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편의 몽골 이야기 전해 드립니다.

고대문명교류사의 저자인 정수일 한국문명교류연구소장의 이야기와 탐험가 남영호씨 이야기입니다.

 

<초원, 실크로드를 가다> (21) 불모의 땅 고비 사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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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타이 고비 사막의 구릉지대

 

바얀혼고르의 새벽 공기는 유난히도 상쾌하다. 간밤엔 어둠 속이라서 지형을 살필 수가 없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창문을 활짝 여니 사방이 탁 트인 사막 천지가 눈앞에 펼쳐진다. 여기가 바로 고서에 나오는 그 ‘한해’(瀚海, 질펀한 바다), 즉 고비 사막이다. 우리는 지금 그 망망한 ‘모래 바다’를 헤쳐 가는 일엽편주(一葉片舟)에 몸을 싣고 있다. 여기까지 오는데도 몇 군데서 고비사막의 언저리를 지났지만, 이제부터는 언저리 아닌 한복판에서 신비스러운 고비의 ‘내음’을 만끽하게 될 것이다

 

‘고비’의 몽골어 뜻에 관해 ‘풀이 잘 자라지 않는 거친 땅’, 혹은 ‘건조하고 황막한 초원’이라고 조금은 다른 표현을 쓰고 있지만, 내용은 진배없다. 고비를 거닐다 보면, 불모의 땅으로서 황막하기는 한데 가끔 풀이나 관목이 자라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그리고 오아시스를 낀 곳에서는 푸름이 도는 초원도 눈에 띈다. 지질학에서는 식물이 자라기 힘든 황막한 지역을 ‘사막’이라고 한다. 육지 면적의 10분의 1( 1500만㎢)을 차지하는 사막은 위치에 따라서 크게 열대사막(위도 15~30도 사이)과 중위도사막(위도 40도 부근), 한랭사막(남북극 지방)으로 구분하나, 표면을 형성하는 물질에 따라서는 모래사막과 자갈사막, 암석사막으로 나눈다. 모래사막은 부드러운 모래로 덮인 사막이고, 자갈사막은 자질구레한 자갈(조약돌)로 된 사막이며, 암석사막은 강한 바람의 침식작용으로 인해 노출된 암석이 깔린 사막을 말한다. 그 가운데 고비는 중위도에 자리한 자갈 및 암석사막에 속한다.

 

고비의 암석사막은 대체로 산기슭에 펼쳐져 있다. 그런가 하면 3%의 모래사막도 끼여 있다. 이렇게 보면, 고비는 나름의 특징을 지닌 복합적인 사막으로서 희귀한 동식물을 비롯해 섭씨 40도가 넘는 한여름에도 시원한 얼음을 만날 수 있는 율링암 계곡(독수리 계곡)과 세계에서 가장 넓은 자연동물공원인 그레이트고비공원 등 연구거리와 볼거리가 많은 지구상 몇 안 되는 사막지대다

 

몽골 초원 실크로드 답사.jpg

 

고비사막은 세계에서 다섯번째로 큰 사막이다. 서쪽의 천산산맥과 동쪽의 대흥안령산맥, 그리고 북쪽의 알타이산맥과 항가이산맥, 남쪽의 기련산맥과 음산산맥, 이렇게 사방이 산맥들로 에워싸인 대분지다. 동서 길이는 1600여㎞, 남북 너비는 약 500~1000㎞에 달하는 드넓은 활모양의 지대로서 면적은 약 130만㎢나 된다. 기후는 극심한 대륙성 건조기후로서 1월에는 영하 40, 7월에는 영상 45도까지 큰 폭으로 오르내리고 세찬 바람이 불어대며 식물이래야 고작 홍류(紅柳)나 낙타풀 같은 내한성 식물뿐이니 제아무리 강인한 유목민이라고 한들 살기란 이만저만 어렵지 않다. 그래서 인구밀도는 ㎢당 한 사람도 채 안 된다. 무엇보다 큰 문제인 물은 거개가 사막 언저리의 지하수에 의존하는데, 고갈이 다반사며 어쩌다가 비가 와서 생긴 지상의 물길도 오래 가지 못하고 땅 속에 스며들어 자취를 감춘다. 군데군데 자그마한 호수가 점재해 오아시스를 이루고 있기는 하지만 짠물이 대부분이어서 용수로서는 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각박한 환경에서 문명이 창출된다는 토인비의 ‘도전과 응전 원리’가 아직 여기서는 그 변()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을 성싶다

 

일찍이 13세기 후반 사막의 언저리를 서에서 동으로 횡단한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에 의해 처음으로 고비가 세상에 알려진 이래, 많은 탐험가들의 호기심을 자아냈으나 탐험에 성공한 선례는 별로 없다. 그러다가 중국 과학사에 길이 남을 장거로 평가 받는 ‘서북과학고찰단’의 횡단 탐험에 의해 고비의 수수께끼가 비로소 한 꺼풀 벗겨졌다. 스웨덴의 유명한 탐험가 헤딘과 베이징대학 교무처장 쉬빙창(徐炳昶)을 공동 단장으로 하고 고고학자 황원비(黃文弼) 등이 참가한 이 고찰단은 1927 5월 베이징을 떠나 내몽골의 보터우(包頭)와 한대 이래 북방의 핵심 요새였던 거연(居延)을 거쳐 신장의 하미(哈密)까기 무려 9개월 동안 고미사막을 동에서 서로 가로질렀다

헤딘은 <고비 사막의 길>이란 탐험기를 펴내 험난한 탐험 노정과 그 결과를 상세히 소개하면서 고비의 실태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초당 30m 11급 설한풍으로 길을 잃어 광야에서 며칠씩 헤매기가 일쑤고, 식량과 물이 떨어진 아사지경을 몇 번이고 넘나들며 결국 함께 떠난 292필의 낙타 가운데서 살아남은 녀석은 154필뿐이었다. 행로의 전 과정은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절지’(
絶地, 들어갈 수 없는 땅)를 넘고 넘는 승위섭험(乘危涉險 , 위태롭고 험난함을 무릅쓰고 나아감)의 연속이었다. 도중에 헤딘은 급성담석증에 걸려 진통제를 맞아가며 한 달 동안 들것에 실려 목적지 하미에 입성한다. 당시 베이징대학 학생으로 고찰단에서 기상관측 기록을 맡았던 최연소 단원이며 유일한 생존자인 베이징대학 지구물리학부 리셴즈(李憲之) 교수의 회고담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일신의 안일과 작은 세계를 버린 거룩한 사람들에 의해 더 큰 세계가 펼쳐지고 역사는 이어져가는 법이다.

 

고비 사막을 달리고 있는 답사차량.jpg

 고비 사막을 달리고 있는 답사차량

 

알타이시까지 380㎞를 달려야 하는 오늘의 일정도 만만찮다. 여느 때보다 한 시간 앞당겨 바얀혼고르 호텔을 나섰다. 사막의 아침은 쾌청하고 싱싱하다. 두 시간쯤 신나게 달리다가 야트막한 언덕바지에 차를 세우고 휴식을 취했다. 드높은 청청 하늘엔 뭉게구름이 두둥실 떠있다. 한참 한 자리에서 머뭇거리다가도 서서히 자태를 바꾸기도 하고, 가뭇없이 사라지기도 한다. 그러다간 또 다른 흰 솜구름이 어디선가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한 무리의 양떼가 앙칼진 목동의 채찍 소리에 ‘음매 음매’ 화답하면서 언덕을 넘어 어디론가 가버린다. 이윽고 서너 말의 쌍봉낙타가 가시 돋힌 낙타풀을 질근질근 씹으며 뒤를 따른다. 일행 중에는 휴식 때마다 즐거움을 선사하는 일군의 젊은 재간둥이, 귀염둥이들이 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예능과에 재학 중인 몇몇 학생들이다. 음악과의 김보라와 한국예술학과의 김보미 자매, 전통예술원의 최혜림, 디자인과의 김소인, 연기과의 김성경이 바로 그들이다. 내내 명랑한 얼굴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어리광도 부리며 흥과 웃음을 몰고 다닌다. 아르바이트로 이번 여행비를 장만한 장한 학생도 있다. 새것에 민감하고 앎에 열정을 쏟는 생기발랄한 그들에게서 나라의 밝은 미래가 읽혀지니 사뭇 흐뭇하고 자랑스러웠다.

두 시간쯤 더 달리자 나지막한 산기슭을 흐르는 베이 드라그강이 나타난다. 강을 건너자마자 제법 깔끔한 흙벽집 몇 채가 나타나기에 그중 하나를 골라 찾아갔다. 간판은 달지 않았지만, 집 안에 식탁 여러 개가 마련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과객들을 위한 식당임이 틀림없다. 점심을 부탁하니 주인은 기꺼이 응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식탁엔 구수한 냄새를 풍기는 럄샤가 올라왔다. 양고기를 삶은 물에 칼국수와 감자, 당근을 함께 넣어 끓인 국수인데, 국물이 있는 것이 어제 점심 불가 마을에서 먹은 초우번과 다르다. 이를테면 양고기탕면이다. 시원하고 구수한 국물이 있어 한결 구미를 돋우니 다들 두 그릇씩 너끈히 비운다. 보아하니 이 집은 그 옛날의 사라이격이다. 이곳 사정을 잘 몰라 무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사라이’란 서아시아 일원에서 대상을 위해 사막에 지어놓은 숙관(
宿館)이다. 대체로 낙타의 1일 여정 거리에 준해 약 30㎞ 간격씩 짓는 이 사라이는 대상들의 숙박소이자 통과료를 받는 세관이기도 하고, 대상들 서로가 만나 물품을 교환하거나 팔고 사는 교역소이기도 하다. 흔히들 사막인들을 겁탈이나 일삼는 흉포한 사람들로 매도하지만, 사실은 가장 순박하고 다정한 사람들이다. 보통 사라이에서는 첫 2~3일간은 무료이고, 그후부터 숙박료를 지불한다. 사정이 여의치 않을 때는 전당물로 대신하기도 한다.

오후 3시 반, () 급에 해당하는 분자간시를 지났다. 여기서부터 한참은 자갈사막이 펼쳐지는데, 드문드문 키 낮은 관목들이 다보록하게 엉켜있다. 뙤약볕에 마냥 음덕을 베풀고 있는 그 나무 그늘에서 양떼들이 더위를 식히고 있다. 그런데는 민둥바위도 한 몫을 하고 있다. 이 거친 불모의 땅에도 이처럼 하늘의 은전이 베풀어지고 있으니 그저 하늘에 감지덕지할 따름이다. 그러다가도 무연한 자갈사막에 들어서면 길이 묘연해진다. 방향도 제대로 안 잡히는 모양이다. 이곳을 몇 번이고 오갔을 우리네 밴 기사들도 자주 길을 헛갈려 지나가는 손들이나 저 멀리 홀로 있는 게르에 찾아가서 길을 묻곤 한다. 그럴수록 길은 지체되고 기사들은 초조해진다. 그런 탓인지 오늘은 유난히도 바퀴에 펑크가 자주난다. 한 차에 펑크가 나면 나머지 4대는 한결같이 멈춰 선다. 그러면 기사들은 몸에 밴 관성처럼 너나 없이 팔을 걷어붙인다.

누구의 탓 한번 안 하고 흥겹게 서로가 서로를 돕는 그들의 모습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그러한 모습은 분명 그들의 마음속에 기둥으로 자리한 어떤 도덕률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그렇다. 위기에 빠진 사람을 돕는 것은 몽골사람들의 전통적 윤리도덕관이다. 이 대목에서 그들은 조상 칭기즈칸의 실례를 든다. <몽골비사>에도 나온 얘기지만, 타이치오트 씨족에서 도망친 테무진(칭기즈칸)이 소르칸시라의 집으로 피신했을 때, 그가 받아들이기를 꺼리자 그의 두 아들은 “시바우칸(새 이름)을 투림타이(새 이름)가 수풀 속으로 추격해 오면 수풀은 시바우칸을 구해준다”라는 당시의 격언을 인용하면서 아버지를 설득시켜 끝내 테무진을 구원한다. 뿌리가 깊을 때 체화된 도덕률의 샘은 마르지 않는다.

석양이 사라지고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하자 물기 빠진 풀잎처럼 육신이 나른해진다. 자꾸 눈앞에 환영이 어른거리더니 갑자기 뽀얀 황사가 떠오른다. 어쩌면 고비에 대한 조건반사일 것이다. 하기야 한 해에 몇 번씩 동남부 고비사막에서 불어오는 황사의 공포에 시달리곤 했으니깐. 초속 40m의 강풍에 실린 모래먼지가 하루만이면 우리 한반도에 10t씩이나 날아와 서울 하늘을 잿빛으로 뒤덮는다. 그 발생 현상이 해마다 빨라져 지금은 봄이 아닌 겨울철 2월부터 시작해 발생 일수가 1980년대에 비해 3배 이상으로 늘어났다. 고비사막은 강수량이 40년 전보다 30% 이상 줄어들었으며 평균온도는 2도나 상승해 꽁꽁 얼어붙어야 할 겨울철에도 영상 날씨를 보이고 있다. 지난 몇 년 동안 60여개의 호수가 말라붙었으며 매해 서울 면적 6배 크기의 새로운 사막이 생겨나고 있다. 대황사재앙의 예고다. 일본에까지 날아가니 이제 황사재앙은 발원지인 몽골뿐만 아니라 중국과 한국, 일본 등 동북아 전체의 큰 환경생태문제로 악순환하고 있다.

다들 원인은 지구온난화에 따른 기상이변이라고 하면서 해결 방도를 에코벨트 같은 인공 숲 조성에서 찾고 있다. 물론 틀리지는 않다. 그러나 배기가스를 마구 뿜어내 기온의 상승을 부추기는 인간의 해악, 사유화로 인해 사막의 초목을 마구 고갈시키는 또 다른 인간의 해악, 이 자업자득을 인간은 자성해야 한다. 그러면서 “내일 세계의 종말이 올지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의지와 신심, 낭만으로 이 재앙에 맞서야 할 것이다.

갑자기 포장길이 나타나면서 멀리서 반짝거리는 불빛이 일장 악몽에서 깨어나게 한다. 945, 우리네 장급 수준의 한 호텔에 도착했다. 12시부터 아침 6시까지는 단수이고 화장실에는 비누나 화장지가 없으며 냉장고와 텔레비전은 가동이 안 되니 있으나마나하다. 바닥엔 주단을 깔고 벽엔 알타이산 풍격화가 걸려있다. 현대화로 가는 길에서 겪는 진통과 부조화의 한 단면이다. 너그러이 이행하고 받아주자.

 

전문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6241629455&code=900306

 

초원 실크로드를 가다 전편 아래 참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serial_list.html?s_code=at121&page=4

몽골 이야기는 (21)편부터 (32)편까지

 

[경향과의 만남]연재초원 실크로드…’ 완결 정수일 한국문명교류연구소장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002221749175&code=210000

 

 

[Real Adventure] 1,600km 고비 사막 도보 횡단, 탐험가 남영호
당신은 지금 어느 사막을 걷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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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몽골이 가장 더운 시기인 7 21일부터 9 12일까지 50여 일간 고비 사막을 도보로 횡단한 탐험가 남영호. 그가 다시 또 다른 사막을 향해 출발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미 고비 사막 이전에도 두 개의 사막을 다녀온 경험이 있는 그는 뭔가 우리가 모르는 ‘사막을 건너야 하는 이유’를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 ‘사막을 건너는 법’을 아는 것이 분명하다.

 

무모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베리아 반도 800km를 도보로 횡단하고, 유라시아 대륙 18,000km를 자전거로 횡단했으며, 사막을 두 번이나 건넜다. 그러고도 모자라 또다시 사막 횡단을 준비하고 있으니 당연한 반응이다. 무모함이란 무엇인가? 10층 건물 옥상에서 맨 몸으로 뛰어내려 살지, 죽을지 실험해보는 것 정도는 돼야 하지 않겠는가? 흔히들 모험가나 탐험가는 목숨을 걸고 도전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굳이 그 고생을 하면서 죽을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 그들은 절대 자신의 생명을 담보하지 않는다. 모든 모험과 탐험에 최대한 살 길을 만들어놓고 나서야 비로소 길을 떠난다. 물론 보통의 삶과는 달리 예측 불가능한 상황이 발생할 확률이 높고, 그 과정에서 자칫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것은 맞다. 그러나 그걸 알기에 더더욱 많은 준비를 하는 게 또 모험가고 탐험가다. 나도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무모한 탐험은 단 한 차례도 한 적이 없다. 호기심을 충족하자고 절대로 죽음을 담보하지도, 할 수도 없다.

 

탐험가 남영호의 탐험 일지
1997. 07~08
이베리아반도 지중해안 800km 도보 횡단
2001~2006
국내외 등반 및 탐사 (산악전문지 사진기자 재직)
2006. 05~12
유라시아대륙 18,000km 자전거 횡단 중국, 파키스탄, 이란, 터키, 불가리아,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갈

2009. 10
‘타클라마칸 사막’ 450km 도보 종단(세계 최초)
2010. 04~06
‘갠지스 강’ 2,510km 무동력 완주(세계 최초
)
2010. 08~09
수마트라섬 멘타와이군도 정글 탐사

2011. 07
유럽알프스 ‘투르드 몽블랑’ 트레킹 일주
2011. 07~09
고비 사막 1,600km 도보 횡단

2011. 12 키나발루산(4,095m) 등정
2012~
‘세계 10대 사막 무동력 횡단’ 프로젝트 도전

 

사막에서 살 구멍을 찾다
고비 사막 횡단을 준비하는 데는 6개월이 걸렸다. 가장 큰 걸림돌은 현지에 대한 정보 부족이었다. 몽골이라고 해봐야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대부분 울란바토르 정도의 대도시 여행 정보 정도였는데, 사실 그곳을 빼고는 다 작은 마을 수준이니 여행 정보조차 있을 리 없었다. 아는 것이라고는 단지 TV에서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게르에 살며 유목 생활을 한다는 정도인데, 서울과 부산을 서너 번은 오가는 정도인 1,600km에 이르는 길을 어떻게 가야 하고, 중간에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곳에는 무엇이 있으며, 그곳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한 정보도 없이 어떻게 떠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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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월의 시간 대부분을 루트 정보 모으는 데 할애했다. 다음으로 출발지와 종착지를 정하고, 총 거리에 대한 하루마다 걸어야 할 거리를 계산했다. 그러자 50일 정도의 탐험 기간이 산정됐다. 그에 따르는 물과 식량, 장비는 자연스럽게 산출할 수 있었다. 사실 보통 사람이 한두 번의 탐험으로 이런 계획을 짜기는 쉽지 않다. 8개월간의 유라시아 대륙 횡단을 하기 전, 스물여섯 살 때부터 한 등산 전문지의 사진가로서 산악인들의 탐험을 4~5년간 쫓아다니며 함께 등반했던 경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등산 전문지에 안 들어갔으면 탐험가의 길을 안 걸었을까? 아니다. 대학교 3학년 때 전공을 다큐멘터리 사진으로 선택하는 순간부터 모험 사진을 찍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고, 그러려면 모험을 배울 기회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산악 등반 사진가가 된 것은 계산된 선택이었다. 넓은 범주에서 산악인들 역시 탐험가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우리나라의 탐험은 주로 등산가들의 등반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러니 모험이나 탐험 기술을 가르쳐줄 사람들은 그들밖에 없었다. 분명 산악인들의 산악 등반 방식과 사막 횡단은 내용에서는 물론 방식도 다르다. 하지만 그때 산악인 선배들이 계획하고, 준비하고, 실행에 옮기는 그 모든 것이 지금의 토대가 되었음은 분명하다

 

탐험가 남영호의 사막을 건너는 법 7


1
사막에 대한 환상을 버려라
저녁노을이 지는 사구를 물들인 황금빛, 짙은 어둠이 내린 사막 위로 쏟아져내리는 별빛? 우리는 미디어가 보여준 사막의 환상에 취해 있다. 사막에 그런 것은 없다고 생각하라. 기대가 크면 실망이 크고, 실망이 크면 버티기 힘들어진다.
2
가까이 있는 것을 멀리 봐라

극지방이나 사막에서 조난 당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목표 대상과의 거리 개념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한 시간 걸리는 듯 보이는 거리가 6~7시간 걸릴 수가 있다는 뜻이다. 거리를 착각하면 페이스 조절을 실패하게 되고, 이는 곧 급격한 체력 소모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개활지에서는 거리감이 몇 배나 차이난다는 사실을 꼭 명심해야 한다.

3 덥다고 옷을 벗지 마라
사막에서 흘리는 땀의 양이 중노동할 때보다도 많다. 그만큼 물을 채우면 그만이지만 그럴 수 없는 게 사막이다. 방법은 땀을 최소한으로 흘리는 수밖에 없다. 옷을 벗어서 햇볕에 노출되어 흘러내리는 땀까지도.
4
페이스 조절을 하라

사막을 건너는 것은 일종의 마라톤이다. 경쟁자가 없는, 오직 자신과 싸우는 마라톤. 중요한 것은 과욕을 부리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정해진 거리에 대한 욕심보다는 지치지 않고 꾸준히 지속할 수 있는 컨디션을 유지해야 한다
.
5
태양에 맞서지 마라

한낮에는 무조건 그늘을 찾아 휴식을 취하라. 사구 그늘이 좋으며, 사구 그늘이 없으면 모래를 파서 들어가는 것도 좋다. 안쪽 모래는 차갑기 때문이다. 이동 시간은 해 뜨고 난 후 2~3시간과 해지기 전인 4~5시경부터 해지기 전까지가 가장 좋다. 밤에는 길 잃을 위험이 있으므로 절대 이동하지 마라
.
6
짠 음식을 피하라

사막에서 짠 음식은 물을 부른다. 물을 부르면 탈수 증상으로 이어지기 마련. 그렇다고 염분을 전혀 섭취하지 않을 수는 없으니 가능하면 저염식을 하자
.
7
걷는 법을 배워라

걷는 자세가 잘못된 사람들이 많다. 제대로 된 보행법으로 걷지 않으면 오래 걷기가 힘들다. 어떻게 걷느냐에 따라 오래 걸을 수 있느냐가 다르므로, 평소에 트레킹폴로 걷는 연습을 많이 해야 한다.

 

고비 사막은 심심할 겨를이 없다
산악인들은 에베레스트 산의 봉우리 정복에 앞서 사전에 베이스캠프를 설치하고, 정상 정복은 물론 하산에 필요한 식량 및 장비를 사전에 저장한다. 한곳으로 올라 같은 곳으로 하산하기에 모든 식량과 장비가 필요치 않은 것이다. 또 일단 정상을 향한 등반을 시작하면 등반은 신속히 이뤄지기에 개인이 짊어질 식량과 짐이 많이 필요치 않다. 하지만 횡단으로 가로지르는 탐험은 갔던 길로 돌아오지 않고 매일 다른 길을 가니 수십 개의 베이스캠프를 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자동차를 타고 횡단하거나 중간 중간에 헬리콥터나 비행기로 보급을 받아도 되지만 이는 탐험의 의미를 퇴색시킨다.

탐험 중에 최고라 인정받는 세 가지 요소가 있다. 무동력, 무지원, 단독이다. 고비 사막 도전도 무동력, 무지원 탐험이다. 이런 탐험의 관건은 일정 내내 스스로 의식주를 해결하는 것이다. 허리에 묶어 끌고 갈 트레일러에 각종 생존 장비들과 함께 일주일간 먹을 동결 건조 식품과 1.5리터 생수 40통을 실었다. 계획한 기간은 50일이지만 식량을 그 정도로 준비할 수는 없었다. 혼자서 끌고 갈 수 있는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산악인의 등반 탐험과 다른 점 중 하나가 바로 이 점이다. 결국 방법은 스스로 탐험 기간 내내 체력적으로 지치지 않으면서, 동시에 얼어 죽거나 굶어 죽지 않을 최소한의 정정한 수준을 유지하는 것뿐이다. 일주일 치 식량이 떨어지기 전에 채워나간다는 대전제를 상기하며 마침내 고비 사막의 동쪽 끝인 샤인샨드를 출발했다. 해가 뜨면 3~4시간을 걸었다. 한낮에는 사구 그늘에 들어가 더위를 피했다. 한여름의 고비 사막은 최고 온도는 53℃까지 육박하니 움직이는 것은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였다. 사구가 없는 곳에서는 모래를 파고들어 앉았다.

 

태양에 노출된 부분과 달리 안쪽 모래는 상당히 시원해 더위를 피하기에 충분했다. 간혹 나무 그늘에서 쉬기도 했는데, 사막은 건조한 곳이라 그늘에만 들어가도 시원함을 느낄 수 있다. 그렇게 쉬다가 해지기 2~3시간 전인 오후 5, 6시경에 다시 이동했다. 밤에는 이동하지 않았다. 사막은 평지와 달리 지형이 불규칙한데, 밤중에는 전등을 비춰도 분간할 수 없어 길을 잃을 위험이 컸기 때문이다. 마을은 보통 3일 정도면 나타났다. 마을이라고 해봐야 50가구나 100가구 정도의 마을이었고, 때로는 10가구도 안 되는 마을도 있었다.

마을이 없는 곳에서는 간간이 유목민의 게르를 만나기도 했다. 또 눈에는 보이지 않는 먼 곳에서 망원경으로 나를 발견하고 말을 타고 마중 나오는 유목민들도 있었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그들이 있고, 그들이 사는 곳이 있다는 것은 기댈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런 사실만으로도 안도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고비 사막을 걸을 때는 늘 심심할 겨를이 없었던 것 같다.

 

타클라마칸 사막을 종단할 때는 거리는 고비 사막과 비교해 훨씬 짧아 19일밖에 걸리지 않았지만 정신적으로는 훨씬 힘들었다. 건기에는 사라지는 건천을 따라 종단했는데, 그곳은 사방이 온통 모래 사막으로만 이루어져 며칠을 걸어도 같은 풍경이었다. 어제가 오늘 같은 곳에서는 아무리 개활지라도 고립감을 느낄 수밖에 없고, 나중에는 ‘내가 이곳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까?’라는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다. 이 공포가 사람을 나약하게 만드는 것은 당연하다. 그때와 비한다면 고비 사막은 매일매일이 새로웠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이동할수록 모래사막부터 황무지, 너덜, 나대지에서 광야와 초원에 이어 알타이 산맥이 펼쳐진 끝자락에 닿기 때문이었다. 이런 다양한 풍경은 사진가로서도 즐거움이지만 탐험가로서도 즐거운 일이다. 하루하루 자신이 앞으로 나아가가고 있다는 것, 일이 진전되고 있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한다는 것뿐만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만나고 싶어하는 탐험가에게 궁극적인 기쁨을 선사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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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

 

나는 다시 사막으로 간다, 나를 위하여!
탐험가들의 목표는 즉흥적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고 박영석 대장의 탐험가로서의 삶은 14좌 완등이란 거대한 구상 아래 이어진 결과였다. 마찬가지로 이번 고비 사막 횡단은 단편적인 탐험이 아니라 세계 10대 사막을 향한 횡단을 위한 첫 걸음이었다. 타클라마칸 사막은? 그것은 사막 횡단 프로젝트의 일환이 아니었다. 타클라마칸 종단은 사진가로서 오랫동안 매달려온 주제인 ‘혜초’와 <왕오천축국전>과 관련한 탐험이었으며, 세계 10대 사막에 들지도 않는다.

세계 10대 사막 횡단이란 목표는 다시 세계 3대 강 완주라는 목표와 세계 밀림 탐험이란 목표 아래 하나의 궤를 이룬다. 한마디로 자연과 인류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사막과 강, 밀림을 횡적으로 이동하여 완주하는 것이야말로 탐험가로서의 구상이다. 이 큰 틀에서 보면 1910년에 2,510km의 겐지스 강 완주는 세계 3대 강 완주라는 탐험가로서의 목표와 ‘혜초’와 관련한 사진가로서의 목표가 일치한 탐험의 결과였다.

탐험가로서 이제 조금 인지도를 알리고 있는 내게 요즘 많은 사람들은 묻는다. 왜 거기를 가느냐고. 예전에 산악인 선배들은 뻔한 대답을 했었다지. “산이 거기 있으니까!” 솔직히 잘 이해할 수 없는 선문답이다. 내 대답이 같은 의미인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내가 가진 답은 확실하다. 탐험가로서 ‘최고’가 되고 싶다. 혹시 ‘사람들에게 꿈과 감동을 주기 위해’라는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겠지! ? 너무 세속적인 이유라고 생각하는가?

그림을 그리는 친구에게 물었다. “왜 그림을 그리냐?” 글을 쓰는 친구에게 물었다. “왜 글을 쓰는 거야?” 직장을 다니는 친구에게도 물었다. “왜 그 프로젝트에 매달리는 거야?” 그들이 무슨 대답을 했을 것 같은가? 나의 대답 역시 그들의 대답한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나는 단지 탐험가라는 직업을 가진 내 자리, 내 위치에 성공하기 위해서 거기에 가는 것뿐이다. 꿈과 희망은 탐험가에게 말고 자신에게서 찾기를, 갖기를 바란다. 탐험가로서 그나마 줄 수 있는 것은 감동 정도이며, 최고가 되기 위해 겪은 경험적 지혜뿐이다.

전문 

멘즈헬스 2012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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