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이 유난히 환하게 내리쬐던 오후였다. 차에서 내리면서 자료집과 펜을 가지고 내렸다. 박사님의 설명을 받아적기 위해서다. 하지만 그 날 박사님은 우리들에게 가장 단순하고 가뿐한 차림을 하라고 당부하셨다. 학술적인 설명도 별로 없었다.

 

 앞 사람의 발걸음을 쫓아 가기 시작했다. 조금 더운 듯 해서 츄리닝 바지를 무릎까지 걷어올리고 싶었지만 긴 풀들에 긁힐 것 같아서 그냥 걸었다.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가다가 돌 계단을 내려가니 물이 흐르는 곳이 나왔다. 넓고 든든하게 생긴 바위인데도 물을 건너려고 발을 내딛는 순간 흔들거린다. 발 밑이 미끄러워 조심스러웠다. 더 들어가자 허리 깊이 정도의 물이 차 있는 곳이었다. 운동화를 벗어서 손에 들고 건넜던가, 아니면 신은채로 건넜던가 기억나지 않는다.

 

 

  더 걸어갈수록 바위틈으로 흐르는 물살이 세지고 주위 공간은 좁아지기 시작했다. 높이 치솟은 바위 절벽을 두 손으로 짚고 발 짚을 곳을 확인하며 한 발씩 나아갔다. “바로 앞이 폭포래요.” 누군가의 말에 고개를 들어보니 콸콸콸 물 흐르는 소리는 크게 들리는데 물줄기는 1~2 미터 앞까지만 보이고 그 행방을 알수 없다. 내가 서 있는 곳이 폭포의 윗부분이라는 걸 깨달았다. 몇 걸음 더 나아가서 전방을 살피니 물줄기가 까마득히 아래로 떨어져 내리는 것이 보였다. 순간적으로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혹시라도 여기서 발을 헛디디면 어떻게 되는거지? 차라리 직접 물에 빠지면 잠깐 허우적대다가 수영이라도 해서 나오련만. 이런 지형이라면 떨어지면서 바위절벽에 몇 번 부딪쳐 정신을 잃고나서 물에 빠지겠는걸...

 

 

먼저 내려가셨던 박사님이 다시 올라와서 도와주지 않으셨다면 난 그곳에서 더 이상 가지않고 뒤돌아왔을지도 모른다. 박사님은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괜찮아, 괜찮아. 하나도 안 위험해, 걱정하지 마요.”라며 발 짚을 곳을 지지해주셨다. 난간을 붙잡은 두 팔에 힘을 단단히 주고 발에는 긴장을 빼려고 노력하면서 한 발 한 발 밑으로 내려갔다. 묘한 성취감에 기분이 좋았다.

 

 

폭포 아래쪽은 넓은 공간이 바위절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아늑하면서도 시원한 느낌이 드는 곳이었다.  멋진 곳이로구나 생각하며 잠시 숨을 돌리는 사이에 박사님과 몇몇 대원들은 벌써 물에 들어가 있다. 어디로들 가는 건가. 폭포 반대쪽 방향으로 물이 흘러가는데 저 깊숙한 곳에는 뭐가 있는 건지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출발했던 곳으로 돌아가는 길인지 아니면 자꾸만 더 깊이 들어가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더 이상 모험하지 말자는 생각이 반, 저 너머에는 무엇이 있는지 내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은 생각이 반이었다.  들어갈까 말까.  이미 물에 젖어있는 검정색 운동화 속에서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래... 가보고 싶어. 아이들을 떼어놓고 이 먼 곳까지 오겠다고 큰 결심을 했는데 여기서 멈춘다면 후회할거야.

 

첨벙거리며 물로 걸어들어갔다. 발걸음 내딛을 때마다 바닥에서 돌멩이들이 차그락차그락거리는 소리가 경쾌하다.  물이 더 깊어지자 나는 바닥을 발로 차며 물에 뛰어들었다. 물을 가르며 슈욱 나아가는데 앞으로 뻗은 두 팔에 물의 흐름이 느껴지고 곧 이어 온 몸이 자유로워진다.  힘있고도 부드러운 물의 느낌이 전해져온다.

 

계곡물이 차가워서 수영하기 부담스러울 것 같았는데, 막상 들어가 보니 뇌까지 씻어줄 듯한 시원한 감각이 뭐라 말할 수 없는 만족감을 주었다.  물가 바위에서는 보이지 않던 그 곳까지 헤엄쳐서 들어가 보고, 더 이상은 갈 수 없는 곳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찰랑거리는 수면 부근의 매끈한 바위끝을 붙들고 잠시 숨을 고른 후에 다시 물가를 향해 헤엄치기 시작했다.   숨을 들이쉬는데 작은 물결이 일어 계곡물이 입술틈으로 들어왔다.  강물과 바닷물의 중간쯤 될 것 같은 살짝 비릿하고 짠 맛이 난다.

 

 

물 속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물 밖으로 나오니 추위가 확 느껴지며 몸이 벌벌 떨렸다. 흠뻑 젖어 아직도 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내 몸 위로 따스한 햇살이 비춘다.  폭포수 떨어지는 절벽으로 다시 올라가야 하는데 이렇게 떨려서 어쩌나 싶으면서도 기분은 그렇게 개운할 수가 없다.

 

 

 지난 몇 해가  내게는 힘든 날들이었다. 발달이 늦은 아이를 키우면서 희망과 절망 사이를 수도 없이 오갔다.  진단서를 받으러 다니면서 가슴 먹먹했던 기억. 아이 치료와 살림에 치어 내 존재를 찾지 못하고 우울했던 날들. 그 와중에 두 아이와 나를 두고서 미국유학을 떠났던 남편에 대한 원망... 그 모든 것들이 상처가 되었다.

 

 

마음을 추스리고 주위를 돌아보게 되니 세상 누구에게나 나름의 고통이 있고 주어진 숙제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런 숙제가 없다면 인생이 싱겁고 재미없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면서도 내겐 아직 마음속 어딘가를 툭 건드리면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줄줄 흐르는 증상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그 차가운 계곡물에서 몸을 빼내던 순간 나는 알 수 있었다.  내 몸과 마음이 맑게 헹구어졌다는 것을.   ‘씻김’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인가. 물속에 들어가기 전의 나와는 완전히 다른 내가 된 것 같다.

 

 

수십억 년의 세월이 쌓여 있는 서호주 카리지니 계곡에서 기껏해야 몇 년 밖에 안 된 내 상처들이 씻겨 내려간 것은 우연이었을까.

 

어둠이 내리고 대원들은 침낭 속으로 기어들어가 애벌레들처럼 줄지어 눕는다. 나도 침낭에 누워 얼굴만 내놓은 채 별이 가득한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그 날 밤에는 내가 아는 별자리들을 다 찾고 나서도 잠이 오지 않았다. 이유 없이 자꾸만 웃음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