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남의 시로 가꾸는 정원] [105] 어떤 평화


어떤 평화 - 이병일(1981~ )


오일마다 어김없이 열리는 관촌 장날
오늘도 아홉시 버스로 장에 나와
병원 들러 영양주사 한 대 맞고
소약국 들러 위장약 짓고
농협 들러 막내아들 대학 등록금 부치고
시장 들러 생태 두어마리 사고
쇠고기 한근 끊은 일흔 다섯 살의 아버지,
볼일 다보고 볕 좋은 정류장에 앉아
졸린 눈으로 오후 세시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기력조차 쇠잔해진 그림자가 꾸벅꾸벅 존다


땅이 녹고 질척이던 흙들 마르고 양지 가에 냉이 나오는 철입니다. 햇빛은 묵은 옷을 벗기고 읍내로 나가는 길을 비춥니다. 마당 가득 소란하던 아이들 훌쩍 커서 다 떠났습니다. 빈 들깨 대처럼 서서 어제인 듯 한참 마당을 바라봅니다. 장날이니 나가봐야겠습니다.

칠십 노인의 장날 하루 일과입니다. 각 장면마다 평화가 있습니다. 일생 선하게 순리에 따라 살았습니다. 하늘의 명에 따르면 인생은 힘겨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니 모든 풍파도 지나가면 곧 평화입니다. 막내아들 등록금을 부치는 일의 뿌듯함이 힘겨움을 이겼습니다. '오후 세 시'의 기울어가는 평화입니다. 집에 도착하면 서너 네댓 시가 될 겁니다. 그리고 곧 어둠이 올 겁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말년 봄날 하루의 자화상이 이만하면 괜찮습니다.

온 나라의 오일장이 멈췄습니다. 아마도 유사 이래 처음일 겁니다. 검부러기들만 날립니다. 빈 장마당을 보면서 공부를 합니다. 모이고 흩어지는 것에 대하여, 평화에 대하여. 어떤 뜻이 있을 겁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3/15/202003150138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