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차 해외학습탐사 몽골 2, 2015729일 일지

 

2015729()

아직 일어날 시간이 아닌듯한데 누군가 일어나 부스럭거린다. 비닐종이 만지는 소리, 지퍼 여는 소리가 귀에 거슬린다. 좀 느긋하게 잠을 자려고 했건만 도와주지 않는다. 단체생활에서 제일 골 아픈 사람은 자기생각대로 행동하는 사람이다. 모두들 곤히 잠자고 있는 줄 뻔히 알면서도 그런 행동을 할 수 있을까. 더듬거리며 핸드폰을 켜보니 4시도 안된 시각이다. 참으려다가 소리 내지 말라고 기어이 한마디 뱉어버렸다. 효력이 없었는지 계속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잠을 설쳐버려 이내 잠이 들지 않아 뒤척대다 일어나 버렸다. 5시도 채 되지 않았다. 차라리 밖으로 나와 새벽공기를 쏘이는 편이 나을 것 같아서였다.


엊저녁엔 피곤해서 그냥 잠들어버려 옷을 갈아입지 못했다. 조심스럽게 캐리어에서 옷을 꺼내 갈아입고 나니 몸이 개운하다. 혼자라면 그냥 그대로 일주일을 버티겠는데 남들에게 피해를 줄까봐 속옷만큼은 준비를 해온 편이다. 될 수 있으면 서로 피해가 안가도록 노력하는 것이 단체를 오래 지탱하는 힘이 될 것 같다. 작은 일에서부터 신경을 써서 즐거운 탐사여행이 되도록 해야겠다밖으로 나오니 이슬이 내려 축축하다. 텐트를 벗어난 조용한 자리에 은박지를 깔고 어제 쓰다만 일지를 쓴다. 초원의 등성이 위로 서서히 여명이 비친다. 구름이 끼여 있는 사이를 뚫고 주홍빛의 아침노을이 퍼지기 시작해 주위가 점점 밝아져 온다. 동쪽이라는 걸 알려준다. 방향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를 시사해준다. 동서남북이라는 방위는 삶에 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옛사람들은 생활 속에 방위를 지혜롭게 잘 이용했던 것 같다. 집의 방향부터 시작해 죽을 때 들어갈 묘 자리까지 말이다. 심지어 잠자리에 들 때 어디로 머리를 두느냐가 큰 문제꺼리가 되어 엊저녁에 시시비비를 가렸다. 현대에 살면서도 관습이라는 건 이곳 몽골에 와서도 따라다니는가 보다. 결국은 편한 쪽으로 하자였다.


아침이 오는 소리가 들린다. 구름사이로 금빛이 새어나와 해가 떴음을 알린다. 참으로 자연은 신비하다. 말을 하지 않고도 하고 싶은 이야기를 그때그때 거짓 없이 전한다. 그런 자연을 닮고 싶다. 아직 아무도 나와 있지 않아 조용한 가운데 일하는 사람이 보인다. EBS 촬영 팀이 카메라를 준비 중이다. 우리는 학습탐사라서 고생을 하지만, 이분들은 무거운 기자재를 들고 다니며 한 컷이라도 좋은 영상을 담으려고 고생한다. 아무튼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 저녁 촬영담당 서PD가 박사님강의를 끝까지 듣고 가는 것을 보고 감동했다. 피곤하고 힘들었을 텐데초원의 둔덕들이 분홍빛 띠를 두른 듯하다. 이곳이 아니면 어디서 이런 광경을 본단 말인가. 여기저기서 일어나 떠드는 소리도 간간이 들려온다. 오늘 하루가 시작되는 소리다. ! 그럼 자리를 접고 침낭을 정리하러 가볼까. 자는데 방해될까봐 몸만 빠져 나왔으니 짐도 꾸리고 텐트도 걷어야 될 것 같다. 텐트를 다 걷고 정리해도 구름 때문인지 해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사방은 훤하다. 하늘은 온통 회색구름이지만 밝은 빛은 감추지 못하는가 보다. 식사 준비가 거의 끝났는지 식탁 위에 반찬이 다 세팅되어 있다. 6시 반에 아침식사를 했다. 메뉴는 누룽지다. 반찬은 김, 오이김치, 마른 새우볶음, 오징어젓갈, 마늘장아찌다. 박순천님은 새우볶음을 우리 남편이 만들었다고 하며 맛있게 드시라고 우스개처럼 말했다. 2진 팀들이 오면서 밑반찬을 들고 온 덕택에 입이 호강을 한다.


식사가 끝나자 박사님 아침강의가 있었다. 오늘 목적지는 다리강가의 탈링 동굴과 실링 복그드오올(산이름) 화산이다. 탈링 동굴은 복그드산에서 14km 떨어진 곳에 있으며 지하 동굴로 길이 200m이고 면적은 10,000이다. 석순과 종유석이 많은 얼음동굴이다. 복그드오올 화산은 1400만 년에서 150만 년 사이에 분출된 신생대 화산이다. 주변에 220개의 화산이 있는 곳으로 DVF, 즉 다리강가 볼케노 필드(Dariganga volcano field)라고 부른다. 다리강가 지역은 1690년부터 1697년에 걸쳐 준가르의 갈단과 청나라 강희제 사이에 4번의 전투가 있었다. 1차는 울란 부퉁(Ulan Butung), 2차는 자우모드(Jau Modo)였다. 1, 2차 전투에 강희제가 참전했고 네 번을 싸웠으나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네 번의 친정(親征)이 갈단의 죽음으로 끝나버렸다. 그 뒤 강희제는 다음 전쟁에 나기기 위한 군마용 말을 키우는 목장을 다리강가에 만들었다. ‘다리강가 오익목장이라 부른 이곳은 말2, 낙타2, 1의 비율로 키웠다. 말은 군마용, 낙타는 운송수단, 양은 식용이었다. 목장이 자리 잡은 언덕에 알탄오보가 있다. 오보신앙은 티베트불교가 들어오면서 같이 들어왔다는 설도 있다. 강희제는 이분법적 사고를 정치에 이용해 분열정책을 써서 다른 부족들을 말살시키는 정치를 했다. 다리강가는 호브드변계, 자삭트 아이막, 사인노얀한, 투시에트한, 세첸한의 순으로 되어 있는 곳에서 투시에트와 세첸사이의 아래쪽에 위치한 지역이다. 그리고 자삭트 아이막과 사인노닝한 위쪽에 걸쳐 흡스굴 변계가 위치하고 있다. 현재 몽골은 울란바토르 자치구를 비롯해 21개의 아이막과 340개의 솜, 1671개의 박으로 되어있다. 1박은 서울시의 1.2배라고 한다.


탈링 동굴은 석회암 동굴로 예전에는 바다였던 곳이다. 바다에 살던 규질편모충류의 시체가 쌓여 석회암이 된 것이다. 지구표면은 대부분 화강암이다. 화강암은 석영, 장석, 운모로 되어 있다. 그 중에 60%가 장석이다. 장석은 빗물 에 녹아 고령토가 되고 고령토는 모래나 다른 물질 등이 섞여 흙이 된다. 석회암은 CaCo3. 지구상에 석회암으로 된 제일 큰 섬은 호주에 있으며 그레이트 베리어 리프(Great Barrier Reef)라고 부른다. 바다의 최고 깊이는 4km이고 바다 밑의 해양대지는 지구표면의 50%에 해당한다. 해양판은 현무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가 가는 다리강가지역은 호상열도에 속한다.


출발하기 전, 간단한 체조로 몸을 풀었다. 매일 할 예정이라 했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가이드 유리선생이 물을 사러가서 아직 오지 않았다. 올 때까지 기다려 출발하기로 했다. 현재 시각은 910분이다. 오늘부터 A차에 탑승한다. 박사님의 강의를 들을 수 있어 기분이 좋다. 버스 올라오는 맨 앞자리를 김현미 이사님이 마련해주어 무엇보다 고마웠다. 떠나는 날까지 계속 앉아도 된다고 하니 아니 이럴 수가. 나이가 들었다고 배려를 해 준 것 같았다. 버스에 오르니 박사님은 기다리는 순간도 허투루 보내지 않고 노트북을 보고 있다. 공부에 대한 열정은 아마 모르긴 해도 세계 1위에 내세워도 될 성싶다. 그런 열의를 정말 닮고 싶다. 박사님의 귀한 강의를 날로 먹는 것 같아 미안하다는 마음이 든다. 중요한 엑기스만 빼내려면 얼마만한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하는 걸까. 한 시간을 위해 셀 수 없을 만큼의 시간과 노력을 들였으리라. 기다리는 시간도 아까워 지구의 형성과정을 노트북을 들고 설명했다. 몇 번을 들어도 지구가 이루어진 과정이 놀라울 뿐이다 우선 우리가 가고 있는 몽골의 북부를 비롯해 유라시아 초원의 기후는 스텝(steppe)지역에 속한다. 특징은 건조한 기후로 뜨거운 여름, 추운 겨울, 그리고 연강수량은 250500mm이다. 선선하고 날씨가 좋은 편이다. 아래쪽은 나무가 드물게 보이나 위로 올라갈수록 시원하고 강수량이 많아 나무가 많다.


신생대는 6,500만 년 전이다. 1,400만 년 전부터 160만년까지 지구상에 화산활동이 있었다(신생대 제 3기 마이오세). 이 때에 아이슬란드가 생겼다. 화산으로 인해 생겨난 것은 다음과 같다.

1. 북대서양 해저마그마 활동

2. 인도판과 아시아판의 충돌( 히말라야산맥, 파미르고원, 타밀분지가 생김)

3. 테티스(Thetis) 해의 소멸(대리석 산지). 지중해 출현

4. 티베트고원의 융기. 안데스산맥의 출현. 홍해 형성. 동아프리카 지구대 (5,000km) 형성.

5. 남극대륙 완전 분리(북극은 바다. 남극은 육지). 드레이크(Drake)해협, 타스만(Tasman)해협 형성. 바닷물이 지구를 한 번 도는데 2,000년 걸림. 북대서양이 이전보다 넓어짐.

6. 파나마 운하의 폐쇄 (300만 년 전). 태평양과 대서양의 분리.

들으면 들을수록 신기한 137억년 우주의 세계다.


드디어 10시에 출발했다. 다리강가까지 150km라고 한다. 시속 20km에서 30km사이로 달리니 얼마나 걸릴지 잘 모르겠다. 11시 반 경, 드넓은 초원에 내려 휴식을 가졌다. 들꽃들이 우리를 반긴다. 하양, 노랑, 보라, 분홍 등 예쁜 옷을 입고 뽐낸다. 조금 가다가 우리가 탄 A버스가 고장이 나서 수리하는 동안 점심을 먹기로 했다. 내린 곳은 사방 어디를 봐도 푸른 풀밖에 보이지 않는다. 길게 자란 풀은 위가 누렇게 변했으나 밑에서 새파란 잎이 새로 나온다. 척박한 땅에서 제 나름 대로 살아가는 지혜를 배운 것일까. 몽골이 아니면 만날 수 없는 초자연적인 풍경이다. 누가 씨를 뿌리고 가꾼 것도 아닌, 저절로 자라나 자손을 퍼트리며 살아왔을 게다. 그러나 이곳도 앞으로 환경문제로 몸살을 앓지 않을까. 지나가는 도로 옆으로 비닐이나 페트병 등 환경유해물질인 쓰레기가 쌓여 있는 걸 볼 때마다 안타깝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했다. 문명의 발달이 결코 좋은 것만은 아니다. 오래도록 자연이 숨 쉬는 곳으로 보존되기를 바라지만, 그다지 희망적이지 않다는 걸 몸으로 느낀다. 점심은 12시가 조금 넘어 먹었다. 다른 날보다 빠른 편이다. 샌드위치와 주스, 그리고 믹스커피가 준비되었다. 샌드위치는 감자를 삶아 으깨어 오이, 당근, 양파, 소시지를 넣어 만든 감자샐러드를 빵에 듬뿍 얹어 만든 것이다. 아삭거리는 야채의 식감이 맛을 더한다.


몽골의 위쪽으로 올라오니 덥지 않고 선선해서 좋긴 하지만 바람이 쌀쌀해서 추운 느낌이 들어 버스창문을 모두 닫았다. 7월 말이건만 패딩 잠바까지 꺼내 입고도 추워한다. 어느 대원이 하루에 사계절을 다 맛보게 하는 몽골의 기후라더니 정말로 말 그대로다. 차 수리하는 시간이 걸리니까 EBS촬영 팀은 멀리까지 걸어가 몽골의 이모저모를 찍어온 것 같다. 차가 부르릉 소리를 내는 걸 보니 다 고쳤나보다.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차에 오르니 비가 아까보다 세차게 온다. 달리는 차안에서 야생 가제영양 세 마리가 달리는 것을 보았다. 얼마나 빨리 달리는지 버스보다 빨랐다. 왼쪽과 오른쪽을 오가며 달리다가 우리가 탄 버스 앞을 스치듯 지나간다.


오후 1시 반경, 다리강가지역에 도착했다. 어제부터 달린 길이가 포장도로 500km, 비포장도로 200km이다. 이틀 만에 다리강가 실링 복그드오올 화산지역에 온 것이다. 몽골어로 오올은 산을 말한다. 제주도에서는 오름이라고 한다. 오올과 오름은 서로 연관성이 있는 언어가 아닐까. 화산지역에 내리니 여기저기 화산 돌이 굴러다닌다. 들어보니 철분이 많아 묵직하다. 유리선생님 말에 의하면 작년에 제주대학 교수팀이 이곳에 와서 화산 돌을 보더니 제주도 돌이랑 많이 닮았다 하더라고 말했다. 화산라인이 90km에 달하는 선으로 이어져 있는 다리강가의 화산지역은 아시아에서 제일 큰 규모라고 박사님이 말했다. 버스를 타고 조금 더 가서 화산으로 파여진 협곡에 내렸다. 아래쪽을 내려다보니 야생화가 지천으로 피어있어 풍광이 아름다운 곳이다. 화산의 형태를 보면, 일본의 후지산은 점성이 많은 화산이라 위로 솟아있다. 점성이 적은 현무암질 용암인 시베리아트랩(Siberian Traps)과 데칸트랩(Deccan Traps)은 옆으로 퍼져있다. 다리강가의 화산은 죽처럼 흘러내린 것이 능선을 이루어 90km에 달한다.


오후 네 시, 탈링 동굴에 도착했다. 동굴의 길이는 240m이지만 들어가 볼 수 있은 길이는 25m정도다. 입구가 좁고 낮아 머리도 최대한 수그리고 허리도 구부리고 들어가야지 머리를 조금만 들어도 바위에 부딪쳐 다친다. 조심조심 한걸음씩 걸어 들어갔다. 위로는 바위가 날카롭고 아래는 얼어서 미끄러워 여간 조심스러운 게 아니었다. 내려가 보니 이번에는 얼음이 살짝 녹아 물이 흘러 미끄러웠다. 그러나 깊지 않아 건너 갈만해서 다행이었다. 조금 더 가니 바닥이 꽁꽁 얼어 다니기가 편했다. 군데군데 얼음종유석이 동그랗게 올라와 있는 곳을 더듬거리며 가니 갑자기 동굴 안이 넓어지며 둥그런 천정이 덩그렇게 올려다 보였다. 적어도 백 여 명이 들어서도 될 것 같은 공간으로 얼음광장이라 불러도 될듯하다. 바닥은 얼음 종유석이 여기저기 흩어져 반짝거리고 천정과 벽면은 얼음수정이 다닥다닥 붙어있어 유리창에 성에가 낀 것처럼 아름답다. 하나하나가 각기 다른 무늬를 갖고 반짝거려 보석조각을 붙여놓은 것 같아 얼음동굴이 아니라 얼음수정을 감상하는 듯하다. 박사님도 수정동굴에도 가보았지만 이런 장관을 보는 것은 처음입니다라고 말했다. 벽에 붙은 얼음을 만져보니 부슬부슬 떨어진다. 바닥의 종유석은 투명해 속이 말갛게 들여다보여 사진 찍느라고 들이댄다. 천정은 돌이 얼기설기 모여 있지만 짜임새 있게 짜인 듯하다. 어쩐지 경주 석굴암 천청을 보는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이런 광경은 이번 학습탐사의 백미가 아닐까 싶다. 바닥 외에는 전부 투명한 보석이 박힌 듯해서 신비스러움을 자아냈다. 자세히 보니 벽에도 어워에 두르는 푸른 천들이 여기저기 걸려 있고, 바닥에 놓인 돌 위에도 푸른 천과 함께 돈과 음식을 올려 놓은 것이 보인다. 몽골사람들의 민속신앙을 동굴에서도 엿볼 수 있었다. 탈링 동굴은 현무암동굴로 특이한 형태이다. 유추하건대 천정은 계단식으로 차츰차츰 쌓여 이루어진 게 아닌가.’라고 박사님이 말했다. EBS 촬영 팀은 연신 카메라를 돌려대며 찍느라고 한창이다. 그냥 찍는 게 아니었다. 얼음바닥에 엎드리고, 벽에 비스듬히 기대고, 아예 누운 자세로 온 몸을 던져 촬영한다. 마침 강현석 군이 첫날부터 촬영에 관심을 갖더니 무거운 촬영기자재를 들어주는 등 자질구레한 일을 도맡아 해주고 있어 보기에 좋다. 좋아하는 일을 해서 그런지 첫날의 어두운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어렵게 찍은 만큼 세계 테마기행에서 어떤 모습으로 다시 태어날지 정말로 궁금하다.

 

박사님은 과학은 검증된 것만 공부해야 된다.”고 강조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과서 위주로 공부해야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공부를 위해선 책이 제일 중요하다.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를 책이 알려주기 때문이다누가 이런저런 질문을 하자 책대로 공부만 하지 쓸데없는 질문은 하지 말라고 못을 박았다. 동굴을 다 둘러본 뒤 학습탐사 팀들은 다 나왔다. EBS 촬영 팀이 박사님과 인터뷰를 가지기 위해서이다. 한 시간가량 걸린 성싶다. 추운 동굴에서 촬영하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아마 얼어서 동태가 되어 나왔으리라. 화면에서 볼 땐 그저 그런가보다하고 가볍게 보았다. 극한과정을 거쳐 하나의 작품이 나온다는 걸 직접 피부로 느낀 현장체험이었다.


오후 620분에 실링 복그드산에 도착했다. 관광지로 알려져 있어 그런지 근처에 쓰레기더미가 여러 군데 있어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복그드 화산은 올려다만 보고 우선 복그드오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숙영지를 잡았다. 640분쯤 복그드오올에서 조금 떨어진 오름에 올라가기로 하고 산에 올랐다. 보기에는 가까워 보였으나 산 아래까지 걸어가는 시간이 꽤 걸렸다. 공해가 없어 공기가 맑으면 거리를 측정하기 어렵다더니 정말로 그랬다. 화산지대라 그런지 온통 야생화천국이다. 이름을 아는 꽃으로는 용담, 들국화, 구절초, 에델바이스, 기린 초, 오이 풀, 엉겅퀴, 패랭이 등이다. 이름 모르는 들꽃들이 더 많아 이것 봐라, 저것 봐라하는 동안 산 밑까지 도달했다. 아빠 정인식님과 같이 온 정현빈이는 에델바이스를 말려 책꽂이를 만들 거라고 예쁜 놈으로 골라 딴다. 부녀가 다정스레 산을 오르내리며 애기를 나누는 걸보니 내 마음마저 훈훈해진다. 오름은 그다지 높지 않았다. 오름에 오르니 사방이 확 트여 있어 저 멀리까지 잘 보였다. 시계를 보니 저녁 9시인데도 해는 아직 넘어가지 않아 아직 훤하다. 금빛노을이 마지막 힘을 다해 하늘에 퍼진다. 해는 반쯤 산등성이에 걸려 하루를 마감하려고 서서히 잠기는 순간이다. 끄트머리만 조금 남은 해가 꼬올딱 넘어가도 황금빛노을은 아직도 무엇이 아쉬운지 하늘에 오랫동안 머물다가 사라졌다.


저녁은 10시를 넘겨 먹었다. 김밥과 컵 라면이 준비되었다. 박순천님이 한국서 올 때 김밥을 만들어 먹으려고 재료일체를 준비해 왔다고 해서 그 정성에 놀랐다.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식사가 끝나자 박사님의 말씀이 있었다. 복그드오올은 신성한 곳이라 몽골에서는 예부터 여자들은 오르지 못한다는 관습이 지금껏 남아 있다. 이런 전설이 전해져 왔기 때문이다. 예전에 다리강가에 로빈 후드와 같은 의적이 있었다. 부자나 귀족들을 털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모두 나누어주었다. 그는 항상 복그드오올에 올라 기도를 드리고 산의 신령스러운 정기를 받아 의적생활을 계속하였다. 그 후로 복그드오올 화산은 남자들만 오르는 것으로 불문율이 되어버렸다. 여자가 오르면 안 되는 것은 아니나 몽골사람들이 보면 속으로 욕을 하며 싫어한다고 한다. 지금도 신성하게 여겨 신년을 맞이하면 대통령을 비롯해 정치인이나 기업인들이 복그드산에 오른다. 몽골은 남녀 구별 없이 평등하게 여기나, 예부터 내려오는 관습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민족인 것 같다. 어느 나라나 예부터 지키는 관습이 있기 마련이다. 몽골에 왔으니 몽골 법을 따르는 것이 예의일 것 같다. 박사님이 사전에 이런 사정을 이야기하며 양해를 구했다. 여러 가지 의견이 분분했으나 몽골 법을 따르자는 의견에 찬동하는 분위기였다. 김현미 이사님은 여기까지 와서 여자만 가지 못한다는 게 좀 억울하다는 의견을 냈다가 박사님이 화내는 바람에 이내 접어버렸다. 우리는 다른 팀하고 달리 학습탐사를 목적으로 온 만큼 몽골 사람들의 마음도 헤아릴 줄 아는 것도 공부의 하나라고 하는 박사님의 말에 모두 동감하였다. 박사님은 유리선생님을 비롯해 몽골기사를 합하면 여섯 명인데 그분들을 봐서라도 여자대원들은 올라가지 않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설득해 모두 따르기로 했다. 내일 아침은 다섯 시에 남자대원들만 올라가기로 결정을 내렸다.


저녁강의는 쉬었다. 아무튼 꽉 찬 하루를 보냈다. 숙영지는 다리강가 실링 보그드(Shilin Bogd)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