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수 문화부차장--- 2011.12.30.

(신문칼럼 옮김)

 

그때 그를 만난 건 저녁 8~9시 무렵이었던 듯싶다. 계룡산 갑사 대자암에 짐을 풀고 내려와 저녁을 먹고 올라가는 길이었다. 음력 시월 보름을 하루 앞둔 밤엔 달이 밝았다. 몇십 미터 앞 공중전화 부스에서 수화기를 내려놓고 대자암 방향으로 향하는 그가 보였다. 손엔 오렌지 주스 페트병 하나가 들려 있었다.

뭔가 느낌이 왔다. 걸음을 서둘러 따라잡았다. "대자암 들어가시나 보죠?" "예." "공중전화에서 나오시네요." "예, 정리할 게 있어서요." "뭔가요?" "핸드폰하고 자동차하고 도반(道伴)에게 주고 왔죠. 도반들에게 인사하느라고요." "페트병은 왜요?" "아, 이거요? 앞으로 3년 동안 물 담아 마시려고요."

자동차 열쇠와 핸드폰을 도반에게 맡긴 스님은 앞으로 전화통화도 불가능할 그들에게 '3년 안부'를 미리 전하고 돌아선 길이었다. 대자암 오르는 길은 가팔랐다. 숨이 차올랐다. 가로등도 없었고, 지프가 아니면 오르기 힘들다는 길은 절벽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하지만 가쁜 숨을 고르는 사이사이 스님과 나눈 대화 덕분에 산행은 즐거웠다. 달빛에 비친 스님의 이마가 멋졌다.

그 스님은 다음날부터 3년간 가로 30㎝, 세로 20㎝짜리 '밥구멍' 하나에 의지해 생명을 이어가며, 화두(話頭)를 가지고 수행할 사람이었다. 이른바 '무문관(無門關) 수행'이었다. 달빛 아래 함께 산길을 오르던 스님은 마지막 깔딱고개를 넘으며 법명(法名)을 묻는 기자에게 "그냥 이름 없는 중"이라며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가 들어간 무문관 맞은편에는 계룡산 연봉(連峰)들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었고, 그 위로 하얀 달빛이 부서지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살짝 살펴본 무문관은 '쪽방'이었다. 2~3평 정도 되는 공간에서 3년을 살아야 하는 '자청한 독방(獨房)'이었다. 하루에 한 번 밥구멍을 통해 밥을 받고 할 말이 있으면 메모로 적어 그 구멍으로 전해야 하는 공간이었다. 방 안엔 냉장고, 전자레인지, 찻물을 데우기 위한 커피포트와 작은 탁자, 이불 한 채, 참선 때 앉을 방석이 전부였다. 전날 밤 보았던 그 스님의 음료수 페트병이 새삼 떠올랐다.

그곳에서 그 스님을 다시 보았다. 하지만 그는 기자를 보고도 알은체하지 않았다. 아니, 서로 얼굴을 알아보기엔 전날 밤 달빛이 너무 엷었는지 모른다. 밝은 곳에서 다시 본 얼굴엔 오로지 3년간 몰두할 수행에 대한 결기만 어려 있었다. 기자 역시 그를 알은체하고 싶지 않았다. 감히 그 3년의 시작을 어지럽히고 싶지 않았다.

뒤에 들으니 그 '3년 결사(結社)'는 끝까지 마치지 못했다. 무문관을 만들고 이끌었던 스님이 도중에 돌아가시면서 그리 됐다고 했다. 벌써 6년이 지난 2005년 11월 어느 밤의 일이다. 하지만 그날 그 장면은 지금도 선명하다. '겨우 3년' '핸드폰과 자동차 정도를 가지고…'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스님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려놓고 페트병 하나 달랑 들고 산길을 올랐다.

세속(世俗)이 종교를 걱정하는 시대라고 한다. 하지만 그날 그 언덕길을 오르던 스님을 떠올리면 걱정이 사라진다. 그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