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의 한국 시인 가운데서 가장 서정적이며 서정시의 시초의 모습을 원형적으로 보여준 시인은 김소월이다. 그는 줄기차게 임 없음과 집 없음과 길 없음을 노래하였고 우리의 구비적 전승의 가락에 충실하였다. 김소월은 사랑과 한과 그리움의 시인이었고 섬세한 정감의 시인이었다. 우리는 김소월을 통해서 서정시의 시초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김소월보다 한결 생활의 세계로 근접해 와서 서정시 쓰기가 힘들던 시대에 서정의 영토를 지키며 노래한 시인이 <나그네>, <윤사월> 등의 명편으로 널리 알려진 박목월이다.

- 시 읽기의 방법, 유종호 중에서



반복 대칭 구조를 보여주는 박목월의 나무로 이어갑니다.

 

나무 - 박목월


유성에서 조치원으로 가는 어느 들판에 우두커니

서 있는 한 그루 늙은 나무를 만났다. 수도승일까, 묵중하게 서 있다.

 

다음 날은 조치원에서 공주로 가는 어느 가난한 마을 어귀에 그

들은 떼를 져 몰려 있었다.

멍청하게 몰려 있는 그들은 어설픈 과객일까. 몹시 추워 보였다.

 

공주에서 온양으로 우회하는 뒷길 어느 산마루에 그들은 멀리 서 있었다.

하늘문을 지키는 파수병일까. 외로와 보였다.

 

온양에서 서울로 돌아오자, 놀랍게도 그들은 이미 내 안에 뿌리를 펴고 있었다.

묵중한 그들의, 침울한 그들의, 아아 고독한 모습, 그후로

나는 뽑아낼 수 없는 몇 그루의 나무를 기르게 되었다.

(시집 청담, 1964)

 

 

 

우포늪  - 황동규

우포에 와서 빈 시간 하나를 만난다. 
온 나라의 산과 언덕을 오르내리며
잇달아 금을 긋는 송전탑 송전선들이 사라진 곳.
이동 전화도 이동하지 않는 곳.
줄풀 마름 생이가래 가시연이 
여기저기 모여 있거나 비어 있는 
그냥 70만 평,
누군가 막 꾸다 만 꿈 같다. 
잠자리 한 떼 오래 움직이지 않고 떠 있고
해오라기 몇 마리 정신없이 외발로 서 있다. 
이런 곳이 있다니!
시간이 어디 있나,
돌을 던져도 시침이 보이지 않는 곳.

 

 

그냥 누군가 막 꾸다 만 꿈 같은 곳, 우포늪

 

 

풍장 25  - 황동규

 

희양산 봉암사에 다가갔다.

 

늦가을 저녁

발목이 깊은 낙엽에 빠지고

시냇물 소리도 낙엽에 빠지고

바람 소리까지 낙엽에 빠지는

늦가을 저녁.

 

걸음 멈추면

소리내던 모든 것의 소리 소멸,

움직이던 모든 것의 기척 소멸,

문득 얼굴 들면

하얗게 타는 희양산 봉우리,

소리없이 환한.

 

주위엔 저 옥보라색.

빛들이 몸 가벼운 쪽으로 쏠리다 맑아져

분광(分光) 그만두고 스펙트럼 벗어나 우주 속에 사라졌다가

지구의 하늘이 그리워 돌아온

 

풍장은 황해나 남해의 섬에서 아들이 보름이고 스무날이고 고기잡이 나갔을 때 부모가 세상을 뜨면 매장하지 않고 그가 돌아와 얼굴이라도 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조용헌 살롱] 鳳巖寺

다빈치 코드가 있다면풍수(風水) 코드도 있다. ‘풍수 코드는 우리나라 곳곳의 지명(地名)이나 사찰 이름에는 풍수에 대한 정보가 내장되어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한자로 된 이름만 들어도 대강 그 지역이나 사찰의 풍수가 어떻게 형성되어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1년 중에서부처님 오신 날하루만 일반인에게 개방하는 경북 문경(聞慶)의 봉암사(鳳巖寺)라는 이름에도 풍수 코드가 숨어 있다. 이름을 보면봉황처럼 생긴 바위 또는 바위산에 있는 절이라는 뜻이다. 봉황처럼 생겼다는 것은 어떤 형태인가? 군인들이 쓰는 철모 모양이거나 또는 바가지처럼 둥근 형태, ()처럼 생긴 모습을 풍수가에서는 봉황의 머리 모습으로 간주한다.

그 지역 이름에()’자가 들어가는 곳은 주변에 철모 모양의 산이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 산의 크기가 크면 봉황으로 보고비봉포란(飛鳳抱卵·나는 봉황이 알을 품고 있음)’을 설정하고, 조금 작으면 닭으로 여겨서금계포란(金鷄抱卵)’이라는 이름이 있기 마련이다. 봉황이나 닭은 그 주변에 둥그런 산이 있다는 말이다.

봉암사가 자리잡고 있는 뒷산은 희양산(曦陽山)이다. 희양산은 단단한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바위산이다. 그 모양이 봉황의 머리와 같이 생겼다. 옛날 도인(道人)들이 절 이름을 봉암사라 지은 것도 이 희양산의 형상 때문이다. 북한산의 인수봉, 진안의 마이산과 함께 희양산은 우리나라 ‘3대 대머리 산의 하나다. 철모처럼 생겼다는 말이다.

산 전체가 단단한 바위산이면서 봉황처럼 생겼다면 여기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도 비례해서 강하다. 지기(地氣)가 강한 곳에서는 인물이 나오기 마련이다. 이러한 곳에서는 고승이 배출되거나 또는 장군이 나오고, 잘못되면 조직폭력배 두목이 나온다. 봉암사는 고대부터 고승(高僧)과 도인들이 수도하던 곳이다. 옛날 도인들은 모두 그 에너지를 감지했기 때문에 봉암사를 좋아했던 것이다.

우리나라 금석문(金石文)의 전범(典範)으로 꼽히는 것은 최치원이 남긴사산비명(四山碑銘)’이고, 그중 하나가 희양산 봉암사에 있는지증대사적조탑비명(智證大師寂照塔碑銘)’이다. 봉암사에 가거들랑 이 지증대사 비문도 보고 올 일이다.

 

봉암사.GIF  

봉암사는 스님들의 수도를 위한 절이라 미리 허락을 맡지 않은 사람은 출입을 금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1년에 단 한 번 사월초파일에 문을 연다고 합니다. 다음 주 토요일과 일요일엔 지리산 둘레길 학습탐사에 참가하셨다가 월요일엔 문경으로 건너가시기 바랍니다.^^

 

 

성에꽃  - 최두석

 

새벽 시내버스는

차창에 웬 찬란한 치장을 하고 달린다

엄동 혹한일수록

선연히 피는 성에꽃

어제 이 버스를 탔던

처녀 총각 아이 어른

미용사 외판원 파출부 실업자의

입김과 숨결이

간밤에 은밀히 만나 피워낸

번뜩이는 기막힌 아름다움

나는 무슨 전람회에 온 듯

자리를 옮겨다니며 보고

다시 꽃이파리 하나, 섬세하고도

차가운 아름다움에 취한다

어느 누구의 막막한 한숨이던가

어떤 더운 가슴이 토해낸 정열의 숨결이던가

일없이 정성스레 입김으로 손가락으로

성에꽃 한 잎 지우고

이마를 대고 본다

덜컹거리는 창에 어리는 푸석한 얼굴

오랫동안 함께 길을 걸었으나

지금은 면회마저 금지된 친구여 

 

, 한편의 시로 유명해진 시인.

나열은 힘이 세다. 구조, 짜임새를 추적해보라.

 

‘새벽 시내버스’ 차창에 어리는 성에를 ‘꽃’으로 보는 시인

민중들의 삶에 대한 애정, 그 애정을 함께 나누던 친구에 대한 그리움을 ‘성에’라는 평범한 소재를 통해 효과적으로 형상화된 작품입니다.

 

 

 성에꽃.GIF  

 

 

 

 

 

 

흰 바람벽이 있어  - 백석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앉어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늬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골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어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쨈'과 도연명(陶淵明)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구둣발로 차고 가는구나  - 오규원

 

        1

서울 영등포구 신길6

육교 밑

그늘진 좌표에서

뒹두는 돌

내가 구둣발로 차고 가는구나

내 구둣발에 차이는구나

버려진 고향처럼

 

        2

내가 차고 가는 돌 속에

환하게 다져지는 달빛

(그 속에 내가 서면 내 몸이 다 젖으리)

산의 귓밥을 파내는 물소리

그것을 보는 내 눈이여

낡고 오래 된 상처여

 

        3

감자를 캐는 누이는 땅속에서 나온 돌을 감자처럼

밭 가장자리에 쌓았다 햇볕에 잘 익은 돌들은

여물어 단내가 났다

다람쥐들은 돌 깊숙한 곳에 새끼를 까고

먼저 죽은 자식을 밭 가장자리에 묻으며

아버지는 잠자리가

편하도록 관을 돌로 괴었다

큰 돌 사이에 작은 돌을 끼우고

큰 돌을 빼내고 작은 돌을

 

작은 돌을 만만하다고

내가 구둣발로 차고 가는 구나

 

아들아. 내가 차고 가는구나

 

박사님께서 눈물 흘렸던 시.

물리학 공부를 하려면 시를 읽어라.

시는 이미지의 논리, 수학은 시다.

자로 잰 듯 써야 한다.

지향점을 놓지 않고 간다.

 

 

과꽃  - 김영태

 

과꽃이 무슨 
기억처럼 피어 있지
 
누구나 기억처럼 세상에
 
왔다가 가지
 
조금 울다 가버리지
 
옛날같이 언제나 옛날에는
 
빈 하늘 한 장이 높이 걸려 있었지

 

다 암송하세요.

의식 레벨이 바꿔져요.

 

 

벽제  - 이성복

 

벽제. 목욕탕과 공장工場 굴뚝. 시외버스 정류장 앞, 중학생과 아이 업은 여자.

벽제. 가보진 않았지만 훤히 아는 곳. 우리 아버지 하루종일 사무를 보는 곳.

벽제, 외무부에 다니던 내 친구 일찍 죽어 그곳에 갔을 때 다른 친구 하나는

화장장 事務長. 모두 깜짝 놀랐더라는 뒷얘기. 내가 첫 휴가 나왔을 때 학교에서

만난 그 녀석, 몰라보게 키가 크고 살이 붙어 물어봤더니 <글쎄, 몸이 자꾸

좋아지는구나>하던 그 녀석. 무던히 꼿꼿해 시험 보면 面接에서 떨어지곤 하던

녀석. 큰누님은 시집가고 어린 동생들, 흔들리던 살림에도 공부 잘 하다가

腎臟炎. 그날, 비 오던 날 친구들 모여 한줌한줌 뼈를 뿌릴 때 <진달래 꽃 옆에

뿌려주면 좋아하지 않을까> 친구들, 흙이 되기 전에 또 비 맞는 그 녀석 생각하고,

울음 소리…… 벽제. 오늘 아침 우리집 집수리 하는 사내, 우리 아버지 벽제 皮革工場

다니신다니까 <벽제가 우리 고향이에요. 아저씨한테 잘 말씀드려 우리 아이 취직 좀

시켜주세요. 가죽 공장은 힘든다던데……> 그리운 고향 벽제. 너무 가까우면 생각도

안 나는 고향. 음식점과 잡화점, 자전거포 간판이 낡은 나라. 무우꽃이 노랗게

텃밭에 자라나고 비닐 봉지 날으는 길로 개울음 소리 들려오는.

 벽제. 이별하기 어려우면 가보지 말아야 할, 벽제. 끊어진 다리.

<정든 유곽에서>1996, 시선집

 

시인 이성복은 1952년 경북 상주에서 출생, 서울대 및 동대학원 불문과를 졸업했으며, 현재 계명대 교수로 재직중이다.

1977『문학과지성』정든 유곽에서 발표하며 등단했다 1982김수영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다. 개인적 삶을 통해 확인한 고통스러운 삶을 보편적인 삶의 양상으로 확대하며 진실을 추구한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1980), 일상의 기저에 자리한 슬픔의 근원을 서사적 구조로 드러낸 『남해금산』(1987), 연애시의 서정적 어법으로 세상에 대한 보편적 이해를 보여준 『그 여름의 끝』(1990), 무의식적으로 지나치고 있는 삶의 일상과 세상과의 관계를 표현한 『호랑가시나무의 기억』(1993) 등의 시집을 간행한 바 있다.
이성복은 섬세하고 평이한 언어로 우리 시대의 정신적 위기를 노래하는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이외에도 『아, 입이 없는 것들』(2003), 『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2003), 『오름 오르다』(2004) 등의 시집이 있다.

 

일상에서 노상 접하는 것을 시 소재로 사용한 위대한 시.

큰 주제를 잡으면 반드시 실패한다. 최대한 소재를 줄여라.

일상이 시가 된다. 주변에 널브러진 것을 문학으로 승화시켜라.

황동규 시인은 『시가 태어나는 자리』에서 이렇게 얘기했다.

“다시 강조하지만 생활에서 멀어질수록 공허해지기 쉽고 또 문학의 생명이랄 수 있는 구체성에서 멀어질 위험이 있는 것이다. 굳이 뛰어난 작품이라기보다는 금방 손에 잡히는데다 길이도 알맞은 예를 하나만 들어보자.

 

오미자 술

 

오미자 한줌에 보해소주 30도를 빈 델몬트 병에 붓고

익기를 기다린다.

, 차츰차츰 더 바알간 색.

예쁘다.

막소주 분자(分子)

설악산 오미자 기개에 눌려 하나씩 분자 구조 바꾸는 광경.

매일 색깔 보며 더 익기를 기다린다.

내가 술 분자 하나가 되어

그냥 남을까 말까 주저하다가

부서지기로 마음 먹는다.

가볍게 떫고 맑은 맛!

 

욕을 해야 할 친구 만나려다

전화 걸기 전에

내가 갑자기 환해진다.

 

 

*술 이름과 그 도수, 그 술을 담는 병 이름의 구체적인 제시, 그것은 세계에 대한 시인의 감사의 표지이다.

 

 

사평역에서  -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첫문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시 

 

 

 

오후 3  - 박문호

 

 

사물들 언어 멈춘

오후 3

  

텅빈 거실

빛에 음율 소리없이 감기고

소리에 빛 알갱이 환한 명멸

   

빛과 소리

시간 멈춘듯

살랑이고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무심히

내려앉는

저 투명한

적요함이여.

   

어느 늦 가을  

오후 3

 

 

끝으로 한 명의 시인을 소개하고 글 마치려 합니다.

혜성처럼 등장해 문단의 상을 휩쓸면서 문단을 평정한 시인

한 민족의 전통적 정서를 연결한 시인 문태준

 

첫사랑 - 문태준

 

눈매가

하얀 초승달을 닮았던 사람

내 광대뼈가 불거져 볼 수 없네

이지러지는 우물 속의 사람

불에 구운 돌처럼

보기만 해도 홧홧해지던 사람

그러나, 내 마음이 수초 밭에

방개처럼 갇혀 이를 수 없네

마늘종처럼 깡마른 내 가슴에

까만 제비의 노랫소리만 왕진 올 뿐

뒤란으로 돌아앉은 장독대처럼

내 사랑 쓸쓸한 빈 독에서 우네

 

시인들의 위대한 표현은 인류의 문화유산으로 보호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문태준(文泰俊·1970년생) 시인은 2008소월시문학상수상자로 선정됐다. 상복이 많다.

2004년 동서문학상을 시작으로 노작문학상, 미당문학상, 유심문학상을 수상했다.

도서출판 작가의 문인 대상 설문조사에서 문 씨의 시맨발 2004가장 좋은 시로 꼽힌 데

이어 2007년엔가장 좋은 시’(‘가재미’), ‘가장 좋은 시집’(‘맨발’), ‘가장 좋아하는 시인으로 꼽혀

3관왕을 차지했다.

최근 '먼 곳'이라는 시집을 냈는데, 박사님께도 선물했다고 합니다.  

 

가재미  - 문태준

 

김천의료원 6인실 302호에 산소마스크를 쓰고 암투병 중인 그녀가 누워 있다

바닥에 바짝 엎드린 가재미처럼 그녀가 누워 있다

나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한 마리 가재미로 눕는다

가재미가 가재미에게 눈길을 건네자 그녀가 울컥 눈물을 쏟아낸다

한쪽 눈이 다른 한쪽 눈으로 옮겨 붙은 야윈 그녀가 운다

그녀는 죽음만을 보고 있고 나는 그녀가 살아온 파랑 같은 날들을 보고 있다

좌우를 흔들며 살던 그녀의 물 속 삶을 나는 떠올린다

그녀의 오솔길이며 그 길에 돋아나던 대낮의 뻐꾸기 소리며

가늘은 국수를 삶던 저녁이며 흙담조차 없었던 그녀 누대의 가계를 떠올린다

두 다리는 서서히 멀어져 가랑이지고

폭설을 견디지 못하는 나뭇가지처럼 등뼈가 구부정해지던 그 겨울 어느 날을 생각한다

그녀의 숨소리가 느릅나무 껍질처럼 점점 거칠어진다

나는 그녀가 죽음 바깥의 세상을 이제 볼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한쪽 눈이 다른 쪽 눈으로 캄캄하게 쏠려버렸다는 것을 안다

나는 다만 좌우를 흔들며 헤엄쳐 가 그녀의 물 속에 나란히 눕는다

산소호흡기로 들이마신 물을 마른 내 몸 위에 그녀가 가만히 적셔준다

 

가재미를 다시 읽어봐야 한다.

 

"낯설지 않은 은유와 직유가 독자를 시 앞으로 바짝 끌어당겨 눈가에 물기를 맺게 하는 까닭이 무엇일까? 그것은 화자가 비유의 대상을 바라보기만 하는 게 아니라 비유 속으로 들어가 스스로를 대상의 고통 위에 얹어두기 때문이다. 고통에 참여하는 방식을 통해 화자는 단순한 연민을 화해와 상생의 길로 끌어올린다. 시인 문태준은 보기 드물게 겸손한 사람인데, 그 겸손이 내성의 절창을 낳았다."

- 안도현의 노트에 베끼고 싶은 시 중에서

 

 짧은 낮잠  - 문태준

 

낮잠에서 깨어나면

나는 꽃을 보내고 남은 나무가 된다

 

()이 이렇게 하루에도 몇번

낯선 곳에 혼자 남겨질 때가 있으니

 

오늘도 뒷걸음 뒷걸음치는 겁 많은 노루꿈을 꾸었다

 

꿈은, 멀어져가는 낮꿈은

친정 왔다 돌아가는 눈물 많은 누이 같다

 

잠에서 깨어나 나는 찬물로 입을 한번 헹구고

주먹을 꼭 쥐어보며 아득히 먼 넝쿨에 산다는 산꿩 우는 소리 듣는다

 

오후는 속이 빈 나무처럼 서 있다

 

 

시인은 등산하다가 내려올 때 형용사 하나를 내내 붙들고 고민한다고 합니다.

시인의 민감하고 섬세한 촉()은 역시 지독한 노동의 결과로 보여집니다. 

 

시인의  네 편 이어드리며, 글 마칩니다.

 

평상이 있는 국숫집  - 문태준

 

평상이 있는 국숫집에 갔다
붐비는 국숫집은 삼거리 슈퍼 같다

평상에 마주 앉은 사람들

세월 넘어 온 친정 오빠를 서로 만난 것 같다
국수가 찬물에 헹궈져 건져 올려지는 동안

쯧쯧쯧쯧 쯧쯧쯧쯧,

손이 손을 잡는 말
눈이 눈을 쓸어주는 말

병실에서 온 사람도 있다

식당 일을 손 놓고 온 사람도 있다
사람들은 평상에만 마주 앉아도

마주 앉은 사람보다 먼저 더 서럽다

세상에 이런 짧은 말이 있어서
세상에 이런 깊은 말이 있어서

국수가 찬물에 헹궈져 건져 올려지는 동안

쯧쯧쯧쯧 쯧쯧쯧쯧,
큰 푸조나무 아래 우리는

모처럼 평상에 마주 앉아서

 

 

측백나무가 없다 - 문태준

측백나무 곁에 서 있었다
참새떼가 모래알 같은 자잘한 소리로 측백나무에서 운다

그러나 참새떼는 측백나무 가지에만 앉지는 않는다

나의 시간은 흘러간다
참새떼는 나의 한 장의
白紙 깨알 같은 울음을 쏟아놓고

감씨를 쏟아 놓고 허공 한 촉을 물고 그 긴 끈을

 

그 긴 탯줄을 저곳으로 저곳으로 끌고 가 버리고 끌고 가 버리고

다만 떼로 모여 울 때 허공은 여드름이 돋는 것 같고

바람에 밀밭 밀알이 찰랑 찰랑 하는 것 같고

 

들쥐 떼가 구석으로 몰리는 것 같고 그물에 갇힌 버들치들이

연거푸 물기를 털어 내는 것 같다

 

측백나무 곁에 있었으나 참새떼가 측백나무를 떠나자

내 감각으로부터 측백나무도 떠났다


사방에 측백나무가 없다


 

 

뻘 같은 그리움 / 문 태 준

그립다는 것은 당신이 조개처럼

아주 천천히 뻘흙을 토해내고 있다는 말

그립다는 것은 당신이 언젠가 돌로 풀을 눌러놓았었다 는 얘기

그 풀들이 돌을 슬쩍슬쩍 밀어올리고 있다는 얘기

풀들이 물컹물컹하게 자라나고 있다는 얘기



중심이라고 믿었던 게 어느날 / 문 태 준

못자리 무논에 산그림자를 데리고 들어가는 물처럼
한 사람이 그리운 날 있으니

게눈처럼, 봄나무에 새순이 올라오는 것 같은 오후
자목련을 넋 놓고 바라본다

우리가 믿었던 중심은 사실 중심이 아니었을지도
저 수많은 작고 여린 순들이 봄나무에게 중심이듯

환약처럼 뭉친 것만이 중심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그리움이 누구 하나를 그리워하는 그리움이 아닌지 모른다

물빛처럼 평등한 옛날 얼굴들이 꽃나무를 보는 오후에
나를 눈물나게 하는지도 모른다


그믐밤 흙길을 혼자 걸어갈 때 어둠의 중심은 모두 평등하듯

어느 하나의 물이 산그림자를 무논으로 끌고 들어갈수 없듯이

 

참고 자료

- 시 읽기의 방법, 유종호

- ()가 태어나는 자리, 황동규

- 안도현의 노트에 베껴 쓰고 싶은 시

 

*이 번 주에 두 편의 글 겨우 올립니다.

좋은 시집은 자기 전에 읽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좋은 대목은 꼭 써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한 시인의 시 세계를 만난다는 것은 평범한 일상이 환해지는 것'입니다.

잠시나마 환한 일상의 시간 만들어주신 박사님께 감사의 말씀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