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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사 게재 일자 : 2014년 07월 25일
<파워인터뷰>
[단독] “‘가장 창조적인 5% 인재’는 그냥 내버려두는 게 최상”
김대식 腦과학 전공 카이스트 교수
박민기자 minp@munhwa.com

 학생같은 옷차림의 김대식 카이스트대 교수가 21일 서울 중구 새문안로 문화일보 사옥 뒤편 정원에서 뇌과학이 알려주는 인간의 부정적인 면에 대해 설명하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다.

 분홍색 운동화에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나타난 김대식 교수는 인터뷰 내내 복장만큼이나 자유분망한 생각을 풀어놓았다.
김대식(47) 카이스트대 교수의 학력과 경력은 눈부시다. 독일에서 초·중·고와 대학을 졸업한 그는 노벨상 수상자만 32명을 배출, 노벨상사관학교로 불리는 막스플랑크연구소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어 미국 최고의 대학 중 하나로 꼽히는 MIT대학에서 박사후 과정을 밟은 뒤 일본의 노벨상 수상의 산실로 꼽히는 이화학(RIKEN)연구소에 재직했다. 이후 미국 미네소타대, 보스턴대 등에서 15년간 교수생활을 한 그는 지난 2009년부터 카이스트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런 그가 지난 21일 분홍색 운동화에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헤어무스로 머리를 잔뜩 세운 채 문화일보에 나타났을 때, 그리고 “공부를 잘 못해서 오래 하게 됐지만 그래서 다양한 분야를 공부하게 됐다”고 말할 때 ‘잘난 척’한다는 생각보다는 신선함이 느껴졌다. 실제로 그는 인터뷰 내내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솔직하게 말했고 뇌과학과 인공지능의 미래를 열정적으로 설명했고 우리 과학계의 문제를 냉정하게 비판했다. 그의 생각과 말에는 여기저기 눈치를 보는 듯한 머뭇거림이 없었다. 그래서 인터뷰를 마무리할 때쯤에는 독일, 미국, 일본 등 선진국을 오가며 첨단의 학문을 해온 과학자의 자유분방함과 진취성이 바로 창의의 핵심이라는 생각에 자연스러워졌다.

―뇌과학은 어떤 공부를 하나.

“막스플랑크연구소에서 신경생물학, 전자생물학 등을 공부했고 동물들 뇌수술을 하기도 했다. 뇌수술을 했을 때 정말 신기했던 것은 뇌에는 신기한 것이 없다는 점이었다. 뇌는 그냥 1.5㎏짜리 고깃덩어리였다. 뇌를 아무리 해부해봐도 그 속에 영상도 없고, 소리도 없고, 자아도 없고 기억력도 없다. 그런데 그 고깃덩어리로 우주를 이해하고 몇 천 년 동안 철학적 질문을 던지고 해답을 구한 거다. 어떻게 물질적인 기계가 지능과 감정과 영혼과 자아를 만드는지, 그게 제가 보기에는 뇌과학의 가장 재미있는 부분이다. 개인적으로 뇌과학을 실험철학이라고 부른다. 철학자들과 같은 질문을 하지만 실험으로 문제를 풀려고 한다는 점에서 기존철학과 다르다.”

―오랫동안 실험철학을 해오면서 철학적으로 깨달은 것도 많겠다.

“과학적으로 뇌를 분석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뇌를 연구하면 알츠하이머 치료법을 발견한다든지 기계에 지능을 부여해 부가가치를 높인다든지 하는 긍정적인 효과에 기대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메시지는 이미 많이 알려져있다. 내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다분히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첫째는 현대 뇌과학이 알려주는 인간의 모습이 그다지 훌륭하지 않다는 점이다. 인간의 정치적 선호나 종교적 믿음 등과 같은 것은 다 착각이다. 뇌가 얘기하는 거짓말이다. 뇌과학은 이런 현실을 구체적으로 증명하려 한다. 둘째 인간처럼 생각하는 인공지능을 만들 수 있는 미래가 엄청난 편리함을 가져다주겠지만 아름답기만 하지는 않을 것 같다는 것이다.”

―‘착각’이나 ‘착시’가 진화생물학자가 주장하는 ‘자유의지는 없다’는 주장과 일맥상통하는 것인가.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자유의지란 내가 뭔가를 원했을 때 그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생은 선택의 꼬리물기다. 인간은 팔을 올리는 아주 단순한 결정에서부터 결혼을 하는 대단히 복잡한 결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결정을 한다. 그런데 이게 말로는 쉽지만 사실 물리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팔을 든다는 것은 그 과정에서 에너지가 소모되는 등 엄청난 물질적인 일들이 벌어지는 것이다. 반면 내가 뭘 원한다는 것은 비물질적인 것이다. 사실 비물질적인 의도가 물질적인 세상에 변화를 준다는 것은 물리학에서는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내가 원하는 것을 한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다. 벤저민 리벳 박사가 자유의지와 관련된 실험을 했다. 그런데 내가 무엇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 몇백 밀리 세컨드 정도의 극히 짧은 시간 전에 뇌에서는 이미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자유의지라고 하면 내가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인데 사실은 나라는 자아가 무언가를 원하기 전에 뇌는 뭔가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일반인들이 생각할 때는 내가 무언가를 원해서 선택을 한다. 즉 선호가 있어 선택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현대 뇌과학에서 선택을 먼저 하고 선호를 만드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인간의 선택은 하나의 당구공이 다른 당구공을 치면 그 당구공이 움직이는 것처럼 단일한 인과관계만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인과관계가 합쳐져 이뤄진다. 그래서 현대과학에서 ‘선택의 풍경’이란 말을 쓴다. 산꼭대기에서 하나의 공을 굴리면 산의 풍경에 따라 공이 굴러내려 온다. 프레임은 선택돼 있지만 어떤 결정이 날지는 모른다. 이처럼 인간은 예측할 수 없는 기계다.”

―인간은 왜 그런 착각을 하도록 만들어졌나.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는 착각이 없다면 ‘나’와 ‘자아’가 연결될 수가 없다. 매 순간마다 수백 가지 다른 이유들로 선택을 하게 되는데 ‘나’라는 ‘자아’가 있고 그 ‘자아’가 이런저런 이유로 선택을 했다는 스토리를 만들면 그 스토리를 통해 연관이 없는 점들을 연결시킬 수 있다. 이렇게 점들을 연결시켜주는 선이 결국 ‘나’라는 자아다. 따라서 ‘나’라는 존재 자체도 사실은 착각이다. 진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자유의지가 없다면 ‘책임’이라는 개념도 설 자리가 없는 것 아닌가.

“책임이라는 개념은 계몽주의의 산물이다. 인간은 자유롭고 선택에 대한 자유가 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유의지란 것이 알고 보니 뇌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하면 누가 책임을 지겠는가. 미국에 있을 때 한 달에 한 번 보스턴에서 뇌과학자들과 법조계들 모임이 있었다. 판사 한 분이 뉴욕에 있을 때 은행 임원이 부인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멀쩡하던 사람이 부인을 살해했다. 이유를 알아보니 그 임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전두엽에 암이 있었다. 전두엽은 사람의 성격과 선택을 좌우하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결국 그 임원이 자유의지로 부인을 살해한 것이 아니라 뇌가 병에 걸려 살인을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판사는 그 주장을 인정하지 않았다. 법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고 규정돼 있지 인간의 신경세포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규정돼 있지 않다는 것이다. 다른 교수님은 자유의지가 없더라도 자유의지가 있는 것처럼 믿는 사회가 없다고 검증된 사회보다 낫다는 말을 했다. 독일에 있는 제 지도교수님은 과학적으로 자유의지(프리 윌)는 없는 것 같지만 적어도 프리 언윌(free unwill)은 있을 것 같다고 하셨다. 내 머리 안에서는 내가 컨트롤 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져 나를 선택하게 만들지만(그런 프로세스 자체는 내가 선택할 수 없지만), 적어도 ‘선택을 자제할 수 있는 능력’(free unwill)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 사람이 자제를 얼마나 했느냐를 가지고 책임을 따질 수 있다고 했다. 지도교수님은 현재 교황의 자문 역할을 맡고 계시다. 이처럼 우리는 과학적으로 증명된 사실을 없다고 할 수는 없다. 과학의 핵심은 자연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다. 마음에 안 든다고 숨겨서는 안 된다. 뇌과학에 있어서는 불편하고 숨기고 싶은 사실들이 많다.”

―또 어떤 것들을 숨기고 싶어 하나.

“숨기고 싶은 또 다른 진실은 우리가 보고 있는 것들이 사실은 보이는 대로 생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 눈에 보이는 세상은 뇌가 계산해 낸 아웃풋(결과물)이다. 고양이는 컬러를 못 보니 흑백으로 세상을 본다. 박쥐는 세상을 초음파로 본다. 초음파로 보는 세상은 어떨까 인간은 상상할 수 없다. 세상이 지금 우리 눈에 보이는 대로 있는 게 아니고 뇌가 만들어낸 것이라면, 인간들 간의 소통이 가능할까? 인간 각자가 뇌도 다르고 유전자도 다르고 경험도 다를 텐데. 이런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우리는 사과를 보고 ‘빨갛다’고 말을 하지만 빨간색에도 복잡한 패턴과 색깔이 있다. 문제는 언어의 해상도가 생각의 해상도보다 더 낮다. 그래서 언어로는 빨갛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결국 ‘빨간사과’라는 말로 표현하고 서로 이해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요즘 소통을 강조하는데 인간의 소통이라는 게 굉장히 한정된 것일 수밖에 없군요.

“개인적으로 소통은 언어로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동일한 경험을 통해 소통하는 것이 그나마 나은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외계인의 경우 경험한 것이 다르고 개념이 다른 만큼 소통이 불가능하다. 사실 소통을 말로 하면 착각만 커질 뿐이다. 비슷한 경험을 했을 때 소통이 된다. 인공지능 연구에서도 이 문제가 가장 큰 이슈다. 50년에서 100년 후에 인공지능이 발달해서 생각하는 기계가 나왔는데 그 기계가 생각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나. 그래서 엘렌 튜링이라는 과학자가 인간과 기계를 구분하는 튜링테스트를 만들었다. 생각해보면 인간끼리도 정신이나 자아를 증명할 방법이 없다. 이 세상에서 정신이 있다는 것은 자기 자신밖에 모른다. 상대방의 머릿속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지금은 인간을 존엄한 존재로 간주하고 인간끼리는 믿어주고 있다. 그러나 인간처럼 생각하거나 인간보다 뛰어난 기계가 나오면 인간과 기계를 구분하지 못할 수 있다. 이처럼 뇌과학에서는 철학적인 질문이 계속 나오고 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우리에게 선택의 자유란 있는가, 우리가 보는 현실이 정말 현실인가, 소통은 가능한가. 이런 문제들에 대해 실험을 통해 검증하고 있다.”

―뇌과학이 소통에 대해 제기하는 근본적인 문제제기는 사회과학적으로도 상당한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인간은 같은 공동체에 소속돼 있으니 그나마 소통이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와 일본사람은 서로 뇌가 다르기 때문에 생각하는 것도 다를 수밖에 없다. 뇌를 연구해보면 뇌 안에 있는 10의 11승 되는 엄청난 신경세포들이 있고 이 세포들이 다른 신경세포들과 연결돼 있다. 그런데 태어날 때는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는 큰 고속도로 정도의 기본적인 연결만 이뤄진 상태다. 부산에서 다시 시내로 이어지는 길은 만들어져 있지 않다. 태어나서 여러 가지 경험을 통해 연결이 만들어진다. 모든 동물들에게는 ‘결정적 시기’라는 게 있다. 오리는 태어나서 몇 시간, 원숭이는 태어나서 1년, 사람은 태어나서 10∼12년 정도가 결정적 시기다. 이 기간에는 뇌의 연결이 형성된다. 자주 사용되는 회로망은 살아남고 사용 안 하면 리사이클 해버린다. 그래서 자신이 살아가는 환경에 적합한 인간형이 만들어진다. 나는 태어나서 11년간 한국에 살다가 독일로 갔다. 결정적 시기에 한국에서 산 셈이다. 그래서 외국에 있다 한국에 오면 뭔가 모르게 편하다. 그래서 고향이라는 게 제일 편한 것이다. 고향의 환경이 바로 나의 뇌를 만든 환경이다. 크게 고민하거나 생각할 필요가 없는 최적화된 환경인 것이다. 따라서 국제적으로 대화를 나눌 때는 서로 싸울 필요가 있는 이슈와 싸울 필요가 없는 이슈가 있다. 어떤 사안에 대해서 한국사람은 이렇게 생각하는 게 당연하지만 일본사람은 전혀 다르게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다. 이런 이슈는 싸울 필요가 없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토론이 안된다.”

―12세까지면 초등학교 교육을 마칠 때까진데 그때면 뇌가 거의 형성되나.

“그래서 초등학교 선생님들이 대학교 교수들보다 월급을 많이 받아야 한다고 본다. 어린이들의 뇌를 만들어주는 게 초등학교 교사다. 학교에서 가르쳐주는 커리큘럼을 바꿔야 한다. 어렸을 때 교육은 평생 바꾸기 어렵다. 특정 이념이나 특정 종교, 정치적 성향 같은 것은 집어넣으면 바꿀 수 없다. 그래서 뇌가 유연성이 높은 시기에는 수학, 물리와 같은 변하지 않는 진리를 먼저 가르치고 역사, 사회, 윤리 등의 개념은 나중에 가르쳐야 한다. 어렸을 때 이런 것을 가르쳐 놓으면 사고가 자유롭지 못하다.”

―결정적 시기가 지나고 나면 뇌가 거의 변하지 않나.

“동물에게는 결정적 시기가 한 번밖에 없는데 사람에게는 결정적 시기가 여러 번 있을 것으로 본다. 태어나서 10∼12년에는 언어적으로 결정적인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뇌는 계속 변한다. 언어 관련 뇌의 연결이 완성됐어도 뇌 앞쪽은 여전히 미완성이다. 뇌 앞쪽인 전두엽은 성격과 독립성 등을 좌우하는데 17∼19년쯤 되면 전두엽이 완성된다고 본다. 이때 사회성도 결정된다. 성인의 나이를 18∼21세로 정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나이가 들면 시간이 빨리 가는 것 같다고들 한다. 그런데 그게 단순히 그런 느낌이 아니라 과학적 근거가 있다고 하던데.

“인간이 가진 많은 착시 중의 하나가 시간의 흐름에 대한 착시다. 다들 같은 세상을 사는데 나이가 먹으면 시간이 빨리 지나가는 것 같은 이유는 나이가 먹으면 먹을수록 뇌의 정보 전달속도가 느려지기 때문이다. 정보를 빨리 전달하면 세상을 더 자주 볼 수 있다. 즉 같은 시간에 어린 사람들은 10∼20번 세상을 보는데 반해 나이가 든 사람들은 1∼2번만 볼 뿐이다. 그러니 같은 시간이라도 나이가 들면 휙휙 지나가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나이가 어린 사람들은 세상을 슬로모션으로 보는 셈이고 늙은 사람은 기억에 저장되는 영화필름의 프레임이 나이가 들수록 줄어드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신경세포의 정보전달 속도를 높여주는 약을 개발 중이다. 약이 개발되면 나이가 들어도 시간이 가는 속도가 느려질 수 있다. 물론 약이 없는 상황에서도 정보전달 속도를 빨리해 시간의 흐름을 늦출 수 있다. 가장 간단한 방법이 커피를 먹는 것이다. 그런데 커피 효과는 3분에 불과하다. 집중하면 정보전달 속도가 빨라진다. 그러나 역시 한계가 있다.”

―좀 더 장기적으로 효과를 볼 수 있는 방법이 없나.

“세상에 불만스러운 부분이 있는데 내가 태어났을 때 이미 세상이 있었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태어난 순간 게임의 법칙이 이미 정해져 있었고 나는 내가 정하지도 않는 게임의 룰에 최적화되기 위해 노력을 한다. 결국 세상이 갑이고 우리는 세상에 맞춰 살아야 하는 을이다. 뇌과학에서 인생의 갑이 되는 방법은 지금 이 순간 ‘지금의 나’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10∼20년 후의 미래의 나’로서 ‘지금의 나’를 상상하는 것이다. 그러면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되고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게 돼 정보전달 속도를 높일 수 있을 뿐 아니라 집중과 선택을 통해 나중에 내가 기억할 인생에서 괴로운 것과 즐거운 것의 길이를 조절할 수 있다.”

―갑을 관계의 세상 속에서 어떻게 행복을 추구할 수 있나. 아니 뇌과학의 입장에서 행복이라는 것은 뭔가.

“매시 슬로는 인간의 욕구를 식욕, 안전, 사랑, 자긍심, 인정받는 것, 자아실현으로 구분했다. 사회마다 조금씩 다르겠지만 자아실현의 욕구 쪽으로 가야 한다. 내가 누구고 내가 원하는 게 뭔가를 남에게 피해주지 않으면서 실현할 수 있는 것이 행복이다. 갑을 관계에서 을이 돼서 갑이 원하는 대로 잘 사는 것은 ‘만족감’을 줄 수 있지만 ‘행복’은 아니다. 행복은 나 자신이 나에게 내준 숙제를 잘했을 때 오는 것이다. 자신이 인생의 갑이자 주인공이 돼야 한다. 내 인생에서 내가 조연이 될 필요는 없다.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 이미 정해진 게임의 법칙을 만나고 뇌도 거기에 최적화되지만 동시에 함께 살고 서로 소통하면 주어진 틀을 극복할 수 있다. 그래서 혼자 사는 것보다 함께 사는 것이 자아실현에 도움이 된다. 독서를 하는 것은 남의 삶을 경험하고 소통하는 것으로 역시 자아실현에 도움이 된다.”

―뇌과학의 발달로 인공지능이 개발된 미래가 결코 밝지만 않다고 했는데 어떤 위험이 있나.

“인공지능을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50∼100년 안에 강한 수준의 인공지능이 개발될 것으로 본다. 약한 수준의 인공지능은 빠르면 20년 후에도 가능할 것이다. 약한 인공지능은 정보를 이해하는 능력이 생기는 것으로 이 세대를 ‘2차 기계혁명’이라고 한다. 1차 기계혁명의 핵심은 사람의 육체적 노동력을 대체한 것이었다. 그런데 2차 기계혁명에서는 인공지능이 우리의 인지능력을 대신한다. 인간이 훨씬 자유로워지고 부자가 될 것이라고 낙관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반드시 그렇지 않을 수 있다. 기계는 지치지 않고 기억력도 무한대다. 결국 2차 기계혁명에서는 기계가 인간을 이길 수 있다. 그래서 인공지능이 개발되면 전사회적으로 50%가 일자리를 잃게 될 수 있다. 그런데 이것도 약한 인공지능이 개발됐을 때 이야기다. 만약 지능과 자율성을 가진 강한 인공지능이 개발되면 기계가 인간을 뛰어넘게 된다. 지금까지는 지구에서 인간이 가장 똑똑해서 갑이었다. 그런데 기계가 지구의 갑이 되면 모든 것을 자기 위주로 해석하기 시작할 것이다. 지금까지 지구에서 인간의 존엄은 절대적인 것으로 설정돼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설정한 것은 인간이다. 인간의 존엄은 기계에게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기계가 봤을 때 인간은 논리적이지도 않고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다. 결국 기계가 인간을 없애버려야 할 존재로 볼 수 있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기계가 인간을 전염병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노벨상의 산실이라는 연구소와 대학에 재직했는데 연구환경에 어떤 차이가 있나.

“우리나라도 하드웨어 측면에서는 결코 선진국에 뒤지지 않는다. 교수들도 학생들도 모두 똑똑하고 연구시설도 좋아졌다. 모든 것을 갖춰 놨는데 맛있는 음식이 안 나오는 환경이다. 그 이유는 연구를 못 하게 한다는 것이다. 연구할 시간에 연구하는 보고서를 쓰고 그래서 연구가 잘 안 되면 또 연구를 왜 못하는지에 대한 보고서를 쓰게 한다. 만약 연구비를 지원하고 10년만 가만히 내버려두면 노벨상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건 마치 공부하려고 책상에 앉아 있는데 5분마다 들어와서 왜 1등 못하냐고 채근하는 식이다. 기업은 더 심하다. 매일 보고서를 써야 한다. 그러다 보니 보고서에 쓸 내용이 없다는 보고서를 써야 할 판이다. 또 많은 연구자들과 학생들이 용기가 없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사실 실패를 안 한다는 것은 중요한 문제를 안 풀고 있다는 것이다. 과학자로서 평생 실패를 안 했다는 것은 아무것도 새로운 것을 안 했다는 의미다.”

―창조경제가 화두인데 어떤 정책적 대안이 필요한가.

“우리나라의 문화에 최적화된 뇌를 가진 애들이 대학에 들어오면 손 볼 여지가 거의 없다. 질문하면 안 되고 남의 말 듣는 게 미덕이고 실패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애들 데려다 놓고 창조경제하라고 해봐야 안 된다. 가장 창조적인 5%는 어떤 교육을 받든 창조적으로 행동한다. 이들은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 가장 좋다. 모차르트와 스티브 잡스는 그냥 천재고 돌연변이로 모방할 수 없다. 모방해봐야 못 따라가기 때문에 ‘잡스만들기 프로젝트’ 같은 것은 그야말로 난센스다. 반대로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5%도 있다. 문제는 노력하면 되는 90%는 어떻게 할 것인가다. 비창조적인 것으로 세팅된 애들의 뇌를 리셋시키는 방법이 필요하다. 지금 우리나라는 공교육과 사교육에 수십조 원을 투자할 텐데 그중 일부를 잘라서 고등학교 졸업한 모든 애들에게 1년 동안 세계여행을 시켜주는 것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러면 시야가 넓어지면서 뇌가 창조적으로 리셋될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인터뷰 = 박민 사회부장 minp@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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