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자연 앞에 섰을 때 깊은 감동을 받는 것이 쉬울까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나는 학습탐사를 통해 그랜드캐년, 캐년 랜드, 차코 캐년, 데쓰 벨리, 규화목 단지, 애리조나 운석분화구, 몽골 초원, 수정동굴, 하트트쿼트 협곡, 샤크베이, 마블바 등을 다녀왔다. 그러나 크게 감동받은 장소는 그렇게 많지 않다. 꿈에 그리던 샤크베이에 가서 스트로톨마라이트를 보았을 때 박사님처럼 깊은 곳에서 울려 나오는 눈물을 흘리지 못했다. 그것 때문인지 나는 샤크베이 앞에서 눈시울을 붉히던 박사님의 모습이 부러움이 되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일까.  

서호주 책자에 아샤 이슬아의 글 중에 이런 대목이 있다

열 이틀간의 증상을 곱씹어 본다. 첫 며칠은 그야말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눈 앞의 풍경들에 원근감이 없었다. 아샤는 밋밋하기 짝이 없는 화면의 바깥에 서 있었다. 육일 째 벙글벙글에서, 처음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막혀 있던 눈과 귀와 코가 그제야 뚫린 기분이었다. 인간에게 쓰이기 위해 만들어진 도시의 사물들에 익숙한 아샤, , 벌레, 하늘 땅도 배경화면 이상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들은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무대장치일 뿐이므로 눈에 띄지 않는 것이 당연했다.' 

여기서 내가 주목한 것은 분명 엄청난 풍경을 태어나서 처음 본 풍경을 보았는데도 반응이 한 발 늦은 자신을 발견했다는 부분이다. 왜냐 나도 풍경을 보며 처음에 깊은 감동을 받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일까? 박사님의 강의 중에 학습탐사에서 가장 조심해야 하고 중요한 것에 관한 내용이 있다. 화이트 보드에 단 세 글자를 적었다.



첫째. 사람, 둘째. 사람, 셋째. 사람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항이다. 그저 간단한 주장이 아니다감정에 관한 철학이 숨어 있다. 자연과 사람 중에 무엇에 더 많이 노출되어 있냐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학습탐사가 있기 전에 지속적으로 강조되는 사항이 사람에 관한 내용이다.  

자연에 감동받고 오기보다 사람에 상처받고 오기 쉬운 것이 학습탐사이다. 자연이 아무리 위대해도 사람과 사람의 inter action 10배 이상 강력하기 때문이다. 최근 몇 년간 버스를 타도, 기차를 타도 창 밖을 보는 사람이 거의 없다. 누구나 자연을 즐긴다고 말을 한다. 그러나 정말 즐기는 사람은 드물다. 옛날 사람들은 자연을 즐겼다. 그래서 학습탐사를 같이 다녀보면 나이 지긋한 어르신께서 더 감동에 젖는다. 메스 미디어의 정보가 보이는 시선과 공간에 가득 차지 않았기 때문이다어쩔 수 없이 자연에 눈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요즘은 거의 중독에 가까울 정도로 메스미디어에 노출되어 있다. 겉으로 자연을 좋아한다고 하지만 정든 자연을 찾기는 어렵다.기껏해야 소풍이나, 야유회, 휴가 때보는 관광지의 산, 바다, 계곡이 전부이다. 일년 중에 자연을 볼 기회가 극도로 줄어 든다. 도시에 살다 보면 특히 많이 느낀다.

몇 달 전에 받은 철쭉이 부쩍 자라서 화분갈이 하려고 보니 흙을 구할 장소가 만만치 않았다. 지천에 널렸던 흙은 콘크리트와 아스팔트 밑에 깔렸다. 가로수 밑마저도 빗물에 씻겨 나갈까봐 보도 블럭과 콘크리트로 둘러 쳐져 있다. 시선을 아무리 옮겨 보다도 건물에 가로 막혀 산을 전부 보기가 어렵다. 어쩌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전선줄이 공간을 가르고, 자동차가 길을 메우고 있다.

하늘을 보는 사람도 없다. 어쩌다 밤하늘을 보며 별자리를 말해 주면 별걸 다 안다는 눈치이다. 도시의 대량 소비에 의한 생산으로 인해 팔고 사려는 정보가 세상을 가득 채워 버린 것이다.  

스마트폰의 세상이 도래하였다. 지하철을 타도, 버스를 타도, 어디를 가든 스마트 폰이다. 최근 들어서는 스마트 폰에 쓰는 어플 중에 스마트폰 중독 확인 어플이 등장했다. 그 어플을 쓰면 스마트 폰을 전화를 받는 것과 거는 것 외에는 모든 기능이 잠겨져 쓰지 못하게 된다. 그 어플을 써 본 사람의 이야기가 더 충격적이다. 한 동안 아무것도 못하고 갑자기 시간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느려지더니 도대체 뭘 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는 거다.  

스마트폰이 등장하고 사람은 혼자이면서 혼자가 아닌 상황이 되었다. 어디든 연결되어 있고 어디든 연결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 인해 자신이 사라졌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소통이 있었던 시간이 지나 이제는 소통 속에 사람이 놓이게 되어 자신을 잃어가는 시대가 된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중독된다. 스마트 폰을 보더라도 드라마를 보는 사람이 늘었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 형성된 관계의 이야기에 중독되어 다른 것에는 무심하게 되었다

사람과의 관계에 강하게 노출된 현상은 사람의 조그마한 얼굴 표정도 읽어낼 수 있게 하였다. 손짓 하나, 목소리 억양, 음성의 높낮이에 모든 정보가 들어있다고 생각한다. 정작 중요한 전체적 흐름은 도외시 되고 사람이 어떻게 말하고, 손짓을 했으며, 뉘앙스를 풍겼다는 사실 하나로 화를 내고 슬퍼하고 괴로워 한다. 사람을 미워하고 시기하며 언제나 자신을 가만히 두지 못하고 흔들리며 살고 있다.

이런 현상은 학습탐사에서 위대한 자연에 치중하기 보다는 사람에게 먼저 반응하게 한다누군가 한마디 툭 던진 말에 상처를 받는다. 여기에 이야기는 비단 자연에 덜 노출된 현상으로 사람에게 더 민감한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에 그치지 않는다

학습탐사에서 지켜야 할 사항 중에 탐사 대장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참해야 하는지의 이유도 포함된다.  

학습탐사는 단 하나의 목적에 부합하여야 한다면 그것은 단연코 학습이다학습탐사 관점에서 많은 사람의 의견은 학습 효과를 떨어트릴 확률이 매우 높아진다. 촉박한 시간에 비해 보아야 하고 확인 해야 할 리얼 시스템이 너무 많다. 이미 탐사지에 대한 정보와 학습을 미리 하고 가기 때문에 리얼시스템을 보는 것은 학습관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한 사람의 리드로 나머지 사람이 따를 때 많은 시간을 세이브 할 수 있다. 의견이 하나 나올 때마다 시간이 점점 줄어든다고 보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진짜 이유는 의견이 제시되는 순간 의견에 대한 찬성과 반대가 동시에 일어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다수결의 원칙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어서 다수결의 원칙이 가지고 있는 폐해는 덜 생각하는 듯 하다. 다수결의 원칙은 많은 사람의 의견이 분리되고 통일이 되지 않을 때 더 많은 사람의 의견을 선택한다

그러나 가야 할 장소와 공부해야 할 내용이 정해져 있고 학습탐사 시스템이 갖춰져 있는 상태에서 의견을 조율한다는 것 자체가 어쩌면 넌센스이다. 물론 학습탐사 가기 전에 의견을 제시하고 생각을 모으는 것은 백 번 타당하다.

그리고 정작 중요한 것은 의견을 내세우면 확률적으로 반대 의견이 튀어져 나온다. 이 때부터 위대한 자연은 어디로 가고 없고 사람의 감정이 솟아 오른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중독된 현상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의견은 곧 강한 감정이다. 여기에 주목하여야 한다. 우리는 자신이 말하고 내어놓은 의견의 내용이 정확하고 적확하게 타인에게 전달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기실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 의견의 내용을 인지하는 것이 아니라 뉘앙스만을 받아들인다

분명 건설적이고 옳은 방향을 제시하는 의견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학습탐사 현장에서는 의견을 제시하는 것은 자제되어야 한다. 건설적이고 옳은 방향성이라 할지라도 상황에 따라 확율적으로 반대 급부의 의견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 의견을 갖는 사람은 처음에는 약간 서운한 감정이 있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관계가 소원해 진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는 어떤 사람이 하는 모든 얘기는 옳은 이야기여도 틀린 이야기로 변한다. 기본적인 인간관계의 심리에 관한 이야기이다.

길을 정하거나, 차량 수리를 한다거나, 숙영지를 정하는 것, 그리고 언제나 나오는 안전에 관한 이야기 등의 모든 사건은 각기 생각이 다른 의견이 존재한다. 누구나 안전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 생명과 목숨이 달린 일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안전이 우선시 되는 것도 타당하다. 여기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안전에 대해 이야기 하지 말기를 당부하는 것이 아니다.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안전에 관한 내용이 아니라 의견을 제시하는데 있다. 이상하게 분명 옳은 내용인데도 의견이 갈린다. 대한민국에서의 안전에 관한 상황과 학습 탐사지에 안전에 관한 상황이 다르기 때문이다. 만약 모든 의견이 처음부터 같은 방향이면 괜찮겠지만 거의 그렇지 않다.

사람이기에 그러하다. 이런 까닭에 의견의 내용보다는 의견을 내어 놓는 그 사실이 분열을 가져온다. 안전에 대한 생각과 방법이 각기 다른 까닭이다. 처음 학습탐사에 참여하는 사람부터 오랜 경험이 있는 사람까지 많은 군상이 순간적으로 밀집하여 탐사를 떠난다. 여기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감정을 손상 당하지 않기 위한 배려가 숨겨져 있다.

탐사대장의 의견을 전적으로 따르는 것은 첫 번째 학습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함이고, 두 번째는 사람 사이에 상처를 줄이고자 함이다. 학습탐사는 오지와 극지로 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떤 경우에는 사방 몇 백 킬로미터 내에 사람을 찾기 어려운 곳도 있다. 이것은 마치 바다 위에 배에 모두 타고 있다고 봐도 될 정도이다. 하나 하나의 의견과 토론이 배를 산으로 올라가게 한다. 아니 어떤 경우에는 심각한 상황까지도 몰고 갈 가능성까지 배제할 수 없다. 그래서 처음부터 학습탐사에 참여하는 사람은 탐사대장에 따를 것을 서명하고 올 정도이다. 너무나 많은 변수에 흔들리지 않는 기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거기다 탐사대장이 학습탐사에 대한 경험 지식과 정보가 가장 많다. 경험 지시에 따르는 것이 효율이나 효과가 높아질 확률이 높아진다.    

일례로 분명 사고는 존재한다. 몽골 학습탐사에서 바퀴가 사막의 모래에 빠지거나, 물에 빠지거나 혹은 차축을 잇는 베어링이 떨어져 나가거나 하는 등의 사건이 발생한다. 이런 사고가 있을 경우 고치는 사람과 도와줄 사람을 제외하고는 학습모드로 바로 진입한다. 그 이유는 사고 현장에 머무는 순간 그 사고에 대해 감정이 휩쓸리기 때문이다. 냉철하고 바른 판단을 하기가 어렵기에 그렇다. 이때 탐사대장은 학습모드로 들어가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상기 시킨다. 이것이 핵심이다. 어떤 경우에도 학습이라는 관점의 학습탐사가 흔들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책임질 사람이 따로 있다. 결정하고 선택하는 몫이 내 몫이 아니면 철저하게 학습탐사를 즐기면 된다.

가장 만족하는 여행을 하는 법은 자신의 몫이 아닌 부분은 과감히 포기하는 것이다. 박사님의 여행 철학 중에는 본인이 리드하는 사람이 아닐 때 지키는 법칙이 있다. "일절 의견을 제시하지 않는다."이다. 이것은 여행의 원리를 철저히 이해했기 때문이다. 여행은 매 순간 결정을 내려야 한다. 이 때 의견을 제시하는 순간 분열을 만들 확률이 매우 높아진다. 그래서 리드하는 사람의 의견을 전적으로 따라야 한다. 최악의 케이스라고 할 지라도 의견을 제시하지 않는다.

이것을 따랐을 때 얻는 이득은 심리적 갈등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여행의 모든 순간이 즐거움으로 변한다.

학습탐사가 시작되기 전에 탐사에 참여하는 사람은 자신의 정보를 서로에게 알려야 한다. 하모니를 미리 맞추고 시작해야 한다. 서로의 정보를 제공하고 존중할 수 있는 형태의 분위기가 미리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 그래서 학습탐사가 있기 전에 모이는 회의에는 탐사자는 미리 참석하여 분위기와 뉘앙스를 숙지하여야 한다.

박자세 학습탐사 장소는 매우 아름답고 새로우며 깊은 감동을 준다. 그 좋은 곳을 가기 위해 많은 재화와 시간이 소요되고 노력과 에너지가 들어간다. 10일 남짓한 시간을 보내며 자연을 담아와서 내내 사라지지 않는 기억으로 간직되어야 한다. 이 강렬한 목적성을 위해 학습모드에 동참하여 감정 모드 진입을 억제하여야 한다. 이를 통해 탐사대원 각자가 성숙되며 지혜로워지게 된다.

이것이 박자세 학습탐사에서 사람, 사람, 사람을 말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