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차 천+뇌 모임이 송년회와 함께 보령 이은호 선생님댁에서 열리기로 예정되어 있는 전날.

흐린 날씨에 내리기 시작한 눈이 오후에는 함박눈이 되어 쌓이기 시작한다.

내가 가야 할 길도 걱정이지만 각 지역에서 자동차로 참석하실 분들도 걱정이다.

혹여나 눈 때문에 참석을 포기하시지는 않나 안달이 나서 자꾸만 베란다로 나가서 밖을 내다보게 된다.

날씨와는 달리 또 하나의 걱정은 내일 발표이다. 리스만 도표.

한 번은 넘어야 할 산이니 하겠다고 대답은 했는데, 시간이 관건이다. 아무래도 25분 안에 완성이 안된다.

노트에도 그러하니 전지에 그리는 것은 더 시간이 걸릴 터. 걱정이 되어 눈길을 뚫고 문구점엘 다녀온다.

전지와 매직을 사와서 바닥에 신문지 깔고 시간 재 가면서 그린다. 역시 40.

다시 속도를 올려서 그려본다. 그래도 30. 10분을 줄이는 것도 쉽지 않은데 여기서 5분을 더 줄여야 한다.

밤은 깊어가는데, 아쉬움이 남아도 내일 운전해서 가야 하니 이쯤에서 접고 잠자리에 들기로 한다.

꿈속에서 리스만의 화살들이 여기저기로 휙휙 날아다닌다.

 

다행히도 아침은 날씨가 쾌청하다. 일찍 도착해서 한 번 더 그려봐야지 했는데,

지하주차장에 이중 주차된 차들 때문에 1시간이나 지체되어 버렸다. 간신히 시간 안에 도착한다.

준비되어진 전지판을 보니 가슴이 두근거린다.

일찍 도착한 멤버들은 발표준비를 하느라 모두가 열심이다.

모임 시작 전, 발표 스타일이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고 꾸중을 들었다.

이번 발표에서는 일체 한마디도 하지 말라는 엄명이 떨어진다.

드디어 발표시작. 전지 앞에 서서 까치발을 하고 첫번째 Box를 그린다. 긴장해서인가, 아 실수다.

이렇게 시작하면 안되는데. 마음은 새 전지에 다시..라고 하고 싶지만 제한된 시간을 생각하면

어쩌랴, 그냥 진행할 수밖에. 하나가 삐거덕 거리니 전체의 균형이 조금씩 틀어진다.

그나마 정교한 그림이 아니라 도표인 것이 다행이다.

평소 같으면 침묵이 어색해서 중얼거릴 용어도 속으로 삼키고 그리는데 집중한다.

전체적인 균형도 틀어지고 실수도 조금 있기는 했지만 어쨌든 시간 안에 완성을 한다.

박사님이 정답이셨다. 말을 하지 않고 집중한 게 유효했다. 25분이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님을 실감한다.

발표 후 느낌은? 안도감? 성취감? 해냈다는 뿌듯함? 기쁨?

그런 모든 감정도 있겠지만 가장 크게 드는 생각은 이렇게 쉬운 걸 왜 진작 하지 않았던가 하는 놀라움이다.

처음 리스만 도표를 접했을 때는 뭐 이런 암호가 다 있어? 하는 것이었고,

브레인에 대한 공부가 조금씩 쌓여서 용어를 알고, 각 개별 구조도 알게 되고 연결 패턴을 알아도

여전히 접근이 쉽지가 않았었다.

언젠가는…’이라고 내내 마음 속에 품고는 있었어도 어렵다는 선입견이 선뜻 도전을 하게 하지 않았었다.

여러 번 시행착오를 하고, 박스를 그리다가 지치고, 선들을 그리다가 던지면서 조금씩 더딘 걸음으로

한걸음씩 앞으로 나가 처음으로 모두 완성을 하고 났을 때, 잠시 눈을 의심했었다.

혹시나 선을 빠트린 건 아닌지 몇번이고 확인했다.

엄청 복잡해 보였던 감각경로나 Basal Ganglion의 연결선들이 그야말로 몇 개 안된다.

휙휙 긋고 나니 완성이다. 해보니 이렇게 쉬운 것을 왜 진작 시도하지 않았던 건지 의아할 정도이다.

역시 시작이 중요하다. 시작하니, 끝도 있는 것이다. ‘언젠가는은 영원히 언젠가는으로 남을 수 밖에 없다.

발표는 자신의 성장에 엄청난 benefit을 주는 장이다.

발표를 해야 하니 미룰 수 없고, 미룰 수 없으니 공부하고, 그것은 고스란히 자신의 재산이 된다.

익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번처럼 실감을 해 보는 건 처음인 것만 같다.

어영부영 따라다니는 3년을 한번에 뛰어넘을 수 있는 것은 암기해서 직접 발표를 하는 것이다.

이제 박자세 회원이면 누구나 리스만 도표쯤은 기본이지하는 날이 머지 않다.

벌써 발표를 하겠다는 회원이 줄을 서고 있다.

 

이튿날, 석탄 박물관을 방문했을 때, 이층에서 붓과 벼루전이 열렸다.

거기에서 대전한의학 연구원으로 근무하시는 전종욱 선생님께서 붓글씨로 써주신 글씨가 있다.

종이가 작아서 다 쓰지는 못했지만 논어 첫편에 나오는 유명한 글귀이다.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

 

배우고 익히는 기쁨이 전부인 곳. 이것이 박자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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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분에 완성했던 리스만 도표 (연습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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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종욱 선생님께서 써주신 논어 <학이>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