시의 언어는 언어의 원재료가 되었던 이미지의 조합이지요. 의미가 언어의 옷을 입기 전의 상태인 날 것의 언어가 됩니다.

마곡사에서 스님들에게 했던 얘기가 있습니다. 인간은 의미에 갇혔다고 했습니다. 우주는 중력에 갇히고, 동물은 감각에 갇히고, 인간은 의미에 갇혔습니다. 여기서 의미는 언어를 쓰면 피할 수 없는 형벌입니다. 그래서 언어를 쓰기 이전으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천진난만한 어린이의 시선이 필요합니다. 태초의 언어로써 날 것의 이미지를 캐치하는 사람이 바로 시인이죠.

그래서 문태준 시인은 강의에서 ‘오래 생각하고 한 순간에 쏟아낸다.고 했죠. 하루 내로 퇴고하고 그 이후는 퇴고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왜 그럴까요.언어의 오염을 두려워 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오염은 기존의 형성된 언어의 오염입니다. 생각을 해 버리면 벌써 날 것의 태초의 언어가 아니고 관념화된 언어에 오염이 발생하게 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미지 입니다. 이미지를 분산하여 쏟아내어 버리면 어린애 장난 같은 글이죠. 그러나 이미지가 가치를 가지려면 이미지의 논리를 가져야 합니다.

이미 통용되고 있는 생성된 언어를 쓰는게 일반인이지요. 의미가 범람하고 오류와 오해가 가득한 세계를 만듭니다. 그러나 시인은 새로운 언어를 생성 시키는 존재입니다. 그러면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는 사람도 이처럼 언어를 생성시키는 사람인가. 그건 불가능합니다. 이미지의 논리가 존재하여야 하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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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의 논리가 서정적으로 써지면 시가 되고, 상징 수학적으로 표현하면 물리학이 됩니다. 아인슈타인의 전기를 읽어보면 이 말을 이해하게 됩니다. 11년 동안 이미지, 공간적 이미지의 노예가 되는 사람입니다. 얼마나 감관을 제어 했겠어요. 수식이 펼쳐지는 시공상의 포스의 관계를 추적했잖아요. 시라고 다를 것이 없어요.

다시 말하면 정신분열증과 램수면 상태의 이미지는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의 상관관계가 없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견주는 과정과 방법을 통해 이미지의 논리를 만들어 냅니다. 사물이 사물을 설명하기에 가능한 현상이지요. 언어로 오염된 인간의 언어가 들어가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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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덜만의 고차의식 (박문호 박사 자료)

일례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에델만 모델을 적용해 보세요. 그대로 들어납니다.

에델만 도표를 보면 세계상에서 만들어진 정보가 1차 의식을 형성합니다. 1차 의식은 장면을 만듭니다. 장면이 형성된다는 말은 배경으로 되 있던 것이 모여서 장면을 형성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배경이란 말은 매우 중요한데 1차 감각 영역에서 해마를 가기 전에 지각의 범주화가 일어나고 해마와 편도체에서 전두엽을 가기전에 개념의 범주화가 일어납니다. 이런 루트의 형성은 의미없는 공간에 연결을 만들어 의미가 만들어진 장면을 형성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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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덜만 고차의식 (박문호 박사 자료)

 

제가 보았을 때 시인들이 노리는 것은 1차 감각에서 해마를 가기 전에 만들어지는 지각의 범주화 입니다. 해마에서 전두엽, 두정엽, 측두엽으로 가면 개념화가 일어나 버립니다. 그리고 이것을 통해 브로카와 베르니케를 지나면서 고차의식이 됩니다.

그 의식이 고차의식이 된다는 말은 언어로 범주화 된다는 말입니다. 결국 시인이 찾는 날 것의 이미지는 1차 감각 피질에서 해마와 편도체 등으로 정보를 보내기 전의 단계에 오래 머무는 것을 말합니다.

날 것의 감각에 머물기 위해 순간적으로 언어로 돌리면 안됩니다. 언어의 세계로 들어 가면 안되는 것이지요. 기존의 언어에 물들지 않고 새로운 지각의 범주화를 하는 것이 인간의 창작행위 입니다.

개념화되지 않고 이미지를 모아 지각의 범주화 된 날 것의 이미지를 관리해야 합니다. 그래서 침묵을 통해 관리 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나라고 하는 주체가 쓴 것이 아니게 됩니다. 이미지들끼리 링크하면서 태초의 언어를 잡아 쓰는 것입니다.

놀라운 이야기 입니다. 뇌과학 공부를 제대로 따라온 사람이라면 이 부분을 그릴 수 있게 됩니다. 에델만 도표 하나면 설명이 가능하게 됩니다. 리스만 도표 정도면 하나 하나 끄집어내어 설명할 수 있습니다.

리스만 도표에서 해마와 VTA(ventral tegmentum area) loop 는 새로움에 물드는 기관입니다. 기억에 물들지 않은 새로움을 바탕으로 새로운 언어로 이미지를 포획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각의 범주화를 하는 겁니다.

여러분이 배우는 뇌과학의 이론은 인간이 하는 창작 행위를 짐작할 수 있게 합니다.

같은 자극, 반복된 자극으로 기억화된 자극은 무의식으로 처리하고 새로운 자극에 작동합니다.자의식에 연결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새롭지 않기 때문입니다. 언어에 포획된 생각을 두려워해야 하는 것이 시인이지요.

 

내가 쓴 것 같지 않다는 표현에서 내가 라는 말은 자기라는 자의식을 말합니다. 자의식은 언어를 생성해 탄생합니다. 자의식에 링크되어서는 시가 안 되는 거지요. 그래서 이미지의 보편적이며 수평적 관계를 등장 시킨 예가 박용래 시인의 저녁눈 이야기이지요.

 

저녁눈


박용래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말집 호롱불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조랑말 발굽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여물 써는 소리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터만 다니며 붐비다

 

수평적 관계로 눈이 등장합니다. 수평적 관계로 등장하는 눈이 하나로 모여 겨울 저녁의 모습을 표현한다. 눈발이 말집 호롱불에 견주어지고,조랑말 발굽에 견주어지고, 여물 써는 소리에 견주어지고,변두리에 견주어 지죠. 기가 막히죠.

여물 써는 소리는 청각이잖아요. 눈발이 내리는 시각적 이미지가 청각적 이미지로 감각 전환이 일어납니다.

박용래 시인의 저녁눈의 표현인분비다분빈다로 쓰지 않았는가 입니다.

 

분빈다가 아니라 분비다.

 

분빈다와 분비다를 아는 것은 엄청난 차이입니다. 분빈다라는 표현은 이미 자의식이 참여하여 주관이 개입한 상태죠. 그러나 시인은 분비다로 표현하고 있지요. 분비는 것은 사물이 사물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자의식이 참여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인간의 의지적 과정이 들어가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는 통상적으로 읽으면 분빈다로 읽기가 쉽다. 주체가 자기가 되어서 읽기 때문입니다. 내가 봤을 때는 사물 자체가 인간적 의식이 주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이 주어가 되기 때문에 분비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소설에도 이런 대목이 나오고 있죠. 김훈의 칼의 노래 첫 문장은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라고 쓰고 있지요. 김훈은 이 대목을 고민하면서꽃이라고 적을지꽃은이라고 쓸지에 대해 오랜 시간을 보내죠.

꽃은 피었다.” 꽃이 피었다.는 아주 다른 표현입니다. 위대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고민이며 대목이죠. 꽃은 피었다는 대목은 인간의 주관이 등장을 하고, 꽃이 피었다로 표현되는 순간 사물이 스스로 존재한다의 의미를 내포하기 때문이죠. 자의식이 등장하는 글과 자의식이 사라진 이야기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내가 쓴 것 같지 않다는 문태준 시인이 강조한 대목이 바로 이와 같은 내용입니다.

자의식이 존재하기 전에 언어를 써야만이 의미를 던진다는 말이 성립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의미를 던지는 것이 아니고 인지적 무의식으로 그냥 받아들이기만 하는 겁니다. 인식 상태 안의 자아가 생성되어 고정된 범주화에서 맴돌고 있을 뿐입니다.

정리하면 이미지를 자아에 의해 고정된 범주화를 하게 되면 새로움이 있을 수 없죠. 일상적으로 통용된다는 말은 새롭지 않다는 말과 같습니다. 누군가 만들어 낸 언어의 논리 패키지를 무단으로 쓰고 있는 형태입니다.

이것이 바로 일상언어의 매몰이 되죠. 일상언어라는 말이 속된 말만 하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일상언어를 받아들이는 뇌의 시스템은 무의식 차원에서 작동하는 고차의식입니다. 인지적 무의식 까지 포함된 작용이죠. 인지적 무의식은 우리가 대부분 하고 있는 형태를 말합니다. 그래서 그 안에는 어쩔 수 없이 자아가 들어 있게 되죠.

그러나 시인은 자아가 생기기 이전 단계에 맞추어 부단히 노력하고 총력을 기울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무의식으로 인지 상황을 벗어나 자아가 물들지 않은 상태로 인지 상태를 돌릴 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들어내고, 의미는 숨겨라.”

이러한 사실 때문에이미지를 들어내고, 의미는 숨겨라.”라는 표현에 의미가 자아를 뜻하게 되죠. 다시 표현하면 자아의 무의식적 인지 상태 이전의 이미지를 찾아서 들어내라는 말이 되지요.

의미만을 들어내면 의미의 과잉을 가져오게 되잖아요. 모든 인류와 문화에서 썼던 범주화된 언어를 사용하고 있어서 새로움은 기대할 수 없지요.

뇌과학 하는 사람들은 어느 정도의 수준 이상이 되면 시의 구조도 눈 여겨 보세요.

견준다는 말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아는 것은 견주지 않아요. 시적 상상력이라는 것이 논리적으로 처음부터 연결이 안되어 있어요.

그래서 시를 접할 때도 탑 다운 식으로 구조를 보아야 합니다.

시인이라는 것은 어떤 사물들, 사건들, 이미지의 논리를 개발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미지의 논리를 포착하는데 기존의 언어를 쓰는 것이 아니죠. 일상용어를 쓰는 일반인은 범주화 시켰던 패키지를 쓰는 사람입니다. 시인은 기존의 논리적 패키지에서 벗어난 사람입니다. 시인들은 새로운 패키지를 만드는 사람입니다. 마치 야생마를 길들이 듯이 언어의 올가미를 던집니다. 그래서 시의 촉수라는 말을 쓰는 것이지요.

문태준 시인이 계산까지 해주었잖아요. 1권의 시집에 50편의 시가 있다고 했을 때 100권을 읽으면 5,000개의 촉수가 생깁니다. 건드리면 폭발할 수 있는 촉수로 뒤덮이게 됩니다. 새로운 감각을 기다리는 촉수로 무장하게 되는 겁니다.

기본적인 능력이 침묵해야 합니다. 고독해야 합니다. 여기서 고독은 문학적 표현이 아닙니다. 저는 물리적 현상이라고 봅니다. 고독 속에 침묵의 몸부림이 있습니다. 이것이 올가미를 던지는 작업입니다.

감각이 연합되는 순간은 순식간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1차 감각에서 지각의 범주화 되는 그 순간을 노리려면 얼마나 날카로운 촉수를 가져야 하겠습니까.

인상파와 입체파 화가들은 얼마나 감각의 극단으로 갔습니까. 인상파는 색깔의 극단으로 가고, 입체파는 형태에 극단으로 간 사람들 입니다. 이것이 바로 감각의 지연입니다.

문태준 시인이 왜 다른 책을 읽지 않은 것은 바로 이런 맥락입니다.

자기의 감관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자기 시의 고향이 어린 시절이기에 자신의 어린 시절을 쓰기만 해도 시가 된다고 한 것입니다.

문태준 시인이 이야기한 꿈의 해몽이 말이 됩니다. 내가 해몽은 반대 하지만 이런 경우는 설명이 가능하죠. 누가 와서 벽을 허물어 트린다.

사실 그 꿈에서 등장하는 옛 집은 돈 될 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꿈을 자주 꾼다고 말합니다. 이 꿈을 자주 꾼다는 말과 다른 책을 읽지 않는다는 말은 같은 이야기입니다.

시적 고향을 방어하기 위한 몸부림 입니다. 인상파 화가와 입체파 화가가 하나의 감각을 밀어 부치듯이 자신의 감각을 한 쪽으로 밀어 부쳐야 합니다. 그래야 감각의 지연이 일어나고 초기 인류가 언어를 획득하기 전에 날 것의 이미지를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태초의 언어를 바탕으로 이미지의 논리를 탄생시킬 수 있습니다.

재료가 구분되어 개별 요소가 포착되면 그제서야 비로소 새로움이 만들어집니다.

언어를 구성하기 이전의 개별 감각들이 이미지로 포착되어 원재료가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미지들의 상관성, 논리를 생성하는 것이 시인의 작업으로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