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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8월 18일 (목)
독서와 여행
만권의 책을 읽어 근본을 다지고
사방을 유람하여 활용할 능력을 기른 뒤에
대장부의 할 일을 잘 할 수 있을 것이다.

讀萬卷, 以立其體, 遊四方, 以達其用,
독만권, 이립기체, 유사방, 이달기용,
然後大丈夫之能事畢矣.
연후대장부지능사필의.

서거정(徐居正 1420~1488)
〈송이서장시서(送李書狀詩序)〉
《사가집(四佳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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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가 쓴 여러 편의 송서문(送序文)을 읽어보면 정사(政事)와 문장(文章)을 ‘대장부의 할 일’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이 글에서는 ‘원유(遠遊)를 통해 기상을 장대하게 하여 문장을 빼어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도도히 흐르는 장강을 굽어보며 유장한 흐름을 음미하고 탁 트인 벌판에 서서 흉금을 열고 높은 산악에 올라 웅대한 기상을 기르라. 고적을 답파하여 옛 일을 상상해 보고 현자를 만나 식견을 넓히며 중원의 대도(大都)에 가서 그 선진 문물을 호흡해 보라. 그러면 너의 몸에 형언할 수 없는 장대한 기운이 스며들어 쓰는 글마다 저절로 기이하게 될 것이다. 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소설가 이문열은 언젠가 자기 문학의 힘이 여행과 독서에서 나왔다고 술회한 바 있다. 실제로 그의 작품을 읽어보면 남다른 배짱과 아른거리는 문기(文氣), 고전에 대한 조예를 느끼게 된다. 또 우리 시대를 풍미하고 있는 유홍준의 답사기도 많은 독서와 답사에서 얻은 자신감을 바탕으로 자연과 인간, 고적과의 정서적 교감을 스스럼없이 표출하여 객관과 실증의 함정을 뛰어넘고 있다.

  이 두 분은 서로 다른 분야이기는 하지만 ‘만권의 책을 읽고 만리의 길을 가는[讀萬卷書 行萬里路]’ 동양적 문필 문화의 도도한 흐름 속에 놓여 있다. 조선 시대의 유산기와 연행록이 다 이러한 문필 전통에 뿌리를 뻗고 있는데 그 유서가 아주 깊다.

  상고 시대에 왕가의 세자가 태어나면 뽕나무로 만든 활에 쑥대화살을 재어 천지와 동서남북에 쏘아 원대한 포부를 품도록 기원하였다는 내용이 《예기(禮記)》 「내칙(內則)」에 보인다. 그리고 맹자는 그의 저서에서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강조하고 있다. 부귀나 빈천, 위세 이런 것에 절대로 꺾이지 않는 사람, 인의를 가슴에 품고 군자의 대도를 걸어가는 사람, 그 대장부의 풍모에서 느껴지는 지대지강한 기운이 호연지기이다. 《맹자》라는 책을 읽어보면 다소 오활하거나 독선적인 면이 있긴 하지만 과연 대장부의 호연지기가 문자 사이에 어른거린다.

  송나라 때의 문장가 소철(蘇轍)과 마존(馬存) 등은 사마천 문장의 기이하고 위대한 기상을 원유를 통해 호연지기를 길렀기 때문으로 파악하였다.

  “천하의 대관을 모두 구경하여 나의 기백을 북돋운 뒤에 토하여 글을 짓는다.[盡天下之大觀 以助吾氣然後 吐而爲書]”

  이런 원유(遠遊)를 통한 호연지기의 배양은 우리나라의 문필가에게도 많은 공명을 주어 하나의 문학적 전통이 되었다. 고려의 이제현(李齊賢)은 중원 깊숙이 두루 다녔고, 김극기(金克己)는 우리 산천에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이다. 김시습(金時習)과 김병연(金炳淵)은 처음부터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떠도는 삶에서 시가 나왔고, 박지원(朴趾源)과 홍대용(洪大容)은 그들의 장도(壯途)에 평소의 온축을 한바탕 우려내었다. 덩굴처럼 벋어가며 크고 작은 열매를 맺은 유산기와 연행록은 이런 사상에 그 일단이 기초해 있다. 정조 때 제주의 기민을 구제한 김만덕(金萬德)이 소원을 묻는 임금의 하문에 ‘한 번 서울에 가서 임금님 사시는 곳을 바라보고 금강산에 들어가 만이천봉을 구경한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願一入京都, 瞻望聖人在處, 仍入金剛山, 觀萬二千峯, 死無恨矣.]’라고 한 것도 이런 문화적 전통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한다.

  서거정이 멀리 길을 떠나는 사람에게 원유를 통하여 웅혼한 기백을 기를 것을 주문한 것은 이러한 동아시아 문필 문화의 맥락 속에서 나온 말이다. 그리고 그 자신도 젊은 시절 과거에 낙방하여 많은 곳을 떠돌아다니면서 배움을 청하곤 하였으니, 그의 말은 실제 자신의 체험 속에서 나온 말이기도 하다. 실제 그는 관각 문학의 웅걸답게 중국 사신과의 수창이나 국가의 문화 사업에 핵심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지금 화성의 봉담에 서공의 신도비(神道碑)가 서 있는데, 그를 이어 문형을 맡은 어세겸(魚世謙)이 삼불후(三不朽)를 들어 공을 칭송하고 있다. 입언(立言)과 입공(立功)은 확실히 수긍할 만하고 그의 일생을 잘 간추린 말로 보인다.

  지금 한문 번역의 필수 공구서인 《동국여지승람》은 시와 누정기 등을 삽입하여 지리지와 시문집을 결합한 것으로, 성종대의 상승하는 국운과 왕성한 문풍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이에 비해 조선 말기에, 국가가 나서서 해야 할 일을 혼자서 감당한 김정호나, 복거지(卜居地)를 찾기 위해 전국을 헤맨 이중환 같은 분은, 그 큰 업적이야 마땅히 칭송해야 하겠지만, 한 시대의 문풍으로 보면 쇠미한 시대의 조짐을 미리 보인 것이 아니겠는가.

  사가 서거정의 말은 유서 깊은 우리 문필 문화의 정신사적 일단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다소 쇄쇄하고 유약한 흐름으로 나아가는 오늘의 우리 문풍에 약석(藥石)과 같은 말이라는 생각이 들어 소개해 보았다. 

 

글쓴이 : 김종태(한국고전번역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