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내게시판
56차 천문 뇌과학 모임에서 박문호 박사님의 공부하는 삶에
대한 녹취록입니다.
박사님께서 평소 생각하시던 공부하는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공부한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알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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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철이라 동해로 가는 차가 가득한 고속도로를 보고 왔습니다.
보통의 사람이 사는 실체적이며 분산적인 삶입니다.
이러한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삶을 일상적인 삶이라고 한다면
박자세가 추구하는 삶은 공부하는 삶입니다.
일상적인 삶은 실체적, 일차적, 분산적 삶입니다.
공부하는 삶은 가상적, 복합적, 구성적 삶입니다.
일상적인 일차적 삶은 환경에 즉각적으로 반응하고 느끼는 삶입니다.
반짝이는 조명에 눈을 돌리고, 대중가요에 귀를 기울이고, 맛있는 냄새에
배를 꼬르륵 거리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분산적입니다. 관심의 정도가
수시로 바뀌고 그 변화에 안주합니다.
박자세가 추구하는 것은 공부하는 삶입니다.
가상적이며 어떻게 보면 허망되고 실체가 없는 세상을 사는 것입니다.
수학으로 말하고, 원자의 충돌과 유전자들의 이야기를 하는 세포를 보는
세상입니다.
분산적이지 않고 구성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설계도를 생각해 보면 알기 쉽습니다.
팀프로젝트, 컴퓨터 프로그램과 같은 것이 구성적입니다. 그 세계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건물을 지을 때 필요한 설계도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가상세계를 상정하여
만들어집니다. 가구의 배치를 가상으로 옮기고, 문의 위치와 창문의 위치를 정합니다.
가상세계에서 고치고 부수고 다시 조립합니다. 그러므로써 건물이라는 실체를 들어냅니다.
실제에 없는 세계를 가상적이며 구성적인 세계를 통해 구현합니다.
실제적 삶은 구성적이지 않습니다. 끝없는 일차적 반응을 통한 분산된 세계에 사는 것이지요.
공부하는 삶은 복합성을 또한 추구합니다. 보통은 삶은 목적성을 가지고 살악 갑니다.
축구선수가 축구를 하면서 공을 넣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리고 승리를 목적으로 둡니다.
박자세는 그러면 목적성이 없을까요?
일상적인 삶은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황당할 정도로 분산적이어서 목적성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공부하는 분야만 보더라도 '지질학, 천문학, 천체 물리학, 핵물리학, 양자역학, 생화학, 진화학, 분자생물학,
세포 생물학, 유전학, 열역학, 고체물리학, 결정학.......등의 수십가지 학문을 다하고 심지어는
현장에 가서 리얼 시스템을 확인합니다.
이것을 목적성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요?
어떤 수도승보다 복합성을 추구한다는 면에 있어서는 월등히 뛰어납니다. 수도승은 '절대'라는 것이
있다고 상정하고 그것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정진합니다. 박자세는 검증된 모듈을 선택하여
공부합니다.
공부하는 사람들이 공격받는 것은 보통 이렇습니다.
' 실제로 해 보았는가, 이론은 이론일 뿐 실제가 아니잖아. 라는 뉘앙스의 비아냥입니다.
이때 반론을 제기해야 합니다. 아는 것에 자부심을 두어야 합니다.
몇 년 전 영국에서 불교학자가 한국에 찾아왔을 때 인터뷰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불교학자들은 수도승에게 아는체하지 말라는 공격을 받는다는 기사입니다. 거기에 대해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합니다. 면벽수행하여 관문을 뚫은 수도승이 부럽지 않다. 가상성을
통해 나는 그 관문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만 명에 한 명 나올까 말까한 확률이 낮은 것에 투자하는 것보다 방법론적으로 공부하고
경전을 해석하는 것이 더 낳다는 말입니다.
'아는체'라는 용어를 우리는 너무도 부정적으로 쓰고 있습니다. 얼굴이 잘난 사람들을 뽑는
미인대회가 있는 마당에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이 무엇이 부끄러운 일이란 말입니까
사막 한 가운데 도착해 보면 문자의 위대성을 깨닿게 됩니다. 자연이 위대하다 아니다하는 것은
무의미 합니다. 자연은 비교의 대상에서 벗어나 있는 실체입니다. 자연이 위대하다고 하는 것은
마치 어머니의 사랑을 노래한 시를 쓰는 것과 같습니다.
황동규 시인을 만난 적이 있는데 어떤 시를 좋아하냐는 질문에 어떤 분이
'어머니의 사랑'에 관한 시를 좋아한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시인은 정색을 하며 어머니가 시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까하고 반문했다고 합니다. 어머니의 사랑을 부각시키는 순간 어머니의
사랑이 없는 세계를 상정하는 오류를 범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자연과 어머니와 같이 감화에
대상이나 본질적 문제에 대해서는 문자로 서술하기에는 형용하기 어려운 존재들이 분명 있습니다.
그러나 문자는 위대합니다. 그 가상성 때문입니다. 실체의 세계를 상징화하여 만들어진
문자를 조합하여 가상을 실체에 등장시켰기 때문입니다. 생각없이 살다보면 사는대로
생각한다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생각을 확장시키고 구성적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일상적인 삶은 자연적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공부하는 삶은 문화적 삶입니다.
자연과 단절하고 문화를 만든 삷입니다. 도시는 정확하게 뇌의 가상성이 실체로 들어난
장소입니다. 인류의 문명을 만든 것은 실체를 추구하고 일차적이며 분산적인 삶이 아닙니다.
인류의 문명은 가상성을 추구한 사람이 만든 것입니다.
돌 속에서 칼을 상상하고, 동물의 가죽에서 옷을 상상하고, 대리석 안에 조각상을
들여다 본 사람이 만든 세상입니다. 문자, 법률, 수학, 수식, 등의 가상의 세계가
인류의 놀라운 문화, 문명을 이룩했습니다.
박자세가 추구하는 공부하는 삶은 명확합니다. 문자로 가상세계를 구현하고 남길 수 있습니다.
가상의 세계가 리얼한 세계를 바로 잡습니다. 복합적 연쇄와 확장 가능한 삶을 만들 수
있습니다.
가상의 것은 허망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문화를 만든 힘이 여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박자세의 공부하는 삶은 리얼한 세계를 가상성으로 바로 잡으려는 삶입니다. 이것에
목적이 있습니다.
10년 전에 호도 섬으로 야유회를 간 적이 있어요.
(생계의 짐을 벗어난) 중년 남자들의 삶을 유심히 관찰해 봤어요.
대부분의 섬에서는 여자들이 생계를 책임져요.
남자들은 시간이 남아요.
시간 나면 나 같으면 당장 이쪽(공부하는 삶)으로 갈텐데..
이 쪽 삶은 분산성이 폭발해요.
대부분 어슬렁거리는 삶을 살아요.
대낮부터 막걸리 마시고,,,
요즘 신문에서 술 마시는 문화 많이 고발하잖아요.
삶 자체가 분산적이기 때문이예요. 모을 수가 없어요.
왜 모을 수가 없느냐면
자연적 삶과 결부돼 있기 때문에 우리는 자연의 삶에 종속돼요.
들어오는 감각에 반응하지 않을 수 없어요.
끊임없이 불안이 있죠. 직업이나 장래에 대해서
그 불안이 계속 연결되는 불안도 아니고, 끊임없이 불안이 오면서
그것에 몸부림치면서 반응하다가 분산적으로 넉다운돼 가는 삶.
이 쪽 공부하는 삶은 처음에는 황당하고 어려울 수가 있는데,
지루하고 분산적인 것에 대한 인류가 갖는 놀라운 처방은
가상 공간에서 상상의 왕국을 세우는 것,
그것이 수학자, 과학철학자들이 한 일이죠.
(후반부 동영상 중19:25 ~ 21:20)
지난 53차 천뇌 모임에서 하셨던 말씀
'여역수행주 부진즉퇴'
(학문을 한다는 것은 물을 거슬러 오르는 것과 같아서 정진하지 아니하면 퇴보나 다름없다.)
가 떠오릅니다.
공부하는 삶이 쉬운게 아니라는 걸
왜 박자세가 공부하는 삶을 추구해야 하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봅니다.
루리야가 쓴 '지워진 기억을 쫒는 남자'를 보면서 기록을 남기고 글자로 기억을
살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박자세의 게시판을 통해 이런 저런 글을 쓰면서 글의 문체가 변하고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다양해졌으며, 전달하는 방식과 의미를 감추고 이미지를
들어내는 것에 대해 배울 수 있었습니다.
게시판이 하나의 훈련장으로 작용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1번부터 100번까지 채워지는 글들이 하나씩 하나씩 변하고 있음을 증명합니다.
200번째까지 어떻게 또 변하게 될 지 저도 궁금합니다.
노력하고 훈련하도록 하겠습니다.
" 아는체'라는 용어를 우리는 너무도 부정적으로 쓰고 있습니다. 얼굴이 잘난 사람들을 뽑는
미인대회가 있는 마당에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이 무엇이 부끄러운 일이란 말입니까 "
좋은글이 나기까지 보이는 노력은 100번이 있었군요.
보이지 않는 노력은 더 많았겠지만요.
정리해주신글 잘 읽었습니다.
" 아는체'라는 용어를 우리는 너무도 부정적으로 쓰고 있습니다. 얼굴이 잘난 사람들을 뽑는
미인대회가 있는 마당에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이 무엇이 부끄러운 일이란 말입니까 "
미인대회가 있는 현실이 좋은 것은 아니기에 적절한 예는 아니라 생각됩니다. '아는 체'는 부정적인 말임에는 확실합니다. 그것을 넘는 제대로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박자세 활동을 하면서 쓴 100번째 글입니다.
감회가 새롭습니다.
100번째 글이 박문호 박사님의 ' 공부하는 삶'이 되다니요.
공부하는 삶이 제가 추구하는 삶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그러하시지요?
아이러니칼 하게도 첫번째 글은 '정신세계의 가시화'인데
100번째 글은 가상성을 추구하는 공부하는 삶입니다.
박사님의 말씀처럼 가상세계가 리얼 세계를 바로 잡았습니다.
정신세계의 가시화는 공부하는 삶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라고 해석했습니다.
혼자 기뻐하고 있습니다.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