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미 작가님의 스승 홍순태 교수님을 소개합니다.

홍순태 교수님은 한국 사진계의 산 증인이자 큰 발자취를 남긴 분입니다.  

 

교수님에 관한 글과 인터뷰입니다.

하루에 다섯 시간 이상 자 본 적이 없는 사람이란 말 속에 많은 게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분야든 훈련 없이는 아무 것도 이루어낼 수 없음을 절감합니다.  

출처 : http://www.plclub.co.kr/5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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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1960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졸업

 

개인전

1978 1회 외 다수

 

경력

1968 국전사진부 특선 3, 금상 1, 입선 2

1970 엑스포 '70 한국관 사진담당

1972 국전추천작가

1972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강사(1975)

1975 엑스포 '75 한국관 미래관 사진출품 30

1980 국전초대작가

1881 신구전문대 사진학과교수

1983 KBS이산가족찾기 이벤트 사진촬영 담당 20,000

1986 '86아시안게임 공식기록 사진가

1988 '88서울올림픽 공식기록 사진가

1988 홍익대학교 산업미술대학원 강사(현재)

1989 사진예술지 편집주간(현재)

1993 엑스포 '93멀티비젼 총감독

1993 한국 민족사진가협의회 의장(96)

1994 한국사진학회 회장(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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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하는 사진가, 실천하는 교수*

한정식(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장)

 

문득 눈을 떠보니 어느 새인가 내 나이 환갑 진갑 다 지내고 말았다. 그뿐이 아니다. 엊그젠가 육명심 교수가 정년이라는 통지가 오더니, 이제 다시 홍순태 교수가 학교 생활의 막을 내리려 하고 있다. 삶이라는 게 덧없다는 것이 말로써가 아니라 실감으로 스민다.


내 사진 인생에는 홍 교수와 육 교수 두 사람이 은인으로 얽혀 있다. 내 사진의 문을 처음 열어 준 사람이 홍 교수요, 대학으로 이끌어 준 사람이 육 교수였다. 그 후 우리 셋은 교단에서 여러 가지로 얽히고 설키면서 사진 생활 30, 교단 인생 20년을 함께 했다. 30년이란 세월이 결코 짧은 것이 아니어서, 우정도 깊었지만, 그 우정만큼 갈등도 많았다. 그러나, 그 우정도 모두 아름다운 추억으로 이제 저녁 노을처럼 지려 하고 있다. 저물녘에 돌이켜 보면 참으로 본받을 것 많고, 배울 점 많은 홍 교수였다는 생각이다. 부지런하고, 열의 가득하고, 그리고 그 강한 의욕, 거기에 성실성 등등….


홍 교수는 참으로 열정적인 사람이다. 육체적으로도 그렇게 강건할 수가 없다. 탱크, 불도저라는 별명처럼 그는 밀어붙이는 힘에서도 남달랐다. 말하자면 몸의 사람이요, 실천의 사람이요, 행동의 사람이다. 그만큼 순진한 사람이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홍 교수는 그래서 계산이 빠르지 않다. 약삭빠르지도 못하다. 쉽게 말해서, 성실하게, 때로 우직하게 앞만 바라보고 달리는 그런 사람인 것이다. 그의 사진이 그래서 그렇다. 그의 사 진치고 골치 아픈 것 하나 없다. 아예 골치 아파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는 내가 또 비슷해서 내게도 골치 아픈 사진 한 장도 없는데, 그나 나나 이 세상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뿐 뒤를 캐고, 모순에 고민하는 그런 성격이 아니어서인 것이다. 그저 뚝심과 열정으로 온 힘을 다해 열심히 걸어가는 그인 것이다.


그의 사진이 언제나 조형성을 바탕으로 시각적 형태성을 중시하는 것도 그의 그 정직성과 성실성이 시각적 트럭이나 잔재주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있는 현실에서 있는 그대로를 직설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사진의 기본이기도 하지만, 그의 성격적 바탕이기도 한 것이다. 그가 상과대학을 나오고서도 사진으로 전향하여 나름대로 성공한 것도 따지고 보면 이러한 직선적 사진으로 직결된 데서 온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의 사진이 해외로 나간 것도 그의 행동파적 성격에서 온 것이다. 불도저가 밀고 나가기에는 한반도가 좁아 터진 것이다. 탱크가 달려가기에는 걸리는 것도 많고, 부딪치는 것도 많고, 그뿐 아니라, 속력을 내기에는 터가 너무 비좁은 것이다. 좁은 방구석에서는 저절로 발이 문 밖으로 빠지듯 좁은 바닥에서 쩔쩔매던 그의 발이 해외로 빠진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었을 것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해외라 해서 한두 군데에 만족하는 그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의 거실에는 세계지도가 걸려 있고, 그가 간 곳, 가야 할 곳을 작은 깃발로 표시를 해 놓고 있다. 그의 욕심이야 전 세계의 정복이겠지만, 우선 백 개의 나라를 정복하겠다고 했다. 지금 몇 나라 째 정복을 했는지 모르지만, 거의 전 세계에 그의 발자국이 찍히지 않은 나라가 아마 한 군데도 남지 않을 것만 같다.


이런 경이적인 창작 활동은 무엇보다도 강한 의욕을 뒷받침하는 건강이 가져 온 것이지만, 이 건강도 부지런함이 없으면 부산한 발길에 머물고 말았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의 부지런함이 그의 오늘을 만든 것이라 해도 틀림이 없다는 뜻이다.


부지런하기로는 사진계만이 아니라 어떤 분야에서든 우리 홍 교수 만한 사람 찾기도 드물지 않을까 싶다. 그가 근무하던 신구대학에서 제일 먼저 출근하는 교수가 바로 그라는 얘기를 듣고 있지만,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 까지 부지런히 쉬지 않고 움직이는 사람이 그인 것이다. 하루 다섯 시간 이상 자 본 적이 없다니, 나로선 상상도 못할 일이다. 그것도 온통 사진 일로만 그렇게 바쁘고 부지런했으니, 20여 회에 이르는 개인전이 저절로 열린 것이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가 있다. 타고난 건강이 가능하게 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실은 거꾸로 그 부지런함이 건강을 가져다 준 것인지도 모른다.찍은 사진의 양도 많거니와, 소재로서도 관심이 안 간 곳이 없을 정도로 눈에 띄는 모든 것을 그는 기록했다. 사진의 온갖 조류에도 관심이 깊어 그런 온갖 조류의 사진도 조금씩은 다 손을 대본 것으로 알고 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그의 선생으로서의 기질인 것이다. 그의 회갑 기념전 당시 썼던 글에서 잠시 밝힌 바도 있지만, 그는 타고난 선생이기도 하다. 누가 그에게 사진에 관해 물으면 자기가 아는 것 모두를 열심히 설명해 주는 사람이다. 사진 사조는 물론이요, 기계적 메커니즘에 이르기까지 그가 관심 안 가진 것이 없고, 손 안댄 것이 없을 정도라, 거의 모든 물음에 서슴없이 답이 나오곤 했는데, 이것이 모두 그의 선생 기질에서 온 것이라 생각된다.


그가 다루어 보지 않은 소재가 거의 없다는 것도, 사진의 모든 분야에 관심을 보인 그의 기질과 그대로 한 맥락인 것이다. 교수라고 해서 지시나 하고, 가르치는 것만으로는 절대로 만족할 수 없었던 사람이다. 모든 것을 직접 해 보고, 겪어 보고 그리고 나서 학생들 앞에서는 것을 몸으로 실천한 사람인 것이다.


아무튼, 힘차게 의욕적으로 밀어 온 사진 인생 40년이었다. 그가 정년을 맞아 한 인터뷰에서도 언급했듯, 학교가 끝났다고 편히 쉴 그가 아니다. 편한 것이 미안해서가 아니라, 사진 찍고, 글 쓰고, 가르치고 하며 자기를 쉬지 않고 몰아가는 것이 이제는 그의 생리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군인은 전장에서 죽고, 선생은 교단에서 쓰러지는 것을 이상으로 삼는다. 모르긴 해도,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도 그는 카메라를 메고 있을 것이란 생각이다. 아니, 저 세상에 가서도 카메라를 절대로 놓지 않을 사람이 바로 홍순태 교수 이 사람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홍순태 교수와의 대화*

35년 간의 사진을 정리하는 우리시대의 뉴 다큐멘터리 사진가

 육명심(사진가·서울예전교수)

 

*어떤 시대적 배경에서 사진을 시작하셨습니까?

-사진 아카데미가 형성되기 전이지요. 정통적 아마추어리즘에 따라 사진을 접했으니까요. 국전을 통하여 국전초대작가가 되었다든지 동아사진콘테스트와 국제사진살롱에 도전했었다는 경력이 그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콘테스트가 갖는 아카데미즘이 있다고 봅니다. 다시 말해서 조형성을 추구한다든지 구성적으로 완벽하고 시각적으로 보다 효과적이어야 한다는 식의 콘테스트의 심사 경향이 이에 도전하는 저에게는 훌륭한 시각훈련을 시켰고, 사진의 기본 개념을 연구하게 했었다고 생각됩니다.

 

*선생님은 다큐멘터리 사진작가라고 스스로 생각하십니까?

 -기록을 한다는 것은 사진가의 사명감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진전을 통하여 다 발표하지는 못했지만 전국의 사찰을 기록하는 일 그리고 한국의 고유민가와 우리의 전통을 찾아서 기록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시대적 환경에 따른 변화에 반응하게 되더군요. 고도의 산업화 사회로 변하는 현실에 대해 비판의 시각을 갖기 시작했으니까요. 문명비판이랄까? 고유문명이 석유문명에 도전 받아 잠식되는 현실에 저의 카메라는 도전했었으니까요.

 

*삶의 철학이 바탕이 되어 사진을 도구로 사용하시나요, 아니면 사진의 표현을 위한 철학적 방향이 형성되시나요?

 -'사진을 왜 하고 있느냐'에서부터 시작하고 있지요, 사진의 매체성이 저의 사고를 끌어내는데 좋은 도구라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진취적인 사고를 수용하다보니 시대파악도 남보다 빠를 수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하구요.사진의 기록성과 예술성에 대한 선생님의 생각은?

-찰스 허버트의 사진의 양면성에 대한 이야기에 저도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남사당의 줄타기를 보면서 어느 면으로 보면 기능이지만 어느 면으로 보면 그의 정신을 읽게 되는데 기능적인 면과 정신적인 면의 양면성이 예술성과 기록성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집니다. 저는 그 양면을 긍정하고 융합하다보니까 저 나름대로의 다큐멘터리에 대한 개념이 정립되었고 홍순태의 시각성에 의한 뉴다큐멘터리적 시각이라는 저의 사진개념이 형성되었습니다. 그것이 '78년 제1회전 '투시'에서 고유문명이 외세문명에 밀리는 저의 문명비평적 시각을 시작으로 '79 2 '시점'에서 석유문명화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습니다. 뒤이은 '아메리카'는 저의 시각이 다른 나라의 현실까지 비판하려는 시각확장의 형성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은 저널리스트입니까, 다규멘터리스트입니까?

-저는 저널리스트는 아닙니다. 기록하되 단순한 사건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고 창작적 자세로서 저 자신의 시각에 의한 대상들과의 만남을 이루는 것입니다. 단순기록이라는 개념을 넘고자 하는 의식의 단계는 저의 비판의 시각으로 발전되었습니다.

 

*최근의 작업의 주제성을 외국으로 돌리셨는데….

-그것도 저의 사명감에서라고나 할까요. 외국에 대한 사대주의가 아닙니다. 우리 출판계의 모든 도판이 과거에는 거의 외국 출판물을 도용했습니다. 해적행위였지요. 우리의 산업화, 국제화에 따른 현실에서 출판계의 원고로서의 시급함에 따른 저의 생각이 이 작업을 하게 했습니다. 우리 강산을 동분서주 열심히 기록했기에 이제 저의 시각이 밖으로의 시각을 요구했다고 생각됩니다.


가르치는 위치에서 하고 싶은 말씀은 없으십니까?-가르치는 것과 창작하는 일과는 같은 수위에 놓고싶지가 않습니다. 열심히 연구하고, 저술하고 그리고 가르치는 일은 같은 맥락이지만 창작행위까지 같은 수위에 놓여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없습니다. 학생들에게 제 창작행위에 동조하라고 요구해 본 적이 없으니까요. 저는 학생들이 새로운 것을 추구함을 너그럽게 수용하려 합니다. 저의 감성과 젊은이들의 감성과는 다르니까요. 오늘의 현실이 빠르게 변화하는 것을 추구하게 하지 않습니까? 시대의 조류라는 것은 막을 수가 없고 내가 그것과 같이 흐른다는 것과는 또 다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학생들의 정보적 차원에서의 수용과 저의 전달의 목적은 다양함의 수용을 요구하지만 저의 작업과는 다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전시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하시겠습니까?-회고적 성격이라고 하기에는 저의 나이가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35년간 작업한 것을 한번 정리하고 객관적 시각으로 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시대적 현실에서 사진인으로의 또 다른 시각이 있으시다면?

-통일에 대한 것을 많이 생각합니다. 남북이 겪어야 할 '격동의 아픔'이 예감되니까요. 문화적 차이가 어떻게 좁혀져야 할까 하는 염려도 있습니다. 50년이 만든 서로의 차이가 엄청나게 크다는 것을 실감하게 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남북 문화교류의 한 맥락으로 민사협에서 사진교류전을 추진한 적이 있었는데, 현재 보류된 실정입니다마는, 북한에서는 철저한 의미의 다큐멘터리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 같습니다. 아마도 살롱적 사진에 머물러있지 않은가 생각됩니다. 그 기획에서 북쪽은 '백두산에서 금강산까지'로 정하고, 남쪽은 '한라산에서 설악산까지'로 정해 남북사진 교류전을 기획하게 되었으니까요. 이념이나 시각에 의한 전시는 불가능하다고 본다면 그 차이성의 좁힘은 짐작되는 것이니까요.

 

*우리 사진문화에서 대안적 방향을 말한다면?

-사단의 주인이 누구여야 하느냐가 생각되어야 합니다. 사진아카데미즘이 형성된지도 이제 많은 시간이 흘렀고 23개 대학에 사진학과가 개설되었습니다. 사진의 학문적 적립도 형성되어가고 있다고 봅니다. 민사협과 사진학회를 통하여 더욱 열심히 일해보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문제성을 느낀다면 우리의 정보적 흐름이 외국으로부터의 무분별적 수용이라는 무서운 경향에 무감각함이 걱정입니다. 국제화·세계화라는 개념의 잘못된 수용자세가 오류를 만들어 가지나 않을까 하는 노파심도 있구요. 잘못하다가는 우리문화의 전통이 뿌리 채 흔들리지 않을까 걱정할 때도 있습니다.

 

*젊은 사진가들에게 느끼는 것이 있으시다면?

-저는 11월 수평전에 대해서는 우선적으로 긍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스트레이트' 사진과 '만드는 사진'에 대한 생각을 할 때에는 다름에 대한 '수용'과 현실적인 '공존'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진의 나무가 있다면 그 사진나무는 다양한 방향으로 뻗어나가는 가지가 있어야 건강한 뿌리를 내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내가 어느 방향을 추구하고 있느냐 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라 생각합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홍순태교수님 탐방기, 한국사진방송 이학영 기자.

 

본 기자 작년 11 12일 신구대학 국제관에서 선생님의 주간 강의를 마치면서, 인터뷰요청을 한바있었는데, 그후 다시 6개월 지난 69일 선생님의 서재에서 다시 근황소식을 듣는 자리를 마련하였다. 그 일문일답을 정리하였다.

 

 

1. 최근에도 작년과 같이 후학지도와 창작을 계속하고 계시는지? 근황을 좀 듣고싶습니다.특히 파킨슨병으로 오래 동안 고생하고 계시는데…사진인들이나, 제자들은 더욱 건강에 대하여 걱정하고 있습니다.

 

홍순태교수: 작년과 다름없이 신구대학과 상명대 주야간을 강의중이며, 요즘은 건강이 더욱향상되어 본인은 촬영의 회수를 더해가고 있습니다. 지난 1월 히말라야 등정촬영에 다시 현지인을 재회하였더니, 현지에서 모두 놀라더군요. 그들은 이번이 마지막이리라 생각한것 같았는데, 다시 뵙겠다고 인사를 나누고 돌아왔지요. 여름에 건강은 호전되어가면서, 약도 줄이고있습니다. 파키슨병 치료약이 급템포로 발전되고있다니 다시 기대도 됩니다.

 

 

2. 작년 CEO 를 위한 숙대강의에서 쉼 없이 3시간 열강으로 모두 기립박수를 받았다는데, 요사이도 특강 요청이 많으십니까?

 

홍순태교수: 금년엔 특강계획은 없고, 강의중인 대학에서 종강준비를 하고 있으며, 종전에 진행된 미결 원고를 정리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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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수많은 전시와 14권이상의 저서를 남긴 큰 족적을 남기셨는데도 불구하고, 청계천 50년사를 발간할 계획은 계속추진중이신지? 어려움은 없으신지, 이런 기회를 통하여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홍순태교수: 낙동강” 사진집을 발간한것은 그책의 내용면이나 방대한 사진자료에 비하면, 책 스케일이나 편집에 좀 소극적이었습니다. 이것을 보존가치 측면에서 재고하고 있으며, 이번 MBC 창사 50주년 특집방송에 일단 청계천, 서울일원과 전국 특수지역을 망라하여 소개될 예정으로 작업중 입니다.

 

 

4. 요사이 한국사진이 해외유학파, 국내 학파(?), 한국사진작가협회 등의 3대 주류가 활동하는 양상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런 현상들은 긍정적으로 평가할만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견해를 갖고 계시는지?

 

홍순태교수: 예나 지금이나 항상 문제성을 같이 갖고있었지만, 어떤 칼라가 중요한것이 아니라, 사진인들이 현시점에서 정체성, 방향성을 찾아서, 무엇을 어떻게 가야하는지가 중요합니다. 사협도 구태를 벗어버리고, 정진과 쇄신이 절대 필요한 시기이고요.

 

요사이 사진인들이 게으른 자세랄까, 태만하다고할까. 구태의연한 자세를 버리지 못하고, 촬영에 임하니 발전보다 오히려 퇴보되는 현상을 봅니다. 새로운 시각을 보는 개척정신과 남이 보지못하는 시각을 넓히는 훈련이 절실한 시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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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디지털 사진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보편화, 대중화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큰 조류에 편승하여 메이킹 포도가 확산되는 추세를 부인할 수없습니다.

포스트 모던의 한 주류인 신디샤먼(Cyndy Sherman)이나, 바바라 크르커(Barbara Kruger)이후 메이킹 포토의 향후 흐름에 대하여 한 말씀 해 주십시오.

 

홍순태교수: 메이킹 포토엔 양면성이 항상 존재해 왔지요. 아날로그시대의 향수는 단시일에 끝나지않을 것입니다. 디지털 대세에 밀려 필림의 판로나, 장비면에서도 많이 위축되어 왔지만, 아날로그 사진에 회귀하고, 집착하는 사진인들은 소수로 남아 있을것이며, 다수와 소수정예가 서로 병행되어 나갈 것으로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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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작년 인터뷰 당시 한국사진방송의 일간 접속자수가 8천여명 정도였는데, 현재는 하루 25천명 이상의 사진인들이 접속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진인들의 관심속에 한국 사진방송에 대한 편달이나, 조언을 말씀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홍순태교수: 좋은 사진, 창작사진의 발전을 위하여, 사진계의 리더를 초빙(학계, ,프로 아마, 일반 등)하여, 허심탄회하게 털어놓고, 방향과 한국사진의 정체성을 찾는데 일조하였으면 좋겠습니다.

 

기자: 귀한 시간 인터뷰에 응해주심을 감사드립니다. 한국사진방송 기자들은 선생님의 건강한 활동과 건승을 항상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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