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8일


23시 30분 박자세 사무실 도착

거두절미. 박자세 사무실을 가득 채운 어마어마한 짐.

눈이 떼꼰한 채로 정신 똑바로 차리고 계신 김현미 쌤.

바로 오늘 퇴근시간 까지 일하고 그 어마어마한 노가다를 이골난

지겨움으로 해치워 버리는 박자세 골수 멤버들과 처음 와서도

바로바로 적응해서 일거리를 찾아하는 일반 회원들.

내가 이래서 셜록이 훈련소에 맡기고

이렇게까지 해야하나 축 처지고 슬펐던 기분을 별로 걱정하지 않았던 거다.

박자세 오면 이 살아있는 분위기에 당장, 정신 번쩍나서 유쾌해진다는 것을 알기에.

벤에 짐 싫을때, 정종실 쌤은 아예 날라다심에 입이 쩍~

죄송하더라. 박자세는 역시 나, 힘들어요라는 어리광을 쑥 들어가게 해줘서 좋다.


8월 19일


새벽 세시.

공항에서도 역시 노가다들을 하고 다들 쌩쌩하심.

박자세 회원 중에서 젊은 편에 속하는 내가 한 일이라곤 짐들을 질질질 끌고 다닌거

뿐이니 나 힘들어요 소리도 안 나옴.

최초로 박사님 강의 중에 졸아버렸음.

피곤한 정도가 아니라 제정신이 아니고 오한과 근육통이 몰려왔음.

이미 아침. 공항 로비에서 자는 사람도 없는 그 시간에 술취한 노숙자처럼 낯 모르는 사람들 사이로 숨어들어가 웅크리고 누워버림.


8월 19일

13시

울란바토르, 칭기스 칸 공항 도착.

도시도 시골도 아닌 풍경. 세련되지도 자연스럽지도 않다는 것이다.

그래도 반갑다. 박사님을 중심으로 똘똘 뭉친 학습광들이기에 서로간, 선생님 소리가 절로 나오며 존중하게 되는 박자세 회원들처럼, 박사님의 진지함에 우리와 마찬가지로 사뭇 진심어린 태도가 몸으로부터 베 나오는 현지 코디, 유로 아저씨와 기사분들께 회원들이 격려와 부탁의 염원을 담아 진심으로 박수치며 맞아들인다.




8월 21일

단체 생활이나 야영이 적응 되지도 않고 자연은 셜록이 산책로로서 적합한가에 초점이 맞춰진 내가 몽골의 초원에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며 며칠을 속으로 삯이다가 같은 조, 노복미 선생님께 이곳이 아름다우시냐 물어봤다.


이 초원이 아름답지 않아? 라고 물으신다.

오기전에는 다큐에서 말타는 몽골 유목 민족만 봐도 뜨거워지고 현지에 오면 쥰가르 제국의 최후가 눈 앞에 역동적으로 펼쳐져 보일것 같았으나 막상 오니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말씀 드렸다. 노선생님은 나도 저 나이에 저런 여유있고 자애로운 미소를 짓고 싶다 생각했던 그런 미소를 그저 보여주신다. 그걸로 좋은 풍경이다.


초원에 낙타와 낙타몰이 소년들이 나타났다. 관광객을 상대로 태우는 모양. 열 살 남짓한 소년들의 표정이 어찌나 다부진지 강남 자동차 딜러 이상으로 독했다. 소년들의 영업에 도움을 주고 싶으나 나는, 인간이 동물을 순하게 길들여서 타고 부릴 수 있게 만드는 행위가 싫다. 생태계의 원리니 고기로 먹는 것까지야 뭐라 겠느냐만 왜 이동수단이 발달한 지금까지 동물 등에 짐으로 올라타 괴롭히느냔 말이다.


마침, 옆에 계시던 박사님께, 동물학대가 아니냐고 오랫동안 품었던 질문을 하자, 그것은 사람에게 그렇게 길들여 졌기 때문이다. 시각을 달리해야 한다고 답해 주신다.


“지구상에 4천종의 포유류가 있어요. 그러나 아시아 대륙에는 소, 돼지, 닭, 개, 몇 종류 없어요. 인간이 지구를 지배하며 인간중심으로 재편된 거지요.”

아아, 그제서야 깨닳아 진다. 우리 강아지 훈련사가 가장 성공한 동물이 개 아니냐라고 했던 의미도 되새겨진다. 철저하게 인간 앞에서 누리는 지위의 개념이었다. 그리고 늘 궁금했던 왜, 우리가 사육하고 먹는 동물은 개와 고양이를 제외하고 모두 초식 동물일까가 라는 쉬운 의문에 답이 찾아졌다. 맹수가 아무리 위험해도 무기를 다루는 인간이 식용으로 사육 못할 이유가 뭐냐. 답은 굳이 그럴 필요 없다 였다. 위험하지 않은, 인간에게 순응하는 동물 만이 번성한다.



이 오랜 궁금증에 대한 답이 내가 나 밖에 없는 셜록이를 두고 몽골에 와도 충분한 가치가 될 것인지 염두해둔다.






8월 23일 17시


아르항가이의 고산지대에 들어섰다. 유로 선생이 주변에 살고 있는 야크를 설명한다. 선선한 고지대에만 살고 있으며 소와 다른점은 우유와 지방이 많고 고기가 질겨 울란토르에 사는 사람들은 못먹는다고 함. 어눌와 말투로 요점만 정확히 말하는 유로 아저씨를 박사님이 칭찬하심.


17시 30분


버스가 진흙에 빠져 기사분들의 작업이 이뤄지는 동안 아르항가이의 습지에서 휴식을 취한다. 근처에 계시던 박사님이 시내를 가리키신다.

“저길 보세요. 흐르는 물결을 따라 빛 알갱이들이 일랑거리고 동그란 타원형을 그리는 나뭇잎에 빛들이 반짝 거려요. 저게 느껴지지 않아요? 한국의 나무들은 저런 느낌이 아니에요.(박사님의 표현력이 정확히 기억나지 않음) 무엇을 보는가가 아니라 무엇이 보이는가가 중요해요.”

과학자이신 박사님이 힘을 뺀 채, 지친듯한 쇳소리로 이러한 감성을 일깨워 주실 때마다 가슴에 스며드는 허탈한 안쓰러움. -> 뜨끈하게 올라오는 감동이란 의미다. 


99차 천뇌가 끝나고 신양수 선생님이 개업한 두뇌 향상 사무실에 방문했을때도 저러한 모습과 목소리셨다. 회원들도 박사님도 99차 천뇌를 치뤄내고 지쳤있던 그때, 힘을 뺀 쇳소리로 이 만치 성장한 박자세를 회고 하셨다. 이룬다는 것은 충만한 허망함이었다. 비워진다는 의미와 같다.

"박자세 회원들 모두 잘 살아야 해요. 돈 많이 벌어야 해요. "

라고 박사님이 말씀하셨다.  그럼요. 아무렴요.

그때 무명 작가로 이 단체에 들어와 한발 한발 성장해가는 대견함을 밟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이런 상념으로 걷고 있는데 애석하게도 고스란히 간직하고프던 숭고함은 신체적 한계 앞에서 무너졌다. 몰랐는데 내 운동화는 앞머리에 방수띠가 전혀 대어지지 않아 습지에서 한발 한발 내딛을 때마다 진흙물이 가득 들어차 발이 흠뻑 젖는다. 해가 져가는 쌀쌀한 고지대의 습지에 발은 시렵고 몽고에 온 후로 보지 못한 뒷일로 인해 먹은 변비약은 배를 아프게 하며 설사가 지속됐다. 게다가 300미터 쯤 간격으로 여기서 하나 빠지고 저기서 하나 빠져 있는 세 대의 버스 중에 어느 게 내가 짐을 두고 내린 3번 버스인지 알 수 없어 습지에 발을 얼려가며 버스를 하나 하나 찾아 다닐때마다 하필이면 내 버스가 아니다. 화가 나서 아무도 없는 줄 알고 괴성으로 짜증을 부리는데 갑작스럽게 버스에서 정종실 선생님이 머리를 내미시며  왜 그래에? 그러신다. 허걱,

미진한 탐사 준비로 인한 시행착오와 신체적인 한계로 인한 코믹한 상황이 이후로도 계속 벌어졌다.

버스는 끝내 습지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통신도 되지 않는 이곳에 발이 묶였다. 습지에서 야영이 결정 됐다. 상황이 매우 안좋다고 나로서는 박사님께서 들어본 적 없는 말씀을 하셨다.


8월 24일 새벽


회원들이 자는 그 시각, 유로 선생님이 불러온 렉카차로 버스가 엔진소리를 내며 진흙에서 빠져나오려 안간힘 쓰는 소리가 들린다. 밖에서 회원 몇 분이 장작불을 켜고 불침번을 서신다. 그 불에 회원들의 운동화가 말라가고 있다.

습지에서 야영이 결정 됐을 때 회원들은 추운 고지에서 일사분란하게 맡은 일을 해 나갔다. 연세에도 불구하고 앓는 소리 한마디 없이 활기차게 움직이시며 오히려 나를 격려하시는 박자세 선생님들. 오늘 밤 역시 지치고 힘들지만 춥다라는 군소리는 입안으로 쑥 들어갈 수 밖에 없다. 내가 얼굴로 힘든 티를 내는 것 아닌가 걱정할 때 김영림 선생이 차분히 말씀하셨다. 아주 잘하고 있다. 70%는 전혀 티나지 않고 30%는 그냥 좀 힘이 빠졌나 보다 정도다 라고. 김영림 선생은 어느 순간에도 어떤 순간에도 불편을 드러내지 않고 과묵하고 친절하게 야영을 해나가고 있다. 어리버리한 내가 텐트 치는 일에 별 도움이 되지 못해도 과하게 나서지 않으며 내가 소외되는 느낌이 들지 않도록 여기 못질 하라고 못을 대주며 차근 차근 일거리를 알려 준다. 영림쌤은 도를 닦는 거야? 라고 건대 강의 후 같이 터미널에 갈 때부터 나는 이따금 묻곤 했다. 제2의 신양수 선생님은 김영림 선생이 되지 않을까 한다.


8월 24일 7시


밤에 피로와 추위로 고생하며 잠이 들어도 아침이면 상쾌한, 신기한 일이 매일 벌어진다. 이게 청정한 몽골 초원의 영향인가? 회원들도 모두 활기 차다. 밤사이 버스는 이미 고개 너머로 무시히 구조돼 가서 회원들이 걸어서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운동화가 마르지 않아서 슬리퍼를 신은 채 아르항가이의 고개를 넘었다. 걷다보니 발이 시려운지도 모르겠고 몸은 외려 가볍다. 언덕 정상에 오르는 풍경은 말해 무엇하리. 작품 사진이 현실에서 펼쳐 졌다.


이후로 고원지대의 동화거나 환타지 영화의 풍경들이 이어진다. 수목과 시냇물, 초원과 언덕들이 어우러지고 야크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다가 버스를 신기하게 쳐다본다. 우리는 그들의 구경거리다. 강아지 엄마들이 도심에서 최고로 뽑는 평화로운 산책로가 88올림픽 공원인데 이제 거기는 시시해서 못가겠다라고 생각하고 있던 차 뒤에서 회원 한 분이 그 말씀을 하신다.





8월 24일 13시


항가이 산맥의 게르를 방문, 천장으로 창문이 나 있고 바닥의 반은 카페을 깔지 않은 잔디인데 그로인해 실내 정원 처럼 아늑하고 예쁘다. 전화도 터지지 않는 그곳에서 위성으로 티비를 보신다. 천장을 통해 우박에 가까운 눈이 게르 안으로 내렸다. 많이 춥지 않으나 하루 사이에 사계절을 다 겪을 수 있는 몽골의 기후가 재미있다. 겨울에는 영하 30도 까지 내려가기 때문에 게르를 옮긴다고 유로 선생이 통역해 주셨다. 이곳에 겨울 탐험 올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고 유로 선생이 말씀하셨다.


주인댁 사모님께서 밀려든 탐사 대원들에게 여러 종류의 치즈와 야구르트 수태차를 푸짐히 대접한다. 식당에서 마셨던 수태차와 달리 구수하고 깔끔한 맛이었다. 몽골 치즈는 염도가 거의 없어 아기나 강아지에게 먹이기 좋겠다 싶었다. 경도와 모양이 매우 다양했는데 그 중, 크림치즈는 몽골 치즈 특유의 약간은 시큼 비릿한 맛이 없이 매우 고소해서 몇 번이고 손이 갔다. 음식 대접을 받을 때 손님이 왼손을 사용해서 집어먹으면 무례라고 한다. 나는 왼손잡이라 신경쓰지 않으면 실수를 할 수 밖에 없다. 실제로 실수, 박사님 사모님이 오른손!하시며 얼른 보시고 주의 주셨다. 아이고. 이런 덤벙거리기 쟁이인 나.


손님을 융숭히 대접하는건 이들의 문화라고 한다. 이들의 손님에 대한 대접 문화는 지민군이 아플때도 나타났다. 장염으로 급하게 병원에 실려간 지민군이 초음파를 찍었는데 유로 아저씨가 멀리서 오신 손님들이니 무료로 해주라고 하자 병원비를 받지 않았단다. 우리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에 웃음이 나왔는데 이것은 사회주의 문화가 남아있는 이들의 풍습이라고 한다.


게르 밖 초원에서 목줄 없이 자유롭게 다니는 대형견 둘이 있다. 이 아이들에게는 온 사방이 산책로다. 몽골에서 줄에 매인 개는 본 적이 없다. 찻길 옆에 동네에 사는 개들 마저도 말이다. 하기는 양, 염소, 소, 모두 방목되는데 개라고 묶어 놓을 이유가 뭐냐. (말이나 낙타가 한 마리 정도씩 매어져 있는 건 봤다.) 그저 차들이 빵빵하면 길을 비켜날 뿐이다. 그 중에 염소들이 찻길에서 엉덩이를 실룩거리며 아장 아장 달리는 모습은 강아지랑 흡사해서 어찌나 해맑고 귀여운지 모른다.


위의 두 마리의 대형견들은 초원 속에 여유롭게 자라서 도시에서 자라는 강아지들보다 예의가 있다. 자기들 앞에 차려진 사람의 식탁에 달려 들지 않으며 먹을 것을 주면 사람 손이 다치지 않도록 주의해서 먹는다. 어느 개도 먹이주는 사람 손까지 먹는 경우는 없으나 조급하면 개들의 실수로 살짝 물리기 쉽상이나 이 아이들은 받아먹기 힘든 슬라이스 치즈를 줘도 손이 다치지 않도록 매우 조심성 있게 배려한다. 또 몸을 살짝 쓰다듬어도 더 쓰다듬어 달라고 눕기까지 하는 아이들이었다.


게르의 주인 아저씨가 우리 버스가 지날 때 길 안내를 하셨다. 험준한 항가이 산맥에 들어서면서부터 마을 주민이 나와 길 안내를 하는 모습을 보곤 한다. 이러한 도움이 이들의 문화라고 한다.

항가이 산맥을 넘는 동안 유로 아저씨는 거의 밖에 나와 지휘하시니 걸어서 넘는 거다 마찬가지였다. 기사들이 수도 없이 무전을 해가며 가다 서다를 반복하고 적당한 길을 골라내 산맥의 정상에 다다르고 산맥에 들어선지 이틀째에 영하의 고지대에서 야영이 시작 됐다.


박사님은 감격에 차서 말씀하셨다. 유로 선생의 말씀에 의하면 우리가 아마도 최초로 버스로 항가이 산맥을 넘었노라고. 그 근거로 낮에 방문한 게르의 주인도 버스가 산맥으로 올라온 일은 본적이 없으셨단다. 이제와 얘기지만 기사들은 목숨을 걸었단다. 기사들이 그렇게 성심을 다하도록 만든 박사님과 유로아저씨의 서로에 대한 존중과 열성 또한 감동적이다.


영하의 밤 동안 회원들은 침낭을 뒤집어쓰고 밖에 나와 이 빙하지대의 지질과 별 강의를 들었다.



박사님은 우리를 어디로 이끄실지 모른다. 그러니 박사님과 김이사님이 낮에 열사인 땅이 밤이 돼서 추워봤자 얼마나 춥겠냐 파카가 필요하네 안필요하네 얇은 파카면 되네 안되네 뭐라고 옥신각신을 하시든 우리 박자세 회원들은 혹한기에도 끄떡없는 최고 품질의 침낭과 두꺼운 파카, 방수 운동화를  준비해야 할 것이다.  . 아프리카로 데려간다해도 혹한에 대비하자는 거. 수저와 보울은 안가져 가도 어찌어찌 해결되지만 최고로 따뜻한 침낭과 두꺼운 파카, 방수되는 운동화가 없으면 박사님도 예기치 못한 상황에 훈련이 덜된 일반인은 혹한에 시달리느라 아름다운 대자연의 별강의 시간에 별이고 나발이고  살고 보자가 될 수 있음을 강력하게 알려드리는 바이다. 



 

8월 26일


6시

아침에 일어났는데 안 춥다. 그 사실 하나가 행복하다. 추워서 화장실 가는 걸 참을 필요도 없이 바로 다녀왔다. 정말 신이 났다. 아침 메뉴로 나온 감자에 발라먹는 크림 치즈도 너무 맛있다. 안 그래도 게르에서 치즈를 챙겨 왔다. 비행기를 타고 셜록에게 배달될 예정이다.



11시 30분



고비 사막으로 들어서기 전의 따뜻한 초원.

안 그래도 춥지 않아서 신났는데 김이사님이 회원들에게 아이스크림 사준단다. 다들 와아 하고 신났다. 우유맛 나는 아이스크림은 너무 너무 맛있다. 여기서는 뭐든지 맛있다. 푸석푸석한 식빵으로 샌드위치를 만들어도 맛있어서 세 개는 기본으로 먹곤 한다.


12시 30분


드디어 고비 사막 도착. 반사막이다. 예상하는 고운 모래산으로 된 사막은 얼마 되지 않았다. 마른땅에 풀들과 자갈들이 더 많았다. 햇살이 따갑긴 해도 건조하고 가을이라 그런지 다니기 힘든 온도는 아니다.



16시


소금 사막 도착

바다 였던 토양이  사막화 되어 마르고 말라 소금이 됐다. 졸여졌다. 내 신발은 어차피 방수가 전혀 되지 않으니 벗어들었다. 소금 호수의 진흙물이 따뜻하고 부드럽게 발에 묻었다. 한 동안 장난질을 하다가 유석현 선생님의 조언대로 모래로 진흙을 떼어내고 조장님 보시기 전에 후다닥 생수를 부어 남은 흙을 씻어내자 아르항가이 습지에서 꼬질 꼬질해졌던 발이 깨끗해졌다.


8월 27일


울란바토르로 가는 길. 어제부터 초원이 박혀 들어오기 시작해 이제는 더 이상 셜록이 산책로로서의 기준으로 보게 되는 것이 아니라 초원 그 자체의 아름다움과 하늘을 본다. 회원 저마다 그 풍경들 중에도 특히 꽂히는 풍경을 카메라로 담는다. 나는 초원에 둘러 쌓인 모래밭에 낙타 두 마리가 매어져 있는 풍경과 저녁 노을이 지기 전의 초원 저 멀리에 구름이 없는 밝고 노란 언덕이 가장 아름다웠다. 인터넷과 앱에 중독되가는 내가 싫어 피쳐폰으로 교체한것이 이렇게 후회스러울 수가 없다. ->사진을 찍을 수가 없어서.


8월 27일


23시



칭기스 칸 공항 도착. 배가 또 아파온다. 유종의 미를 거두고 싶었건만 이 통증으로 수하물을 붙여야 함에 잔뜩 찡그린 표정이 된다. 짜증 단계에 임박한 태도에도 이경 선생님은 불쾌해 하지 않으시며 처음인데 그만하면 잘 버틴거다. 자신은 처음 서호주 탐사에 참여해 만 키로를 달릴 생각에 그대로 도망갈 생각도 하셨다고 한다. 이러한 인격자 분을 만나며 내 맘이 넓어지고 성숙해지나 싶다가도 어느새 몸 힘들어지면 또 찡그리며 표를 내버리는 나.


몽골 탐사내내 몇 분의 장년층 들께 질문했다. 힘들지 않으세요? 매번 참여하시는 이유가 뭐예요?

극단의 상황에 대한 도전, 그리고 험한 환경속에서 본 어떤 풍경에 대한 꽂힘 등등을 말씀하셨다. 기본적으로 그 분들은 비교적 젊은 나보다도 자연을 보는 눈이 더 깊으셨다. 심지어 이번에 처음 참여하시는 김혜수 주부님도 항가이를 최초로 넘는 도전에 박사님이 말씀하시기 전부터 깊은 감격 상태이셨는데 마침 박사님이 베스트라고 말씀하셔서 매우 공감했다고 하신다. 이경 박사님은 이번 코스는 너무 단조로운 건가요? 라는 내 얕은 질문에 여러 코스가 중요한게 아니라 자연과 도전 그 자체가 매우 의미 깊다고 말씀하셨다.


오늘 낮, 박사님이 지나시며 이제는 뭘 느끼냐 말씀하셨다. 몽골은 아름다우나 신체적 한계를 넘는게 참 힘들어 깊이 느끼긴 힘들었다고 하자 음치만 있는것이 아니라 자연치도 있다고 말씀하셨다. 자주 접하고 신체적 한계를 훈련해야 한다고. 아아, 그래 알아 볼 줄 모르는 것. 그렇게 집어내 주시니 명확해진다. 몇 마디 말로도 박사님 말씀에는 늘 숙연해진다.


8월 28일

새벽 네시 인천공항 도착.

수하물을 찾고 박자세 단체 사진을 찍는 그 동안 다시 복통. 중얼 중얼 짜증을 내며 화장실을 오가는 새 회원들이 모두 해산됐다. 복통이 가라앉고 나니 아쉬웠다. 나, 밝은 얼굴로 유종의 미를 거두고 싶었건만....





8월 28일


7시 30분


인천공항에서 분당으로 직행해 훈련소에서 셜록이를 찾았다. 성격이 좋아 잘 놀았다는 그 말을 반신반의하며 콜택시를 불러 타고 아이를 가슴에 안을때 느끼는 저릿 저릿함으로 미안해 미안해를 연발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박사님이 늘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 바라보라 하시던 창밖 풍경. 수도 없이 본 고속도로 밖 야산 풍경이 이제야 보였다. 몽골의 초원과 달랐다. 더 아름답고 아니고의 문제가 아니다. 내가 구분이 돼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무언가 작게라도 몽골이 아름답다 느낄 때마다 이게 셜록이를 떼어놓고도 올 만한 가치가 될 것인가를 염두해 두곤 했는데 진정한 가치는 단박에 알아채 지는 것이었다. 배웠다는거, 알았다는거. 보인다는 거, 구분이 된다는 거. 해외 학습 탐사를 참여할 가치가 있다. 그렇다면 내가 해야 할 일은 좀 더 적극적으로 아이를 훈련소에 적응 시켜야 하는 것인가?


8시 30분



평택 집 도착.

오자 마자 훈련소 카페에 접속해서 나 없는 동안 셜록이의 사진을 봤다.

세상에, 몽골 탐사대의 스타였던 기사아저씨의 아홉 살난 아들, 야무지고 영리하며 장난꾸러기인 마인드하 못지 않은 우리 셜록이 특유의 암팡지고 악동같은 그 표정이 훈련소 놀이방에서도 그대로 찍혀 나왔다. 아이는 나 없이 잘 놀고 있었음에 실소했다. 나는 더 깊어질 수 있다. 희망적이다.  ->탐사  또 갈거란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