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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산이 온다. 조금만 더 오면 손에 닿을 듯 산맥의 거친 주름이 선명해진다. 나무 한 그루 없이 황막하고 가파른 골짝만 깊었다. 요녕성 안산에 자리 잡고 요동 반도를 따라 카자흐스탄 국경까지 동서로 길게 이어지는 천산 산맥을 투루판에서 우루무치로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 바라보았다. 급하게 비탈져 흙조차 흘러내리니 사람이 발 디디기는커녕 식물이 뿌리 내리기도 버거운 곳, 나무 한 그루 보이지 않고 돌과 흙만 남은 풍경, 그러나 원시적 생명력만은 간직하고 있는 천산을 한 시간도 넘게 바라보았다. 좁은 버스 좌석에서 창밖을 향해 무릎을 세운 채 쪼그리고 앉아 내리 보아도 질리지 않는 천산산맥. 아무 생각 없이 바라만 보던 천산에 문득 어린 시절 고향의 풍경이 겹쳐진다.


 

 

  작은 분지인 남도의 시골마을 , 어느 자리에서 한 바퀴를 돌아도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줄기가 병풍처럼 둘러 있다. 야트막한 산과 논밭, 슬레이트 지붕의 농가들. 읍내는 중심도로인 2차선 신작로를 중심으로 2층을 넘지 않는 시멘트 건물이 마주보고 있을 뿐, 그마저도 걸어서 10분 거리인 소읍이다. 읍내 신작로에서 좌우 샛길로 10분만 걸어가면 여지없이 나타나는 논밭과 동산, 냇가의 풍경이 그때는 못견디게 무료했다. 무료함의 극치인 풍경을 바라보고 있자면 가슴이 막막하다 못해 아린 통증이 느껴질 만큼 지겨웠다. 농사를 짓지 않는 우리집과 다르게 농번기에는 친구들이 바빠지니 같이 놀 친구를 찾으러 논으로 밭으로 쏘다니면서 심심했고, 농한기인 겨울에는 산의 소나무만 빼고 모두 얼어붙은 황량한 풍경이 심심했다. 그런데 심심한 고향의 모습과 질리지 않는 천산이 오버랩된다. 둘은 묘하게 닮아서 짝을 이루어 기억속에 저장된다.

 

     

  물러서다 가까워지기를 반복하는 천산을 묵묵하고 뭉클하게 바라본다. 달려가는 산맥 아래로 하얀 염호가 길게 이어진다. 산맥의 바위에서 비에 씻겨 내려온 나트륨 성분이 모여 만들어진 소금호수는 중국의 주민들이  3년 동안 먹어도 될 분량이라니 가히 대륙다운 규모다. 가끔 높다란 송전탑도 지나고, 눈이 부시게 노란 해바라기 꽃밭도 지난다. 저기 멀리로 드문드문 마을이 보이기도 한다.


 

 

한국에 돌아와서 몸살 끝에 동생에게 평상시와 다른 문자를 보냈다.

 - 놀아줘    

-  언니, 뭔 일 있어?

-  심심하다고요.

 


 

  동생은 늦은 퇴근 후 더 늦은 시간까지 내 옆에 앉아있었다. 딱히 아픈 것 같지는 않지만 좀 지쳐 보이는 언니를 위한 그녀의 처방은 고양이에 관한 이야기다. 어린 길고양이 한 마리를 들여와서 ‘둥이’라 이름 붙이고 그 녀석을 키우면서 일어나는 에피소드이다. 이 녀석 때문에 이불 빨래를 일주일에 몇 번이나 하는지 전할 적엔 원망의 한숨도 쉬지만, 고양이가 물을 얼마나 무서워하는지 알려줄 적엔 고양이처럼 펄쩍 뛰는 흉내까지 내고,  산책 나가서 하는 귀여운 짓들을 말할 적엔 어찌나 밝게 웃는지 세상 고양이들의 대모라도 되는 것 같다. 나는 ‘응, 응’ 하면서 고양이 얘기는 귓등으로 흘려 듣지만 가끔 동생의 큰 웃음소리에는 따라 웃는다. 막내 동생의 안부와 부모님의 건강에 대한 이야기도 오간다. 소소한 일상의 이야기 중에도 동생은 특유의 직설적 반응과 높은 톤의 웃음으로 흥에 겨워한다. 나는 고양이 이야기를 들으며 마음이 편안해지자 어느새 느긋한 표정으로 눈 앞에 천산을 떠올린다.

 


 

  새로운 풍경이나 현상을 접할 때 사람들의 반응은 다양하다. 그중 대표적인 것을 정서적 혹은 논리적 대응으로 분류한다면, 학습탐사는 새로운 현상을 정교하게 개념화된 지식을 바탕으로 보는 논리적 반응에 가깝다. 그런데 나는 정서적으로 접근하는 경향이 있다.  분석이나 논리는 좀 떨어지니 학습탐사의 학습에서 어려움을 좀 겪었다. 그래서 나의 방식을 급하게 고치려다 보니 이도저도 못잡고 소중한 것을 놓친 느낌이었다. 밖의 풍경에 안의 감정이 엉겨붙는 것을 기피하려다 안밖을 모두 부정하는 자기모순에 빠지고 만 것이다. 이에 대한 내 몸의 반응이 시도때도 없는 천산의 현신이 아닐까 한다.

 

 

  가욕관 입구에서 700년 동안 구슬을 삼킨 야바위꾼의 넉살을 지켜보는 것이나, 투르판 포도 농가에서 꼬맹이들에게 초코파이를 나눠주고 놀이에 참여하는 것, 포도 열매를 다듬는 아낙들한테 “한 개만요” 하는 표정으로 말을 건네고 싶은 것이 나의 바탕 정서다. 그런데 생명의 본질과 우주의 역사를 공부하고 실크로드를 통해 동서양 문명 교류의 흐름을 알아보겠다는 거창한 목표에 눌렸다. 때문에 나는 무심할 수 없는 것들을 무심하게 보려고 애썼다. 노력은 조금 가상했으나 오해는 매우 컸다. 결론적으로 세상은 무심한데 무심하지 않으며, 무정하지만 유정도 했다. 이걸 몰랐던 나는 ‘점잖다 못해 쿨해 보일 것’과 같은 급작스런 모드 전환의 실수를 범한 것이다.

 


  오해의 발단은 자연과학과 인문학을 격리해서 생각한 것이다. 박자세를 통해 전문적인 자연과학 지식을 처음 접한 나는 그간의 습관대로 과학과 인문학을 분리했다. 물론 통합이니 통섭이니 하는 흐름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으나 근대 이후 오래 몸에 배인 분석과 분류에 의한 이분법적 사고의 영향력은 이미 몸에 배여 있었다.  지난 1년동안 ‘137억년 우주의 역사’와  ‘특별한 뇌과학’ 강의를 통해서 누누이 확인해 온 것이 과학적 지식이 주는 감동이 인문적이었다는 것인데...... 자연과학의 감동은 시와 그림과 음악과 같은 감흥을 여러 색깔의 언어 중에서 논리와 실증의 언어로 드러낸 것이다. 그 감흥을 하나의 언어가 아닌 다양한 분야의 언어로 화창하게 느낄 수 있다면 참 좋은 일이다. 그런데 나는 하나를 들어서 다른 하나와 연계하여 짐작하는 공부를 하지 않고, 하나를 얻자 다른 하나를 밀쳐내는 사고를 쳤다.


 

 

  고양이가 주는 위로가 있고, 천산이 주는 위안이 있다. 다정하게 살을 부비며 원초적인 안정감을 주는 이가 있고, 무심한듯 그 자리에서 변치 않는 묵직함만으로도 부박하게 떠도는 나를 지그시 눌러주는 이가 있듯이. 그러나 둘은 크게 다르지 않으니 그리 분별되지 않으며 . 감정과 인식의 회로가 이어지듯이 고양이와 천산은 오히려 죽이 잘 맞는 파트너였다.

 


  동생은 하품을 하면서도 새벽까지 계속 고양이 이야기를 한다. 내가 졸려서 자야겠다고 하자 따라 일어선다. 그녀의 속 깊고 살가운 위로가 고맙다. 골목 배웅을 하며 고개를 들어 새벽 안개에 싸인 동산을 바라본다. 그리고 실크로드에서 내가 천산을 바라볼 때 그 산맥도 나를 마주보고 있던 건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 새벽 나를 보려고 우리 동네 동산까지 찾아 와 준 천산을 내가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