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10차 해외학습탐사를 다녀온 36명의 박자세 회원분들은

 

중국사, 인도사, 유럽사 도표를 연대순으로 전부 암기하였습니다.

 

아마 다녀오신 분들께 탐사 이후에 무엇이 남았냐고 묻는다면,

 

암기한 것 밖에는 없다고 대답할 것 같습니다.

 

박문호 박사님이 항상 강조하듯,

 

공부의 비결은 유용하고 확장가능한 사실들을 암기하는 것입니다.

 

암기의 중요성에 대한 신문기사 두 편을 올려드립니다.

 

 

 

#1. 


[분수대] 한국사가 단순 암기과목으로 전락할까 문제라고?

[중앙일보] 입력 2013.08.31 00:36 / 수정 2013.08.31 02:09

 

딸 대신 물건을 사러 갔다. 여종업원이 포인트 적립을 해주겠다며 회원 가입된 딸 전화번호를 묻는다. 난감하다. 얼마 전 바꾼 딸의 휴대전화 번호가 가물가물하다. 따져보니 외우고 있는 번호가 몇 개 안 된다. 노래방이 나온 후 외우는 노래 가사가 없어지더니, 이제는 외우는 전화번호가 없다.

 

 스마트한 전자기기의 등장으로 기억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디지털 치매’다. 내친김에 자가진단법까지 찾아봤다. ‘외우는 전화번호가 회사와 집 번호뿐이다. 대화 중 80%는 e메일로 한다(아마 요즘은 SNS일 듯). 계산서 서명 빼고 거의 손글씨를 안 쓴다. 자동차 내비게이션 장착 후 지도를 보지 않는다. 몇 번 만난 사람을 처음 본 사람으로 착각한다’ 등이다. 10개 항목 중에 1~2개만 해당돼도 디지털 치매가 의심된다는데, 중증이다.

 

 스마트 기기는 날로 똑똑해지는데 우리 뇌기능은 날로 둔해진다. 정보를 늘 찾아서 보니, 아예 뇌에서 저장시키는 메커니즘 자체가 약해진다.

 

 물론 이제 정보는 지천으로 널려 있고, 이들을 창조적으로 네트워킹하는 능력이 훨씬 중요하니 단순 정보, 단순 암기, 단순 기억이란 별 의미 없을 수 있다. 그러나 기억은 못하지만 언제든 인터넷에서 꺼내올 수 있는 정보가 과연 나의 진짜 정보, 진짜 지식이 될 수 있을까. 그에 기초한 사고와 판단은 또 얼마나 정확할까.

 

 2017년 입시부터 한국사가 수능 필수과목으로 부활한다. 24년 만이다. 그런데 한쪽에선 반대 목소리가 있다. 역사를 어떤 관점에서 가르칠 것이냐, 사관의 문제를 지적한다. 역사교과서 채택을 둘러싼 이념갈등도 우려한다. 또 수능 필수과목이 됨으로써 사교육 열풍이 불고, 역사가 단순 암기과목이 될 것이라고 우려한다.

 

 딸의 교과서를 다시 들춰본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학습내용은 죄다 ‘~에 대해 생각해보자’다. 생각해보는 것은 좋은데, 생각할 만한 능력과 지식을 갖추는 게 먼저 아닌가. 뭘 알아야 사고도, 비판도 하니까 말이다. 과거 주입식 교육의 폐해에 대한 반작용으로, 백지상태를 채우기보다 백지 앞에서 사고력만 주문하고 있다면 그 또한 문제다.

 

 표정훈 한양대 기초융합교육원 교수는 자신의 SNS에 “한국사는 무지막지한 암기과목이 될수록 좋다”고 썼다. “총기에 비유해서 좀 그렇지만, 실탄을 한 가득 확보한 다음에야 어디로 어떻게 얼마나 쏠지 생각하고 판단해야 한다. 강의해보면 요즘 학생들, 한국사든 세계사든 역사에 대한 실탄을 갖고 있지 못하다. 일단 외울 건 외워야 한다.”

 

 맞는 말이다. 절묘한 댓글이 달렸다. “역사의 여신 클리오는 기억의 여신 므네모시네의 딸이다.”

양성희 문화스포츠부문 차장

 

 

 

 #2.

 

[매일경제] 삼성 2인자 최지성 어떤 변화 몰고올까

기사입력 2012.07.09 17:15:54 |최종수정 2012.07.25 16:02:32

 

(상략)


삼성에 입사한 신입사원 최지성은 근무 희망 계열사를 1지망부터 3지망까지 ‘삼성물산’만 써낼 정도로 고집 있는 사원이었다. 삼성물산에서 처음 배치된 부서는 잡화과였다. 신발, 문구, 이쑤시개 등 잡동사니 품목을 수출하기 위해 발품을 팔아야 했다. 최 부회장이 그룹 비서실에 처음으로 몸담은 것은 1981년. 비서실 기획팀 과장으로 4년간 근무하면서 그룹 전반의 경영 안목을 익힐 수 있었다.

 

그 뒤로는 삼성전자 반도체사업부로 이동해 반도체 1위의 기틀을 닦는데 일조하게 된다. 최 부회장의 그룹 비서실 2기는 1993년부터 1994년간의 1년여다. 당시 이건희 삼성 회장이 신경영을 선언한 직후의 시기다. 삼성 고위 인사는 “최 부회장이 반도체, TV, 휴대폰 등 사업 일선에서 잔뼈가 굵은 야전사령관으로 분류되지만 두 번의 비서실 경력이 오늘날의 미래전략실장으로 가는 밑거름이 됐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최 부회장의 독기와 승부근성은 그를 아는 누구라도 인정하는 대목이다. 그는 문과 출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1000페이지가 넘는 반도체 기술 교재를 통째로 암기했다. 이 덕분에 웬만한 반도체 엔지니어를 능가하는 기술 지식으로 이과 출신들을 주눅 들게 만들었다.

 

1985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1인 사무소장으로 발령받은 그는 반도체를 가득 실은 가방을 차에 싣고 유럽 곳곳을 돌아다니며 영업 전선을 뛰었다. 어디든 마다않고 시장 조사와 거래업체 면담을 강행했는데 한때는 스위스로 가기 위해 알프스를 넘던 중 차가 눈길에 미끄러져 생명이 위험했던 적도 두 번이나 있었다. 이런 악착같은 노력으로 독일 부임 첫해에 100만 달러 규모의 반도체를 판 일화는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디지털 보부상’이라는 별명은 이때부터 비롯됐다.

 

최 부회장은 2006년 보르도TV를 앞세워 소니를 제치고 TV 사업의 첫 세계 1위를 달성했다. 당시 최 부회장은 이를 기념해 보르도 와인을 술잔 째로 원샷하며 임직원들을 독려할 만큼 호방함을 과시하기도 했다. PC용 모니터와 휴대폰 등에서도 글로벌 톱 레벨에 올라서는 성과를 이끌었다.


(하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