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4일(일) 제 14차 박자세 국내학습탐사지로 선정된 민자연사연구소입니다.


한국판 스미스소니언박물관,  민자연사연구소


희귀광물 약 3000점을 모아 전시 중이라는 건 사전 취재를 통해 알고 있었지만 ‘과연 얼마나 대단할지’는 사실 직접 들르기 전엔 감이 잘 오지 않았다. 기자는 더군다나 이번 여름 유명한 영국 자연사박물관을 다녀왔다. 그렇게 민자연사연구소에 도착해 첫발을 들이는 순간. “대단하다”는 감탄사가 저절로 터져 나왔다.

 

“희귀광물 원석을 3000점 이상 모으면서 여태껏 한 점도 판 적이 없습니다. 하나라도 팔게 되면 그 후로는 더이상 수집가가 아니라 ‘딜러’죠.”


지난달 17일 경기 성남시 중원구 상대원동 민자연사연구소를 찾았다. 33년 동안 희귀원석을 수집한 이지섭 삼성전자 전 부사장이 개인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비영리 연구소다. 어두운 조명 속에서 발광다이오드(LED)의 불빛을 받고 있는 그의 수집품들은 광물 표본이 아닌 자연의 예술품이었다.

 

이 소장은 2011년 4월 사재를 털어 496㎡(약 150평) 전시 규모의 민자연사연구소를 차렸다. 자연사연구소 앞에 붙이는 ‘민’은 광물을 뜻하는 영어 ‘미네랄(mineral)’의 앞 세 글자(min) 또는 둘째 아들 이름 중 한 글자인 민(玟·옥돌)을 뜻한다고 한다. 예약제로 운영되고 있는 연구소는 한 달 유지비만 약 500만 원이 든다. 월세와 관리비 외에도 이 소장이 애지중지하는 희귀광물표본의 도난을 막기 위한 비용이 포함됐기 때문이다.

 

 

이지섭 전 부사장이 운영하는 민자연사연구소 내부 모습. - 이우상 기자 제공
이지섭 전 부사장이 운영하는 민자연사연구소 내부 모습. - 이우상 기자 idole@donga.com 

 

●월급의 절반을 ‘돌’에 쏟아 붓다


그는 모은 표본을 단 한 개도 팔아 본 적이 없는 ‘뼛속까지 수집가’다. 이 소장의 이색 취미가 시작된 것은 1981년 삼성전자 과장 때 다녀온 미국 출장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당시 뉴욕 자연사박물관에서 만난 희귀광물의 아름다움에 반하고 말았다.

 

“거기서 본 표본들은 대학 때 금속공학을 공부하며 봐왔던 차가운 광물표본과는 전혀 달랐어요. 가공되지 않은 원석이야말로 자연이 만든 천연 예술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죠. 당장 기념품점을 들러 제 첫 수집품을 구매했습니다.”

 

그의 첫 수집품은 ‘쌍둥이 눈사람’ 모양의 마노다. 마노는 석영과 옥수가 혼합된 보석이다. 이 소장은 당시 60달러를 주고 첫 수집품을 샀다. 1980년도 당시 환율과 물가를 고려하면 결코 값싼 기념품은 아니었다.

 

이 소장의 컬렉션은 그가 해외출장을 나갈 때마다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 소장은 연 8~10회 해외출장을 나가 50여 개국을 돌아다니며 짬이 날 때면 광물시장이나 광산 인근 지방에서 표본을 구했다.

 

“계산해 보니 매달 월급의 절반 이상을 광물을 구하는 데 썼습니다. 이 때문에 당연히 아내와도 갈등이 컸죠. 아내가 말리지 않았다면 정말 길에 나앉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 않게 해준 아내에게 고맙죠.”

 

● 수집가의 조건은 열정과 경제력, 그리고…


그런데 월급의 절반을 광물을 모으는 데 쓴 이 소장도 종종 눈앞에서 아른거리는 ‘아쉬운  인연’이 있다. 1980년대 중반 미 콜로라도 주 덴버로 출장 갔을 때 그는 인근 스위트홈 광산에서 5~6cm 크기의 능망간석과 마주쳤다. 하얀 수정 위에 빨간색으로 꽃을 피운 듯한 이 원석 표본은 이 소장의 눈을 사로잡았지만 가격이 문제였다.

 

“가격이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선뜻 지불하기엔 당시 주머니 사정상 무척 비쌌어요. 그때 머릿속에서 온갖 계산들이 스쳐갔죠. 무리를 해서라도 살까, 아니면 나중에 좀 더 좋은 표본을 더 좋은 가격으로 살 수 있진 않을까. 결국 다음에 사자고 스스로를 설득했죠. 하지만 그 이후로 그보다 더 아름다운 표본을 본 적이 없어요. 수집가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인연’이라는 걸 뒤늦게 다시 깨달았죠.”

 

이 소장이 꼽는 ‘수집가의 조건’은 3가지다. 수집품에 관심을 갖는 열정과 수집품을 손에 넣기 위한 ‘경제력’, 마지막으로 ‘인연’. 이 소장의 표현을 빌리자면 광물 표본은 세상에 똑같은 것이 있을 수 없는 자연이 만드는 예술품이다. 표본을 구성하는 원소의 비율, 만들어진 환경, 조건 등이 똑같을 수가 없기 때문에 모든 표본은 저마다의 특징과 개성을 갖는다. 그만큼 상위 1% 품질(미적인 기준)의 표본을 만나기 위해선 인연이 중요하다. 고흐와 피카소가 그린 그림이 유일무이하듯 한 번 기회가 왔을 때 놓쳐버리면 그 인연은 다시 만날 수 없다.

 

이런 점은 인터뷰 중 그가 줄곧 수집한 광물의 개수가 중요하지 않다고 강조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훌륭한 ‘예술품’이 아니라면 그 개수가 아무리 많아도 큰 의미가 없다는 뜻이다.

 

“눈곱만 한 다이아몬드 10개와 1캐럿의 다이아몬드 1개. 어느 것이 더 귀할까요?”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생생한 화석이 포함된 암석 전시물 - 이우상 기자 제공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생생한 화석이 포함된 암석 전시물 - 이우상 기자 idol@donga.com
 

 

● ‘아름답다’라는 광물의 원초적인 매력


뜻밖에도 이 소장의 컬렉션 중 20%는 아내와 두 아들이 모은 것이다. ‘생계의 위협’까지 느끼며 남편의 취미생활을 만류해왔던 아내가 원석 모으기에 동참한 까닭을 이 소장은 ‘원석의 아름다움’이라는 원초적인 매력에서 찾는다.

 

“아무래도 집에 있는 원석 표본들의 청소 같은 관리를 아내가 해주었는데, 그 과정에서 제 아내도 광석의 아름다움을 보는 눈이 생겼죠. 두 아들은 ‘조기교육’ 덕분이랄까요? 어렸을 적부터 희귀하고 예쁜 원석들을 보고 자랐으니 자연스레 광물 보는 눈을 떴습니다.”

 

광물을 보는 눈이 생겼으니, ‘인연’의 소중함도 덩달아 알게 됐다. 이 소장의 아내는 고품질의 원석을 보면 남편에게 ‘지르라(구매하라)’고 귀띔을 해주고, 두 아들은 직접 구매해 아버지에게 선물한다고 한다.

 

그렇게 이 소장의 가족은 그가 강요하지 않아도 가족 전체가 원석의 아름다움에 사로잡혔다. 그런데 이 소장은 원석의 이 원초적인 매력을 다른 데도 이용할 생각이다. 자연과학의 재미를 모르는 대중과 청소년에게 흥미를 자연스럽게 불러일으키고자 하는 것이 그의 야심이다.

 

●스미스소니언박물관 부럽지 않은 자연사박물관 만들고파

“금, 은, 다이아몬드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없잖아요? 아름다운 원석 표본들을 보다 보면 누구나 ‘이건 무슨 원소로 이뤄졌을까’ ‘어떻게 이렇게 신기한 빛깔과 결정 모양이 만들어지게 될까’ 등을 궁금해 하며 자연과학의 매력에 빠질 수 있으리라 믿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이 소장은 단순히 예쁘고 아름다운 원석만 모으지 않았다. 그의 꿈은 그가 모은 광물들로 훌륭한 자연사박물관을 만드는 것이다.

 

“지구상에 원소는 현재 118종 정도가 알려져 있고, 이 원소들이 결합해 4300여 종의 광물이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이 4300종은 크게 250종으로 나눌 수 있죠. 저는 우선적으로 250종의 광물 표본을 빠짐없이 모으는 데 애를 썼습니다. 그래야 박물관을 찾으시는 분들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류의 광물을 보고 갈 수 있으니까요.”

 

실제로 미국 스미스소니언박물관, 영국 자연사박물관 등 유명 박물관을 가도 250종의 광물을 모두 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국내 서대문자연사박물관에는 50여 종의 광물만이 상설 전시돼 있다.

 

“좋은 기회가 온다면 국내에서 좋은 자연사박물관이 만들어질 때 돕고 싶습니다. 그 전이라도 특별전시회 등으로 먼저 선을 보일 수도 있겠죠.”

 

이 소장은 그가 모은 표본이 다양할 뿐 아니라 미적으로도 매우 아름답다는 데 자신감을 내비쳤다. 과학자의 눈으로 보면 똑같은 석영, 능망간석이라도 ‘아름다움’이란 기준을 더해 모은 그의 수집품은 대중에게 더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중고등학교 과학실에서 만져 본 ‘모스굳기계 광물 키트’를 떠올려보면 그 의미를 새삼 알 수 있다. 탄산칼슘으로 이뤄진 같은 방해석이라도 이 소장이 모은 방해석이 결정 모양이 더 크고 투명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럼에도 그는 ‘기증’이라는 말을 꺼내는 데는 조심스러운 눈빛이었다.

 

“지금까지 모은 걸 팔아서 큰돈을 벌겠다는 생각은 조금도 없어요. 하지만 아무 데나 쉽게 기증하고 싶지는 않아요. 자칫하면 수집품의 가치가 훼손될 수 있거든요. 정말로 소중하게 다뤄줄 수 있는 곳에 기회가 닿으면 심사숙고해서 결정하려고 합니다. 제가 뼛속까지 수집가다 보니 어쩔 수가 없네요. 허허.”

 

● 수집에는 끝이 없다

커다란 박물관에 원석 표본들을 기증하진 않았지만 그는 이미 우리나라 자연과학 대중화에 기여하고 있다. 민자연사연구소를 찾으면 이 소장이 나서서 직접 모든 전시물에 대한 히스토리와 과학적인 유래를 설명해준다. 이곳을 찾은 기자도 이날 한 시간 넘게 이 소장을 쫓아다니며 원석들에 대한 강의를 들었다. 힘들지 않느냐고 묻자 이 소장은 “설명하는 것 또한 제가 좋아서 하는 취미활동의 일부”라고 대답했다.

 

그는 최근 블로그(www.naturehistory.com)도 시작해 광물에 관한 이야기를 누리꾼에게 털어놓고 있다. 그는 이제 광물 수집가뿐 아니라 광물 전문가라 불러도 모자람이 없다.

 

“움직이지 못하는 날이 올 때까지 원석들을 모으고 싶어요. 수집에 끝은 없죠. 저는 수집가니까요.”

 

 

 

이지섭 전 삼성전자 부사장 - 이우상 기자 제공
이지섭 전 삼성전자 부사장 - 이우상 기자 ido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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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섭 민자연사연구소 소장 | “아름다운 원석에 빠진 35년, 휘황찬란하죠!”
기사입력 2015.02.06 16:4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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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돌은 태고 적부터 모든 이들에게 수집의 대상이었다. 반짝이는 금과 은, 그리고 절정의 투명함을 뽐내는 다이아몬드와 화려하고 찬란한 색상의 사파이어와 호박 등 이른바 ‘보석’으로 불리는 이들 역시 바로 광물로 불리는 ‘돌’이었다. 

이런 광물을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수집해 온 이가 있다. 국내 최대의 기업이자, 글로벌 기업으로 세계에서 한국의 위상을 높여온 삼성전자 출신의 이지섭 민자연사연구소 소장이 바로 주인공이다. 



그는 삼성전자 시절부터 지금까지 35년에 걸쳐 세계 각국의 다양한 광물을 수집해왔다. 그리고 2010년 퇴임 이후 그동안 모아온 광물들을 정리해 대중에게 공개했다. 민간으로는 국내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민자연사연구소’가 바로 그곳이다. 

민자연사연구소에는 현재 1000여 점의 광물과 희귀 원석이 전시돼 있다. 150여 평 남짓한 공간을 활용해 각종 원석과 보석, 그리고 화석에 이르기까지 광물의 모든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광물과는 전혀 다른 형형색색의 컬러와 다양하고 신비로운 모습의 광물들을 위주로 전시돼 있어 ‘아름답다’는 표현이 잘 어울린다. 



우연히 들른 자연사박물관에서 원석에 빠지다 

“아름답죠. 이처럼 다양한 색상을 가졌지만, 실제로는 구리원석의 한 종류입니다. 다양한 종류의 광물과 원소가 여러 가지 조건에서 결합해 휘황찬란한 색상과 다양한 모습으로 결정을 생성하는데, 이게 바로 광물 수집의 숨겨진 재미라고 할 수 있죠.” 이지섭 민자연사연구소 소장은 희귀 원석과 광물의 매력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는 자연과 시간이 만들어낸 예술품이란 점에서 희귀 원석과 광물은 그 어떤 예술작품보다 더 가치 있다고 강조했다. 

그가 희귀 원석과 광물의 매력에 빠지게 된 계기는 우연이었다. 삼성전자 과장 시절 바이어와 미팅을 끝낸 후 남은 시간을 활용해 우연히 들른 뉴욕 자연사박물관에서 평생의 업이 될 희귀 원석과 광물을 만났기 때문이다. 

“삼성전자에서 근무하던 당시 저는 새로 개발한 전자레인지의 품질관리를 위해 전 세계를 다녔습니다. 그러던 중 1981년 뉴욕에서 바이어와 미팅을 마치고 남은 시간에 뉴욕 자연사박물관에 가게 됐죠. 그곳에서 희귀 원석과 광물을 처음 접했습니다. 제가 금속공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원석들과 광물을 책으로 봐왔지만, 박물관에 전시돼 있던 원석과 광물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습니다. 이후 해외 출장을 갈 때마다 한두 개씩 사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그는 삼성전자에서 근무하며 세계 각국을 다닐 수 있었다는 점이 희귀 원석 및 광물 수집에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당시 저희가 개발한 전자레인지는 OEM(주문자 상표 부착 제품)이긴 했지만, 미국과 일본에 이어 전 세계 세 번째로 개발한 제품이었습니다. 또 품질이 워낙 좋아 GE를 비롯한 글로벌 기업들의 수요가 높았습니다.(실제 삼성전자의 전자레인지는 한때 글로벌 점유율 20%를 넘기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전 세계로 수출됐고, 그 과정에서 세계 각국을 다닐 수 있었습니다. 업무 때문에 세계 곳곳을 누빌 수 있었기에 다양한 희귀광물과 원석을 수집할 수 있던 거죠.” 

이런 방식으로 수집한 그의 희귀 원석과 광물은 3000여 점에 달한다. 개인이 수집한 것으로 여기기에는 방대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다. 그렇다면 비용은 얼마나 들었을까. 그는 정확한 액수는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희귀 원석과 광물 수집에 집중하다보니 노후 준비도 제대로 못했어요. 그래도 연구소 와서 원석들을 보고 있으면 저절로 마음이 푸근해집니다. 원석 수집에 매달리다보니 비용 문제로 아내와 가족들의 만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내가 제가 회사에서 퇴근하고 집에 와 원석을 보고 미소 짓는 걸 보더니 허락해 줬습니다. 이후에는 아내와 자녀들도 원석 수집에 일조했죠. 여기 모인 원석과 창고에 보관 중인 원석 중 일부는 제가 아닌 아내와 가족들이 사서 선물로 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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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귀 원석 수집은 인연을 찾는 것 

35년의 세월 동안 전 세계 각지에서 희귀 원석과 광물을 수집해 온 그는 아직까지 모은 원석과 광물을 판 적이 없다. 어렵사리 수집한 것도 이유 중 하나겠지만, 보유 광물을 팔게 되면 이익을 보기 위해 원석과 광물을 수집하는 ‘딜러’로 비쳐질까 염려하기 때문이다. 

“이곳에 있는 원석과 광물은 1000여 점 정도 됩니다. 전시하지 못한 원석과 광물은 창고를 임대해 그곳에 보관하고 있습니다.” 

방대한 규모의 원석과 광물을 수집한 그의 첫 번째 컬렉트(수집품)는 어떤 것일까. 그는 ‘쌍둥이 눈사람’ 모양의 마노를 가리켰다. 

“뉴욕 자연사박물관을 나와 곧바로 인근의 기념품점에 들렀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60달러를 주고 샀죠. 1980년대 초반에 60달러면 상당히 높은 가격의 기념품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가장 애착이 가는 원석은 어떤 것일까. 그는 여기 있는 모든 원석이라고 답했다. 

“희귀 원석이나 광물은 수집자들과 묘한 인연이 있는 것 같아요. 1980년대 중반 정도에 하얀 수정 위에 빨간색 꽃처럼 피어난 능망간석을 보고 매입하려 했는데, 결국 가격문제로 포기해야 했습니다. 나중에 돈을 모아 사야겠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지금까지 그처럼 예쁜 능망간석은 다시 볼 수 없었습니다. 반면 1980년대 후반에는 돈이 없었는데도 일단 멋진 원석을 보자 구입하겠다고 했습니다. 부족한 돈은 친분이 있던 네덜란드 수집가에게 빌렸죠. 나중에 다른 수집가들이 그 원석을 사지 못해 후회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나중에서야 희귀 원석 수집도 인연을 찾는 것처럼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연이 닿아야 좋은 원석과 광물을 만날 수 있는 거죠.” 

어렵사리 찾은 인연처럼 희귀 원석과 광물에 대한 사랑이 깊은 만큼 그는 보관과 전시에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일단 150여 평 남짓한 민자연사연구소의 곳곳에는 CCTV와 센서가 자리해 있다. 단순한 아름다움을 넘어 높은 가치를 가진 희귀 원석과 광물들을 모아놨기 때문에 보안에 상당히 애를 쓰고 있다는 설명이다. 

여기에 전시된 원석과 광물들은 모두 LED 조명의 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다. 그 자체로도 충분히 아름답지만, LED를 통해 더욱 화려하고 휘황찬란한 빛을 내야 원석과 광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질 것이란 게 그의 설명이다. 

기초과학 증진 위해 광물표본 만들어 

“제가 가진 원석과 광물은 많지만, 이를 전시할 공간이 부족한 게 아쉽습니다. 아름다운 광물과 원석을 보면 자연과학에 대한 관심도 늘어날 텐데. 아직까지 혼자 힘으로 진행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습니다.” 

그는 자신이 보유한 희귀 원석과 광물을 전시하고 싶다고 말했다. 지금 운영 중인 민자연사연구소가 아닌 대규모의 전시공간에서 화려하고 아름다운 원석과 광물을 볼 수 있게 되면 자연과학에 대한 관심 역시 자연스레 높아질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아직도 자연과학에 대한 투자가 부족한 편입니다. 특히 학생들이 자연과학을 고리타분한 것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아요. 하지만 선진국들을 보면 자연과학에 많은 투자를 하고 있고, 학생들도 이곳에 높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제가 민자연사연구소를 통해 그동안 수집한 원석과 광물을 공개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자연과학이 발전해야 연관 산업의 경쟁력이 높아지고, 그래야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높은 경쟁력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지난해부터 광물표본 제작에 집중하고 있다. 최종목표인 자연사박물관 건립 이전에 자연과학에 대한 관심을 북돋아야 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현재 지구상에는 약 118종의 원소가 있습니다. 이 원소들이 결합해 4300여 종의 광물이 만들어지죠. 하지만 이 광물들은 다시 250종으로 나눠집니다. 그래서 우선적으로 이 250종의 광물 표본을 모아 도감제작을 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광물 도감을 보고 아름다운 원석을 봤을 때 더 큰 감동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글로벌 기업의 CEO로 일하면서도 희귀 원석 및 광물 수집에 30년이 넘는 세월을 투자한 이지섭 민자연사연구소 소장. 희귀 원석과 광물만 있으며 여전히 눈이 반짝거리는 그에게서 아직도 젊은이의 열정과 패기가 느껴진다.

 
이지섭 민자연사연구소 소장 1974년 삼성그룹 공채 14기로 입사해 2010년 퇴직까지 무려 36년 동안 삼성맨으로 근무했다. 초기 5년의 제일모직 근무를 제외하면 1979년부터 31년간 삼성전자에서 일했으며 삼성전자에서 최초로 전자레인지를 개발했다. 이후 존폐 기로에 있던 컴퓨터 사업부문을 맡아 부활시켰으며, LCD 사업부문을 담당해 세계 1위에 오르는 등 삼성전자의 발전사를 모두 겪은 뒤 2010년 부사장으로 퇴직했다. 


현재 성남시 상대원동에서 민자연사연구소를 운영 중이며, 호서대 객원교수로도 활동하고 있다. 


[서종열 기자 사진 정기택 기자]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53호(2015년 02월) 기사입니다]




시리즈를 시작하며

삼성전자에는 ‘전자사랑모임(e-CLUB)’이라는 퇴직 임원 중심 커뮤니티가 있다. 삼성전자는 학연·지연 등 특정 계파 중심의 분파 활동을 사내 법규로 엄격하게 금하고 있지만, 전자사랑모임은 예외다. 1999년 결성된 이 모임에는 670여 명의 퇴직 임원이 활동 중이고 점점 활성화되고 있다.

친목 모임을 표방한 이 커뮤니티를 주목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이 모임의 회원 한 명 한 명에게는 1969년 창립해 세계 굴지의 기업으로 우뚝 서기까지 45년간의 삼성전자 성공 드라마가 녹아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삼성전자를 있게 한 요체는 무엇이며,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한 보완점이 있다면 무엇일까. 전자사랑모임 멤버 4인이 말하는 삼성전자의 과거와 미래를 오늘부터 4주에 걸쳐 연재한다.

 

경기 성남시 중원구 상대원동에 위치한 민자연사연구소 입구. 그가 30여 년간 수집한 희귀 광물 1000여 점이 전시돼 있다▲ 경기 성남시 중원구 상대원동에 위치한 민자연사연구소 입구. 그가 30여 년간 수집한 희귀 광물 1000여 점이 전시돼 있다

“36년간 근무한 ‘뼛속까지 삼성맨’
이제까지의 성공은 잊어라… 소비자 감성 읽는 ‘감성경영’이 숙제”

이지섭 전 삼성전자 부사장은 무려 36년간 삼성맨으로 살았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1974년 삼성그룹 공채 14기로 입사해 2010년 63세의 나이로 퇴직했다. 초기 5년 제일모직 근무 기간을 빼고 1979년부터 31년간 삼성전자에서 일했다. 삼성전자의 발전사를 온몸으로 겪어낸 산증인이라 할 만하다.

삼성전자가 흑백 TV를 만들던 시절 입사해 전자레인지를 처음으로 생산하고, OEM(주문자상표부착방식)으로 제품을 만들던 이름 없는 회사가 당당히 세계무대에 이름을 알리고, 존폐 기로에 있던 컴퓨터 사업이 우여곡절 끝에 부활하게 된 결정적 순간마다 그는 한가운데에 있었다.

 

삼성전자 45년 역사 중 31년간 근무

경기 성남시 중원구 상대원동에 있는 ‘민자연사연구소’에서 이 전 부사장을 만났다. 퇴직 후 오랜만의 인터뷰라는 그에게서는 설렘과 열정이 전해졌다. 인터뷰 전, 여러 차례 관련 자료를 보내고 끝난 후에도 추가 자료를 보내는 과정을 통해 철두철미함을 엿볼 수 있었다. 30여 년간 삼성전자 제조 현장 지휘자로서 몸에 밴 방식이었다.

민자연사연구소는 그의 오랜 꿈이 이루어진 공간으로, 온갖 희귀 광물과 화석들을 전시한 박물관이다. 30여 년 전부터 출장길에 오를 때마다 한 점 두 점 수집한 광물이 3000점에 이르는데, 그중 1000여 점을 전시했다. 연구소 명칭은 둘째 아들 이름 ‘민(玟·옥돌)’ 자와 광물을 뜻하는 ‘미네랄(mineral)’에서 따 왔다.

고만고만한 개인박물관을 상상한 사람들은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그 규모와 수준에 입이 떡 벌어진다. 평범한 광물은 없다. 쉽사리 만나기 힘든 희귀 광물만 엄선했다. 노랑, 빨강, 초록, 파랑의 형형색색 광물 결정체들은 자연 그대로라고 하기엔 믿기 어려울 만큼 눈부시게 아름답다. 지질박물관 등에서 본 광물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너비 3m, 높이 2m에 이르는 고생대의 해백합(海百合) 화석이며 모양이 완벽하게 보존된 게·거북이·공룡알 화석 등 사진으로조차 만나기 힘든 실물 화석들도 있다. 그의 수집 광물은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수준급이다. 그는 전 세계 희귀 광물 수집가가 모이는 ‘미네랄 컬렉터 심포지엄’의 200여 명 중 유일한 동양인이다. 얼마 전엔 DDP(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디자인, 자연에서 답을 찾다’는 주제로 강연도 했다.

광물들과 이지섭 전 부사장. 이곳에 전시된 희귀 광물은 세계적으로도 수준급이다. 그는 ‘미네랄 컬렉터 심포지엄’의 유일한 동양인 회원이다▲ 이곳에 전시된 희귀 광물은 세계적으로도 수준급이다. 그는 ‘미네랄 컬렉터 심포지엄’의 유일한 동양인 회원이다

“1980년 뉴욕 자연사박물관에서 희귀광물을 보고 반해버렸습니다. 금속공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광물에 대한 지식이 많은 편이었지만 차원이 달랐습니다. 정말 화려하고 아름답더군요. 가슴이 뛰었습니다. 그때부터 하나 둘 수집을 시작했고, 퇴직 후 서서히 박물관을 준비해서 얼마 전 오픈했습니다. 이곳은 중간 과정입니다. 용도에 대해서 구상 중입니다. 개인박물관을 차리라는 분이 많지만 정답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이 광물들이 기초과학 연구에 작은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국가나 지방자치단체, 혹은 관련 재단을 가진 큰 기업과 손을 맞잡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이 전 부사장은 퇴직 후 후학 양성에도 열심이다. 호서대학교에서 7학기째 정규 과목을 맡았다. 삼성전자 재직 당시 경험을 살려 ‘기업가 정신’을 주제로 강의하고, 경우에 따라서 취업 상담도 해준다.

 

‘수성’이 아니라 ‘리셋’이 필요한 시점

최근 예년에 못 미치는 삼성전자의 실적을 두고 우려의 시선이 있다. 일각에서는 삼성전자의 위기설을 운운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 이지섭 전 부사장은 “위기는 있기 마련이며 삼성전자는 그때마다 잘 헤쳐나갔다”며 “이번 역시 낙관적으로 본다”고 잘라 말했다. 그에게 “세계 최고 기업의 자리를 수성하기 위해 더 힘쓸 부분이 있다면 무엇이냐”고 묻자 “수성(守成)이라는 말 자체가 맞지 않는다”며 이렇게 답했다.

“삼성전자가 이룬 성과는 대단합니다. 하지만 앞으로 갈 길이 멉니다. 수성이 아니라 ‘리셋(reset)’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지금까지의 성공 방정식은 잊어야 합니다. 성공에 안주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패스트 팔로우(fast follow)였지만 후배들은 퍼스트 무버(first mover)입니다. 우리보다 후배들이 더 힘들 겁니다. 선두주자를 빨리 따라가는 건 오히려 쉽습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선두주자가 더 힘들죠.”

‘감성경영’. 그가 삼성전자를 향해 던진 애정 어린 조언의 요체다. 그는 감성경영의 필요성을 역설하기 위해 긴 논리를 폈다. 감성경영과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있는 경영철학이 바로 ‘합리주의’다. 합리주의는 꼭 필요하지만, 이 시대에 새롭게 요구되는 가치는 ‘감성’이라는 것이다.

고생대 화석 해백합 앞에서 이지섭 전 부사장의 모습.▲ 고생대 화석 해백합 앞에서. 너비 3m, 높이 2m에 이르며 보존 상태가 매우 훌륭하다

 

삼성맨은 ‘너무 합리적’인 게 단점

“‘합리주의’는 ‘사업보국’ ‘인재제일’과 더불어 삼성그룹의 창업이념 중 하나입니다. 이 세 가지에 삼성의 철학이 응축돼 있습니다. 사업보국은 국가와 인류의 차원입니다. 삼성은 단지 돈을 벌기 위해 존재하는 기업이 아닙니다. 틀 자체가 크고 숭고하면 이루려는 열망이 강하고 성공 확률도 높습니다. 인재제일은 말할 것도 없지요. 다 사람이 하는 일이니까요. 합리주의는 정도를 지키면서 무리하지 않는 철학으로, 문제 해결의 나침반 역할을 했습니다.

퍼스트 무버에게 필요한 자질은 탐험가 정신과 창의성인데, 이 두 가지는 삼성의 DNA에 이미 녹아 있습니다. 여기에 덧붙여 필요한 가치는 ‘감성’입니다. 세계의 부(富) 수준은 점점 높아지고 있습니다. 사람은 부유해질수록 본질적 가치로 돌아갑니다. 그것은 바로 아날로그, 즉 감성이지요. 소비자의 감성을 읽지 못하면 앞으로 어려워질 겁니다.

앞에서 언급했던 삼성의 창업이념의 하나인 합리주의 말인데요, 물론 필요하지만 너무 합리적이고 정확한 것만 찾다 보면 감성을 놓치기 쉽습니다. 사실 삼성에 있는 분들은 그게 어렵습니다. 감성경영을 어떤 식으로 해결해 나갈지가 삼성전자의 숙제가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멜트 GE 회장의 감사패와 편지

이지섭 전 부사장은 자타가 공인하는 ‘품질관리의 달인’이었다. 삼성전자 재직 당시 전자레인지, 컴퓨터, LCD 등 여러 사업부를 두루 거치면서 품질 관리와 생산 효율성 향상 분야에서 주목할 만한 성공 사례를 남겼다. 이 성공들은 삼성전자의 비약적 발전의 토대가 됐다. 2010년 퇴직하면서 그는 자신의 경험을 녹여 후배들에게 ‘품질로 승부하자’는 책자를 남겼다. 누가 시키거나 권유한 게 아니라 자발적으로 쓴 것이다. 80페이지 분량의 이 책에서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품질을 강조했다. 불량품이 생겼을 때 피드백 하는 방법, 품질관리의 사각지대 등도 상세히 기록돼 있다. 책자에 있는 몇 문장만 보자.

“전 조직이 명품을 만든다는 확고한 조직 철학이 있어야 한다”

“제조업의 핵심은 낭비 없이 양품(良品) 만들기”

“숙련자와 미숙련자의 차이는 질의 차이가 아니라 속도의 차이여야 한다”

“열심히보다는 가치에 집중하라”

 

하나를 만들어도 오차 없는 완벽한 제품을 만들겠다는 각오, 그 각오를 전 사원이 공유하는 것. 그것이 그가 품질관리 담당으로서 강조한 제조업의 정신이었다. 이 철학은 실적으로 드러났다. 그가 천안 IT센터장으로 재직하던 2005년 당시, TFT(Thin Film Transistor) LCD는 거래업체인 도시바가 실시한 검사에서 불량률 0.01%를 기록했다. 일반적인 불량률이 1%인 점을 감안하면 기적에 가까운 수준이다.

지난 1991년 삼성전자 전자레인지를 납품 받은 제프리 이멜트 제너럴일렉트릭(GE) 회장은 전자레인지사업부에서 컴퓨터사업 부문으로 자리를 옮긴 이 전 부사장에게 “성공을 빈다”는 메시지가 담긴 카드와 함께 직접 감사패를 전달했다. 이멜트 회장은 또한 박경팔 당시 삼성전자 사장에게 “나는 특히 이지섭 부장의 뛰어난 업적에 깊이 감명받았다. 1983년 처음 만난 후부터 그는 품질관리 분야에서 놀라운 능력을 보여줬다”는 내용이 담긴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지구본에 불을 비추고 있는 이지섭 전 부사장. 이지섭 전 삼성전자 부사장은 삼성전자가 흑백 TV를 만들던 시절에 입사해 세계 굴지의 기업으로 거듭나기까지의 성공 드라마를 온몸으로 겪어냈다▲ 이지섭 전 삼성전자 부사장은 삼성전자가 흑백 TV를 만들던 시절에 입사해 세계 굴지의 기업으로 거듭나기까지의 성공 드라마를 온몸으로 겪어냈다

 

“미국·일본에 이어 전자레인지 만드는 나라”

그는 품질관리의 기본을 제일모직에서 배웠다. “제일모직에서 받은 품질관리 교육이 큰 도움이 됐습니다. 삼성은 1970년대부터 사원교육을 잘 시켰죠. 덕분에 생산관리, 품질, 신뢰 등에 대한 개념이 머릿속에 박혀 있었습니다. 또 하나, 주란 박사(Dr. Joseph M Juran)의 책을 밤마다 읽었습니다. ‘품질관리의 바이블’ 같은 책으로 800페이지에 달하는 원서입니다.”

1979년 삼성전자로 옮긴 그는 제품의 원리 하나하나를 지독하게 파고들었다. 당시 삼성전자는 일본 제품을 따라가기에 급급한, 이름 없는 작은 회사였다. 내수용 제품이 대부분이었고 수출용이라고 해도 대부분 중동·아프리카 등 틈새시장이 그 대상이었다.

그가 꼽는 삼성전자 성공의 가장 큰 비결은 바로 ‘발 빠른 시장 진입’이다. 세계 시장의 흐름을 재빨리 읽고 주저 없이 뛰어든 것. 이를 빼고 삼성전자의 성공을 논할 수 없다. “최고 경영자가 미래에 대한 통찰력을 가지고 있어야 가능한 부분입니다. 환경 변화가 있을 때마다 적절한 리더십이 과감하게 개입돼야 하죠.”

전자레인지를 만들 당시도 마찬가지였다. 1970년대 후반, 삼성전자는 전자레인지를 만들 역량이 부족했다. 그럼에도 과감히 제품 생산에 도전해 성공했다. 이는 삼성전자가 세계 시장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신호탄이 됐다. 몇 년 후 대한민국은 해외에 “미국·일본에 이어 전자레인지 만드는 나라”로 소개됐다. 이 전 부사장은 당시 전자레인지 제조 현장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1979년 당시 저는 과장이었습니다. 전자레인지 제조를 위해 신입사원을 뽑고 백지상태에서 시작했습니다. 타사 제품을 해체해가면서 전자레인지의 원리를 파악했습니다. 처음부터 품질관리를 엄격하게 했습니다. 덕분에 오차율이 매우 낮았습니다. 미국 제이시페니(JCPenny)에서 5000대를 수주하게 됐는데, 미국에서 실시한 오차 측정 계측기 바늘이 거의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계측기 오작동을 의심할 정도였죠.”

삼성전자가 생산한 제이시페니 전자레인지는 “품질 좋고 저렴하다”는 소문이 나면서 날개 돋친 듯 팔렸다. 한 모델이 100만 대 이상 팔리면서 제이시페니 역사상 드문 히트작이 됐다. 이후 GE 등 세계적 기업들이 경쟁적으로 삼성전자에 손을 내밀었다. 삼성전자 전자레인지의 성공은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1989년 1월호)에도 실렸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OEM 브랜드로서였다. 전 세계 전자레인지 공급량의 20%를 생산해냈지만, ‘삼성전자’ 브랜드를 내건 제품이 세계 시장에 본격적으로 고개를 내밀기 위해서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컴퓨터 사업, 존폐 기로에서 회생하다

컴퓨터사업부·LCD사업부에 재직할 때에도 그는 몇 차례 위기를 넘겼다. 그가 “위기는 늘 있기 마련”이라고 여유 있게 말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삼성전자 컴퓨터 사업이 존폐 기로에 놓인 1992년부터 1993년 사이 그는 제조라인을 대대적으로 혁신해 생산성을 3배 높임으로써 위기를 극복했다. 1998년 LCD사업부 제조 책임자로 근무할 당시에는 80%에 달하는 제조원가를 절반 수준으로 떨어뜨려 대형 패널 제조능력 업계 1위로 뛰어오르게 된 계기를 마련했다.

제조업의 위기는 업계 공통의 위기다. 1990년대 초반에는 컴퓨터 업계 전반이 위기였다. 대만 등에 밀려 국내는 물론, 해외 유명 제조회사들이 하나둘 문을 닫았다. 1990년대 후반에는 값싼 STN(Super Twisted Nematic)에 밀려 TFT LCD 업계 전체가 엄청난 어려움을 겪었다. 위기 때마다 삼성전자는 이를 극복했음은 물론, 오히려 더 큰 도약의 발판으로 삼았다. 그 비결이 뭘까.

이 전 부사장은 ‘구성원 간 비전 공유’를 그 주요 비결 중 하나로 꼽는다. 위기 때마다 그는 관련자들과 머리를 맞댄 발상 회의를 통해 아이디어를 모으고 해결 방법을 찾아 나갔다. 뻔한 회의가 아니라 원점으로 돌아가 발상의 전환을 거듭하는 회의를 했다. “당연한 말 같지만 ‘한마음으로 일하는 것’을 당해낼 수 없습니다. ‘무조건 하라’가 아니라 ‘이 일을 왜 해야 하는가’를 공유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재경영에서 중요한 것은 두 가지, ‘동기 부여’와 ‘역량의 극대화’입니다. 박사라고 다 일 잘하는 것 아니지 않습니까. 사람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자발적으로 할 때 역량이 극대화됩니다.”

그가 온양 반도체 공장장으로 재직할 당시 ‘설비 유지관리’를 뜻하는 ‘메인터넌스(maintenance)’ 부서의 명칭을 ‘생산기술’로 바꾼 것도 이 때문이다. 고졸 출신 엔지니어들이 자부심을 갖고 일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포상할 사례가 생기면 현장으로 달려가 직원들에게 직접 혁신 사례를 듣고 토론한 후 두둑한 현금을 건넸다. 이는 직원들이 신나게 일하는 분위기를 만드는 데 한몫했다.

인터뷰 중인 이지섭 전 부사장.  36년간 삼성맨으로 지낸 그는 “어딜 가나 삼성만 보인다”고 했다. 그에게 삼성전자란 ‘열정’의 다른 이름이다▲ 36년간 삼성맨으로 지낸 그는 “어딜 가나 삼성만 보인다”고 했다. 그에게 삼성전자란 ‘열정’의 다른 이름이다

 

지나친 찬사도, 지나친 질책도 독(毒)

대학 졸업 직후부터 36년간 삼성맨으로 살아온 이지섭 전 부사장. 그에게 “당신에게 삼성전자란 무엇입니까?”라고 묻자 “열정”이란 짧은 답이 돌아왔다. 어디서 무엇을 하든 ‘삼성’이란 두 글자만 보인다는 것. 이러한 주인의식과 애사심을 가진 사원 한 명 한 명이 삼성전자의 주춧돌이 됐다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성공 요인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삼성전자에 대한 국민의 관심은 대단합니다. 잘될 때는 엄청나게 칭찬하지만, 이익이 조금이라도 줄면 금방이라도 내려앉을 것처럼 염려하죠. 삼성전자가 우리나라 경제에 미치는 영향력이 크기 때문에 이런 반응을 이해합니다. 하지만 위기는 언제나 있기 마련이고, 삼성전자는 이겨나갈 겁니다. 조직도 한 인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지나친 찬사도, 지나친 질책도 독이 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진심 어린 응원이 필요합니다.”

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