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판에는 용, 노트에는 .... 지렁이.


박자세 회원이라면 무슨 말을 하려는지 금방 이해하실 듯 싶다. 
그렇다. 박사님의 강의 때 칠판에 그려주시는 그림얘기다. 수식이나 표, 도표 등을 적어주시는 것은 그래도 그려넣을만 한데(나의 경우는 수식들에도 적용된다. 수식을 따라서 푸는 것이 아니고 그냥 베껴 그린다.) 그림은 아주 다른 얘기다. 앞에서 설명하는 사람은 그 커다란 칠판에 쓱쓱 그림을 그려가시는데, 그걸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분명히! 똑같이 따라 그린 내 노트에는 영 다른 그림이 그려져 있다. 칠판에는 용이 있는데, 내 노트에는 신기하게도 지렁이가 있는거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림을 배워둘껄...  

반쯤 체념한 마음으로 주변을 둘러보다가 더 놀라운 걸 발견한다. 내 앞자리 노트에는 ...
아.... '황룡'이 그려져 있다. 바로 솔다노트다. 박자세 홈페이지를 방문해 보신 사람들은 강의 후기로 올라오는 일명 '솔다노트'를 보셨거나, 소문은 들어보셨을꺼다. 솔다렐라 이진홍선생님이 강의내용을 현장에서 그야말로 필사해서 후기로 올려주시는데, 솔다노트를 처음 봤을 때 그 놀라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똑같은 강의실에서 똑같은 강의를 들었는데, 어찌 이렇게 다른 결과물이 나올 수 있는지... 

매의 눈이 되어 솔다노트 작성과정을 지켜보니,
아.. 그럴 수 밖에 없네..라는 소리가 저절로 나온다. 선분 하나 긋는 것도 처음부터 끝까지 온통 정성이 들어가 있고, 잘못그어 삐져나온 것도 없을 뿐더러 선분간의 간격까지도 일정하다. 점 하나를 찍는 것도 콕 찍는게 아니라 작은 동그라미로 완성한다. 굵은 선과 가는 선을 구분하기 위해 각기 다른 펜을 사용하고 색깔별 펜은 두말 할 필요가 없다. 설명을 적어넣는 글자도 한획 한획 단정하기 그지없는데, 속도는 제트기다.  
휴... 솔다노트는 수 많은 반복으로 쌓인 내공과 섬세한 정성을 담은 결과물이었다.


박자세는 수첩사용을 권면하기에, 나도 한번 해보기로 했다. 그런데, 집에 와서 노트에 그렸던 걸 다시 그려보려고 하니 이제는 지렁이도 안그려지는거다. 굼벵이도 되었다가, 실뱀도 되었다. 늘 소지하고 다녀야 할 수첩에 잘 그릴 자신도 없고,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솔다의 '황룡'을 축소복사해서 붙였다. (답안을 베껴 적어 숙제를 해결하는 마음이 이해됨과 동시에...) 흐믓했다..

이제...
수첩에는 사랑스러운 내 지렁이를 그려넣는다. 아직도 멋진 용의 그림이 아니지만, 내 지렁이를 보아도 칠판의 용이 연상이 된다. 말하셨던 것 처럼 하나의 그림을 반복해서 10번, 20번, 50번을 그리면서 끊임없이 전두엽에서 내린 명령과 내 손 운동의 결과를 비교하다보면 균형과 배분, 대칭이 더 잘 잡히고 그 속에 맥락도 담은 그림이 그려질꺼다. 그러다 혹시라도 (내 눈에는) 청룡인 그림이 그려질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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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첩 1, 그리고 수첩 2 ]


처음 박자세 과학리딩모임에 참여해서 박사님의 칠판그림을 베껴 그리는 것이 다소 부담스러운 분들도 계실 것 같아서 제 경험을 떠올려 보았다. 지금도 여전히 칠판그림을 따라 그리는 것이 어렵고, 용어들이 생소하며 매번 가물거리는 기억이 현재진행형의 상황이다. 그것은 내가 그려본 경험이 없기 때문이라는 원인을 알기 때문에 크게 실망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거침없이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고 발표하는 신입회원들을 보면서 각오를 새롭게 한다.  

박사님이 지난 십 여년간의 강의내용을 총 집약하여 10장의 프레임에 담아내려고 하시는 것은 내 생각을 담을 그릇이자, 기억의 시발점이 될 것이니 무조건 내 머리 속에 꾸겨 넣는 것 부터가 시작이다. 처음부터 용의 모습이 아니더라도 일단 손으로 그리며 반복하는 것이 관건이다. 건물의 뼈대가 있어야, 그리고 그 뼈대가 든든해야 더 크고, 더 멋지고, 웅장한 집을 만들 수 있다. 프레임이 만들어지면 그 위에는 무엇이든 담을 수 있고, 얹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대체 무엇인지도 모르고 만들었더라도 프레임이 항시 조립가능한 3차원 홀로그램처럼 완벽한 완성체로 변신하게 되지 않을까? 이거야말로 초단기 쪽집게 학습법이다.
 '프레임 10개 암기 프로젝트'가 진행되어 갈수록 프레임 암기의 중요성을 강조하시는 이유가 가슴에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