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학독서 (박문호 공동운영위원장) 2007-10-11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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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원  원문 :  http://www.100books.kr/?no=6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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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 박사님의 강연을 듣고 집에 들어간 시간이 12시.
강연과 뒤풀이를 함께 한 아내와 뒤풀이 때 하고 싶었는데 꾹 참았던 얘기들을 실컷 나누었다. 새벽 2시까지 씻지도 않고 소파에 앉아 얘기를 나누다가 잠깐 씻고 침대로까지 얘기를 끌고 들어가 결국 새벽 3시에 잠이 들었다.
 
화두는 자연과학 독서가 왜 중요한가? 라는 것이었다.
나와 아내의 생각을 서로 주고받고 결국 박문호 박사님의 생각을 여쭙기로 했다.
다음날인 어제, 자연과학 독서에 관한 질문 항목을 만들어 인터뷰를 요청했다.
미리 준비한 질문 항목은 다음과 같고 인터뷰 중에 질문이 추가되거나 변경되었다.
80 분 동안의 인터뷰를 즐겁게 응해주신 박문호 박사님께 감사드리면서,
박문호 박사님의 인터뷰 내용을 게시판에 올려본다.
 
1. 다른 분야를 모두 섭렵하고 자연과학 분야를 빠뜨렸을 때 그것이 불균형인가?
2. 자연과학이 다른 분야와 다른 점은 무엇인가?
3. 자연과학과 동등한 입장에서 볼 만한 분야나 도그마는 무엇이 있는가?
4. 자연과학이 다른 분야보다 중요하다면 이유는 무엇인가?
5. 자연과학 독서를 통해 궁극적으로 얻어야 하는 의미는 지식으로서의 의미인가, 가치관(사고방식)으로서의 의미인가, 즐거움으로서의 의미인가?
6. 자연과학 독서를 다른 사람들에게 권유할 만한 이유나 정당성은 무엇인가?
7. 자연과학 독서가 다른 분야의 독서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일까?
 
 
< 박문호 박사님 인터뷰 내용 >
 
자연과학 이외의 다른 분야를 모두 섭렵하고 자연과학 분야를 빠뜨렸을 때
그것을 심각한 불균형이라 할 수 있는가?
유럽의 자연과학사를 살펴보면 갈릴레이의 실험주의를 시작으로
점차 종교적 도그마가 허물어지는 과정이었다.
이후 자연과학의 발전으로 많은 사실들이 밝혀지고
과학의 힘으로 우주시대가 열리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종교와 철학에 연연하다. 왜 그런가?
그런 질문을 해결하기 위해 뇌(brain)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왜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갖게 되었는가하는 문제 말이다.
 
과학은 엄밀과학과 경험법칙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경험법칙에 많이 의존한다.
경험 법칙이란 것은 인간의 감각기관에 입력된 정보로만으로 형성된 세계관이다.
이는 전체 세계상 중 일부인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인간의 눈은 가시광선만 느낄 수 있지만
빛의 영역은 적외선, 자외선과 같은 영역을 포함한다.
또 경험법칙이 적용되는 예는 풍수지리학, 점성술, 기철학 등에서 찾을 수 있는데,
그런 방법론이 오랜 세월동안 많은 사람들의 상식의 기준이 되어 왔지만
제한적인 환경에서 근사적으로만 적용되는 경우가 많다.
 
한편 엄밀과학은 경험적으로 형성된 도그마를 깨뜨리는 과정이다.
반복되는 패턴을 수치화 하여 규칙을 발견하고
이를 통해 미래를 예측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엄밀과학이다.
그런데 우주시대가 도래한 이 시점에서도
사람들은 터무니없이 엄밀하지 않은 경험법칙에 의지한다. 왜 그런가?
우리는 과학을 통해 우주적인 시야를 갖추어 태양 에너지의 기원을 알게 되었고
그 에너지의 흐름을 명확히 파악하고 행성으로서의 지구를 인지하고
그 모든 과정을 통해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
우주적인 관점은 종교가 아닌 과학에서 온다.
자연과학적인 사고 방식, 우주적인 관점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연과학적 지식을 습득해야 한다.
간단히 요약하면, 철학과 종교는 뇌 활동의 부분이고, 뇌 활동은 자연현상의 일부이다.
그리고 자연현상을 설명하는 것은 자연과학이지
종교와 철학은 결코 자연현상을 예측가능하게 설명하지 못했다.
자연과학 독서를 빠뜨렸다면 심각한 결핍이다.
100 중 50을 놓친 것이라고 본다.
 
자연과학이 역사, 문학과 같은 독서 분야와 다른 점은 무엇인가?
공부꾼이라면 자연과학 독서에 특히 매진해야 한다.
이러한 주장은 10여 년 전부터 관찰해 온 몇 가지 현상을 근거로
오랜 세월을 거쳐 형성된 것이다.
첫째, 자연과학 전공자가 역사, 철학 등 인문학을 파고드는 사례는 많이 보아왔다.
하지만 인문학 전공자가 양자역학을 공부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보지 못했다.
이것은 확률적인 문제이다. 자연과학을 먼저 공부하는 것이
모든 분야를 균형있게 공부하기 위해 더 효과적인 방법일 수 있다.
둘째, 인문학자들은 표현 방식에 있어서 동일한 용어나 패턴이 반복되는 경우가 많다.
특히 나이를 먹을수록 스스로의 세계관이 견고하게 형성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자연과학에 비해서 닫혀있다는 생각이 든다.
 
독서 분야 중 유일하게 자연과학을 빠뜨린 것과
유일하게 소설을 빠뜨린 것은 다른가?
소설은 독서의 초기 진입벽을 낮추어
많은 사람들을 독서의 세계로 인도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하지만 소설로 시작한 독서가 소설로 끝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소설로 독서에 맛을 들인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재미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는 경우를 많이 봤다.
또 공부꾼의 관점에서 볼 때 소설은 효율이 떨어진다.
세계관을 갖추기 위해서는 우선 알아야 할 것들이 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진 정보량은 턱없이 부족하다.
소설은 투자한 시간에 비해서 얻는 정보량이 적다.
많은 부분을 통속적인 재미에 할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과 드라마는 인간 감정을 반복 자극한다.
감정은 뇌의 동원령 상태로 모든 뇌 자원을 감정적 상태로 몰입하게 하여
다른 뇌 활동을 왜소하게 만든다.
굳이 소설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인간 세계의 이야기에 과잉 학습되고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감정과 언어로 꾸며진 이야기는 이미 동어반복이다.
면밀한 관찰자라면 지하철에서라도 소설이 주는 메시지를 얻을 수 있다.
드라마나 소설은 말이나 상황이 소모되고 재생산되는 패턴의 반복이다.
모든 것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건과 느낌의 흐름이다.
하지만 우주에 인간밖에 없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문자를 기록한 것은 기껏해야 5천년,
천문학적인 관점에서 찰나적인 순간에 불과한 것이 인간의 문자 기록 역사이다.
이것이 과연 인간이 죽어서 돌아갈 우주와 무슨 연관이 있을까.
 
시는 어떻게 보시는지?
시는 소설과 다른 면이 있다. 한마디로 열린 시스템이다.
시의 언어는 누구에게나 다른 해석을 용인한다.
또한 과잉학습을 통해 제한된 용어로부터 탈출하도록 한다.
수학이 자연의 세계를 상징한다면 시는 느낌세계의 상징을 문자로 포획한다.
시는 매우 아름다운 것이다. 중학교 때부터 시를 읽어왔다.
특히 미당, 청마, 목월, 조지훈 시인의 시가 감성적으로 와 닿는다.
운율의 아름다움이라면 특히 박목월을 꼽는다.
현대의 시인 중에서는 황동규, 오규원 시인을 좋아한다.
나 또한 자연과학적인 현상의 경이로움을 시로 표현하려고 노력한다.
 
독서 분야를 크게 자연과학, 역사, 철학, 문학으로 나눈다면 그 비중을 어떻게 보시는지?
자연과학 70, 나머지 인문학 30 이다.
궁극적으로 50 대 50 정도가 되어야 할텐데,
많은 사람들이 자연과학을 멀리 해 왔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자연과학 비중을 높게 잡아야 한다.
독서를 꾸준히 해서 50 대가 되면
의도하지 않아도 균형을 맞추어 나갈 수 있게 될 것이다.
수학은 바탕으로 하는 자연과학은 인간 본래적 기능이 아니다.
숫자를 3 이상 헤아리지 못하는 부족들이 있다.
즉 수 감각은 학습으로 습득되어야만 한다.
이공계 위기의 출발은 
인간이 본래적으로 수학과 물리학을 즐겨하기 어려운 뇌 구조에서 기인한다고 본다.
 
음악이나 미술과 같이 책에서 얻을 수 없는
예술의 가치는 어떻게 평가하시는지?
그것은 몸의 문제이다. 몸을 단련하는 것과 머리를 단련하는 것은 같은 비중으로 본다.
등산 등으로 체력을 다지지 않고 책만 읽는 것은 우선 50점을 까먹고 들어가는 것이다.
몸의 욕망을 긍정해야 한다.
고대그리스 문화가 서구를 지배한 것은 몸을 숭상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우리나라 역사에서는 통일신라시대가 가장 몸의 욕망을 가치있게 보았던 시대였다.
어느 정도 부작용은 있지만 최근의 몸짱 열풍과 같은 현상은 자연스럽다고 본다.
머리를 단련하는 것 이상으로 몸도 단련해야 하며,
몸의 아름다움이 저급한 것으로 인식되어선 안 된다
몸의 효율적 기능은 뇌 능력의 전제 조건이다.
결국 뇌는 우리 몸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그 반대는 결코 아니다.
또 음악 감상과 같은 것은 뇌 자원을 엄청나게 사용하는 행위이다.
음악으로부터의 감동은 훈련하지 않고 쉽게 얻기 힘들다.
음악이 가진 상징과 패턴을 전두엽에 입력하고
훈련을 통해 그것을 해석할 수 있게 된다.
또 음악과 미술과 같은 예술이 좋은 것은 열린 시스템이라는 것이다.
동일한 패턴의 반복이 아니라 계속 새로운 것을 시도한다는 측면에서
끝없는 곳까지 펼쳐져 있는 세상이 음악과 미술의 세계이다.
 
자연과학과 동등한 입장에서 볼 만한 분야나 도그마는 무엇이 있는가?
자연과학과 동등한 입장에서 볼 만한 도그마는 종교이다.
서양의 철학사, 과학사는 종교 도그마를 깨뜨리는 과정이었다.
이후로 종교 도그마는 점차 자연과학에 자리를 내 주고 있다.
브라운대학 철학과의 김재권 교수는 '수반철학'이라는 화두를 던진다.
수반철학이란 곧 물리주의이다. 철학에서도 자연과학을 토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김재권 교수는 물리학을 가리켜 '이만하면 되지 않았느냐'라고 말했다.
물리주의는 인류가 그 동안 발견한 가장 효율적인 세계관이다.
물리주의에 의해 우리 주변의 현상에 대한 해석이 충분히 명확해졌고
이것은 다른 어떠한 철학 사조도 해내지 못한 일이었다.
현대 인류의 물리학 수준은 이만하면 됐다 싶을 정도로 충분하다.
우선 자연과학적 사실들을 받아들이고 그 위에 철학을 하고 종교를 해야 한다.
순서가 중요하다. 종교와 철학을 먼저 한다면,
그 도그마가 나머지 문을 모두 폐쇄시킬 수 있다.
 
자연과학이 다른 분야보다 중요하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인생은 많은 경험법칙과 상식 선에서 해결된다.
하지만 인간의 죽음 이후에는 무엇이 있는가?
우주로부터 온 원자들이 인간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데,
죽음이란 그 원자들이 우주 공간에 흩어지는 현상이다.
원자가 우주로 회귀하는 현상이 죽음의 일부분일 수는 있지만,
일단 이 현상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뜬구름 잡는 얘기가 아니고 이것은 바로
우리 모두에게 몇 십년 후에 100%의 확률로 닥치게 될 현실이다.
확실한 것에 배팅하자.
 
자연과학을 모르면 그 자체로 불행한 것인가?
비극적 희극이다. 제한된 인식 내에서 살아가는 것.
인간의 특성은 매니아 기질이다.
사람은 누구나 어떤 것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그것에 집중하는 속성이 있다.
그런 성질을 이해하고 인정하지 않으면 오히려 그것을 깨뜨리기 힘들다.
매니아 기질을 컨트롤 하지 않으면 좁은 세계관에 갖히기 쉽다.
인식의 틀을 부수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자연과학적 사고이다.
 
자연과학을 모르고 사는 사람이 스스로 충분히 행복하다면?
말하자면 천년 전의 인간과 다를 바 없이 사는 것이다. 그들도 행복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연과학에 쉽게 다가서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가 엄밀한 자연과학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걸림돌은 '과잉 학습'이다.
우리는 인간과 언어에 과잉 학습 되어 왔다.
지혜, 마음, 진리, 사랑, 이성과 같이
두루뭉술하고 개념이 불확실한 용어들만 사용하다 보면 생각이 뻗어나가질 못한다.
이성이란 용어 보다는 비교, 예측, 판단과 같은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자연과학지상주의에서 휴머니티는 어디에 있는가?
휴머니티는 학습에서 온다.
왜냐하면 학습은 변화의 가능성을 열어둔다.
언제든지 더 정확한 예측가능한 학설이 나온다면, 지난 도그마는 언제든지 양보한다.
그것이 바로 인간적인 것이다.
자연과학적 깨달음은 철학이나 종교와 마찬가지로 감동을 주고 인생을 바꾼다.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지면 삶도 달라진다.
불교TV <뇌와 생각의 출현> 강의를 들은 독자들로부터
인생이 바뀌었다는 피드백을 많이 받았다.
 
다른 분야를 제쳐두고서라도
자연과학 독서를 다른 사람들에게 권유할 만한 이유나 정당성은 무엇인가?
사람은 자기가 만든 환경에 의해 다시 리모델링 된다.
주위 사람들에게 자연과학 독서를 권유하는 것은 환경을 바꾸어 가는 과정이다.
내가 공부할 환경을 만들기 위해 주위에 공부할 사람을 모은다.
또 지난 수세기 동안 종교와 정치 도그마에게 내받쳤던
우리의 열정을 자연과학으로 되돌리도록 사회 분위기를 만들고 싶다.
 
자연과학 독서가 다른 분야의 독서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인가?
모든 분야에 자연과학이 서서히 침투하고 있다.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10년 전만 하더라도 기상 예보에 비가 올 가능성을 확률적인 수치로 얘기하지 않았다.
기업의 문화 지표를 수량화하는 방법을 도입한 경영이론가는
기업문화 계량화로 세계적 학자가 되었다.
심지어 시의 언어도 수학적으로 계량화될 때가 올 것이라고 본다.
계량화는 비인간화가 아니라, 자연의 본질에 가까워 지는 것이다.
디지털이라는 계량화 가능한 체계 덕분에 IT 혁명이 가능해졌고,
인간사이의 소통이 급속히 증가했다.
모든 시스템이 계량과, 수치화의 길로 접어들고 있다.
자연과학을 공부해 두면 나중에 다른 어떤 분야를 접하더라도 그 토대가 될 것이다.
미래에 자연과학이 인류 문화 전반에 걸쳐 더 깊이 침투할 때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자연과학적 사고는 보편타당하며 효과적이다.
 
자연과학 도그마는 옳은 것인가? 좋은 것인가?
효과적인 것이다.
 
자연과학 도그마가 사람들을 변화하도록 하는가?
많은 사람들이 불확실한 죽음 이후의 세계를 위해 많은 에너지와 시간을 소모한다.
하지만 죽음 이후는 원자로 돌아간다는 사실 이외에는 확실한 것이 없다.
왜 확실하지 않은 것에 배팅하나.
'내가 우주다', '내가 은하다' 라는 생각은 삶을 변화시킬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죽은 후에 내 몸을 구성하고 있는 원자들이 흩어질 때
그것이 우주로 돌아가면서 모든 것이 증발한다.
'So what?' 이라는 질문조차 증발한다. 휴머니티의 증발이다.
남는 것은 그것을 가능하게 만든 끝없는 시공뿐이다.
 
열린 시스템 얘기를 많이 하셨는데 닫힌 시스템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닫힌 시스템의 대표적인 것이 종교다.
유일신을 믿는 사람은 자연과학을 수용하기가 상대적으로 어려울 것이다.
 
끝으로 인터뷰 소감 한마디?
평소에 생각하던 화두를 물어줘서 고맙다.
인간은 환경적 존재이다. 환경을 스스로 만드는 일에 가치를 부여하고 싶다.
같은 느낌을 가진 사람들끼리 연결되고 더불어 살 때 더 본질적인 존재가 된다.
 
존재하는 것은
개체가 아니라
연결이다.
 
개체는 그 연결의 마디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