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가 멀다 하고 도착하는 박자세 베스트 북이 거실 탁자위에 가득합니다. 책장 정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눈길이 뜸해진 책들을 정리하기로 했습니다. 책장 맨 아래 칸에 있는 그림도록을 서재로 옮기다가 학부 때 작업했던 작품 팡일 중 하나를 들춰보았습니다.

 

 

졸업학년에 외부 실습 과정이 있어 자매결연된 현대무용학교 학생들과 공연한 프로젝트 파일이었습니다. 평소 무용공연을 너무 좋아했고 이름 있는 극장에서 공연을 올리는 기회가 맘에 들어 참여한 기억이 납니다.

 

 

10명의 예비 디자이너들과 예비 안무가들이 3주정도의 워크샵을 한 후 마음이 잘 통하는 파트너를 정해 12주동안 20분 길이의 작품을 완성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제 파트너는 영화감독과 시나리오 작가인 부모님 영향으로 예술적 성향이 독특한 23살의 싱그러운 여자 친구였습니다.

 

 

그 당시 우리의 공통관심사는 물고기와 시간의 흐름이었습니다. 거대한 바다를 어디든 헤엄쳐 가는 물고기처럼 졸업 후 드넓은 공연계에서 자유자재로 헤엄치는 물고기가 되고픈 꿈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멈출 수도 돌이킬 수도 앞당길 수도 없는 시간의 흐름을 작품으로 말하고 싶었습니다. 여러 번의 회의 끝에 홀로 작은 공간에 갇혀있던 물고기가 넓은 공간으로 나온 후 새롭게 만난 물고기로 인해 더 큰 세상이 있음을 알게 된다는 내용으로 윤곽이 잡혔습니다. 지금 다시 보니 학부생다운 주제입니다.

 

 

시놉이 정해진 후 저는 어떤 무대 공간을 그려야 할지 고민했습니다. 무대 위에 표현할 수 있는 바다는 수없이 다양한 방법이 있습니다. 간단하게 아주 긴 파란색 천을 흔들며 바다라 할 수 도 있고 물을 가득 채운 수족관을 만들 수 도 있으며 텅 빈 무대 위에 무용수의 몸짓만으로 충분하기도 합니다.

 

 

제가 만든 공간은 검은 바다위에 떠있는 백색의 섬처럼 보이는 하얀 바다였습니다. 셰익스피어 `태풍`에 등장하는 폭풍우에 떠밀려 도착한 프로스페로의 섬일 수도 있는 곳 말입니다.

 

  

이상하게도 작품 구상 초기 단계부터 제 머릿속에는 천장에서 무언가가 공연 내내 떨어지는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마치 모래시계 안 모래줄기처럼 시간이 다 할 때까지 끓임없이. 이는 결국 시간의 흐름을 이미지화하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무대 위의 모든 것은 무생물이건 생물이건 존재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저마다의 사연을 품고 있는 거지요. 더욱이 20분동안 계속 천장위에서 떨어지는 물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의 의미를 부여해야함은 당연했습니다.

 

  

공연 때 모래를 사용하기로 결정한 후 우선 모래라는 재료를 처음 무대 위에 어떻게 등장시킬지 걱정이었습니다. 어떤 식으로 등장의 이미지를 구사해야 모래라는 재료의 의미를 탄력적으로 객석에 전달할 수 있을지 안무가, 무용수와 함께 다양한 시도를 했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만드는 사람에게 있어서 모래가 모래여선 안 된다는 겁니다. 그것은 모든 것이 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첫 장면을 암전 중에 욕조위로 떨어지는 모래의 소리로 시작한 후 작은 빛을 비추어 떨어지는 모래의 이미지만 먼저 보이게 했습니다. 그래야 관객이 모래가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서 빗소리로 생각할 수 도 있고 빛에 비친 모래를 보고는 샤워기를 통해 나온 물줄기라 이해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몸짓으로 표현하는 공연의 매력은 한 가지 사물을 다양한 의미로 재구성하여 관객과 소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전 오래된 욕조, 생수통에 담긴 모래와 사방이 노끈으로 마무리된 흰색 비닐장판이 전부인 무대를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공연 중에는 물고기가 갇힌 세상이었고, 검은 바다위를 부유하는 또 다른 하얀 바다였으며 시간의 흐름을 가늠케 하는 장치였습니다. 일상적인 물체가 무대위에선 전혀 다른 것이 되었습니다.

 

 

보던 작품 파일을 덮고 손길이 멀어진 책을 정리하고 새로 구입한 책을 꽂으면서 생각했습니다. 이 책들이 나에게 어떤 재료가 될까? 단순히 근사한 장식용이 될까. 쓸모없는 종이묶음이 될까. 아니면 한 글자 한 글자가 온 몸에 스며들어 다양한 방식으로 재구성되어 어떻게 표현될까. 궁금해집니다. 시간이 지나 반질한 손때 묻은 책들로 여전히 꽂혀있길 바래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