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과 땅과 바람 안에서 (몽골학습탐사기) 2010-08-18 00:50
홍종연
하늘을 만났다.
오로지 하늘과 땅과 바람뿐인 곳. 어딜 가나 경탄 없이는 바라볼 수 없는 광활한 하늘.
칭기스칸이 경배했던 단 하나의 신. 푸른 하늘. 그 경외감을 함께 만난다.

1. 길 없는 길을 달리다.

길은 없다. 아니 모든 곳이 길이다.
우리 차는 앞차가 지나가며 내놓은 바퀴길을 따라 원래 그곳이 길이었던 듯이 달린다.
길도 없는 길을 달리는 차는 맨 뒷자리에 있으면 그대로 로데오다.
때로는 롤러코스터처럼 짐과 함께 내팽겨쳐지는 속에서도, 책을 보고 공부를 하고 잠도 자고, 먹고 마신다.
걱정했던 것보다 쉽게 적응이 되는 것을 보면서 떠도는 유목의 삶이 우리의 원형이지 않을까, 잠시 생각한다.
그 옛날 광막한 대지를 떠돌던 유목민의 피가 우리의 유전자에 새겨놓은 흔적으로
떠남에의 갈망이 그토록 깊은 것은 아닌가.
지칠듯이 드넓은 땅. 가도 가도 끝도 없는 길.
차가 흔드는대로 하염없이 흔들리면서 머나먼 지평선을 본다. 푸르른 신기루를 본다.
대지에 흐르는 바람까지 볼 수 있는 곳.
간혹 스치듯 만나지는 말들이, 양들의 무리가 그지없이 반갑다.
다함없는 초원을, 사막을 달리면서 이 대지의 주인이 인간이 아님을 전 생명으로 깨닫는다.
내 안에 자리한 인간의 오만이 한없이 부끄럽다.

2. 바람을 만나다.

드넓은 대지에 가득했던 것은 바람이었다.
저 하늘을 흐르게 하는 것도. 말을 달리게 하는 것도.
허브향 가득 날리게 하는 초원의 바람.
세상 모든 것을 날려버릴 듯 사납던 사막의 바람.
모래 언덕에 그림을 그리던 아름다운 바람.
칭기스칸의 영기를 나부끼게 했던 바람.
내가 만난 초원의 바람은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바람이 나를 때리게 내버려두다.
그것이 위로의 속삭임든, 꾸짖음의 채찍이든...
그 안에도 여린 생명들의 분투가 있었다.
모래 바람에 날려가지 않기 위해 모래들을 모으고
안간힘을 써서 대지를 붙잡고 있는 메마른 덤불들의 지혜와 용기가 눈물겹다.

3. 사막에서 길을 잃다.

우리의 감각이란 것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가, 길을 잃은 밤. 뼈저리게 절감한다.
어디로도 한 발을 내딛을 수가 없다.
사방이 열려 있어서 오히려 막힌 벽. 숨이 막혀왔다.
그 완벽한 원형의 공간에, 대지에, 지구에 갇혀버린 것 같았다.
압도하는 자연 안에 하나의 점으로서 존재하는 나.
자신을 얽매던 많은 것들의 부질없음에서 일순 놓여난다.
아주 작은 세속적 걱정을 걷어내고 나면 그 시간은 완전한 자유였다.
이대로 대지에 갇혀버린들 무엇이 아쉬울까.
바람에 풍화되어 흔적조차 없이 사라지는 자유로움이어도 좋을 것 같았다.

4. 초원에 홀로 서다.

초원의 온갖 생명들이 깨어나는 부산스러운 소리를 듣는다. 그럼에도 여기는 적막하다.
이 초원에 나의 자취는 부조화다. 숨소리도 죽이고 가만히 서 있어본다.
그러면 초원의 일부가 될 수 있을까. 저들처럼 자연스럽게 초원 안으로 스며들 수 있을까.
바람처럼, 가만히 덤불을 흔드는 저 자유로운 바람처럼.
밤새 텐트 지붕을 때리던 빗소리는 거짓말 같다.
밤새 불안하게 흔들리던 꿈들도 거짓말 같다.
무엇을 할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
난 좀 더 깊어져야만 한다.
햇볕에 반짝이는 이슬을 본다.
이제 태양때문에 곧 사라지겠지만
저 태양이 아니라면 저렇게 여리디 여린 먼 별빛처럼 반짝이는 아름다움은 볼 수가 없겠지.
곧 사라져버릴 애잔함도.
마지막으로 드러내는 눈부신 빛남은 왠지 서럽고 서러워서 눈물이 났다.

5.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푸르른 초원과의 결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시작처럼 끝이 다가와 있다.
허브향 진한 들판에서 웃음 가득했던 밤을 떠올린다.
숨이 멎을듯한 장엄한 일출 앞에 할 말을 잃은 채 넋 놓고 있다가 문득 돌아보았을 때,
떠오르는 태양만큼이나 찬란하게 빛나던 아름다운 얼굴들이 떠오른다.
자연의 경이에 겸손하게 마음을 열고, 귀를 열 수 있는 인간의 아름다움을 본다.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함부터 저 한없는 우주의 시작점까지 눈을 넓힐 수 있는 인간의 위대함도 함께 본다.
미묘한 감정의 흔들림들에도, 후회 속의 미숙함에도
그것을 뛰어넘는 지혜를 발휘하며 한마음으로 달려왔던 길.
그 길이 혼자이지 않았음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 길에서 면면이 뿜어져 나오는 매력에 감탄할 수 있었음은 얼마나 감사한 순간인가.
자연에 경탄하고 우주에 경외하며 그래도 끌어안는 것은 인간의 따뜻한 체온인 것을.
진정 인간이 꽃보다 아름답지 않은가. 그 흔들림조차도 눈물겹지 않은가.
이제 여기에서의 모든 시간을 끌어안고 내가 떠나온 곳으로 돌아간다.
지나온 시간만큼 달라질 것인가, 달라져 있을 것인가.
바람이 가만히 나를 흔든다.
'그대로도 괜찮아...괜찮아...'
새로운 시작은 단절이 아니라 지난 시간과의 연속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벗어남의 몸부림이 아니라 끌어안음이라는 것을 깊이 새긴다.
이제 돌아가자. 다시 시작할 수 있음을 믿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