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차 해외학습탐사 몽골일지(4일째)

 

2016822일 월요일, 날씨는 맑음, 저녁에 한차례 폭우가 쏟아짐

 

엊저녁에 MBC피디가 내일 아침에도 일찍 나와 글을 쓸 거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했더니 내일 그 장면을 찍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확답을 안 한 상태여서 아무 생각 없이 일어나 텐트를 들치고 밖으로 나오니 피디가 기다리고 있다. 미안하기도하고 계면쩍기도 했다. 위로 걸어가 평평한 풀밭에 앉아 손전등을 켰다. 하늘은 점점 밝아오지만 아직 어두어서다. 탐사일지를 쓰고 있노라니 피디와 촬영감독 둘이 장비를 들고 와 찍기 시작한다. 오늘 아침시간은 나만의 시간을 오롯이 가질 수 없을 듯하다.


넓은 초원에 앉아 눈을 들어 건너편을 보니 멀리 게르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이 흐릿하다. 날이 점점 밝아와 이슬을 머금은 풀잎도 반짝거리고 납작하게 엎드린 보라색 꽃도 귀여운 웃음을 보낸다. 몽골탐사를 간다고 했더니 몽골의 넓은 들판을 가로지르는 바람소리, 가축들 이동하는 소리, 물이 흐르는 소리를 담아오라고 하던 박양근 교수의 말이 생각난다. 아직 아무 것도 담지 못해 기대에 부응할지 모르겠다.

 

아침밥은 다른 날 보다 빠른 7시였다. 누룽지에 반찬으로는 연근조림, 깻잎조림, 북어무침, 햄이 나왔고 후식은 사과 4분의1, 커피(블랙, 믹스)는 언제나 덤이다. 언제나 오관게(五觀偈)를 생각하며 고마운 마음으로 먹었다. 절에서는 공양을 들 때 다섯 가지 게송을 외우고 나서 식사하기 때문이다. 먼저 음식이 입으로 들어오기까지 수고한 이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마지막으로 도업을 이루기 위해 이 음식을 받습니다.’라고 한 뒤 수저를 든다.

 

박사님 아침강의는 8시 반에 시작되었다.

창의성은 학문영역에 속한다. 창의성학자들이 말하는 공동 펙터는 이러하다.

첫째, 분야 또는 영역이다.

창의성을 높이려면 분야의 구분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요리, 수학, 물리 등으로 구분하는 것이다.

둘째, 수준 또는 레벨이다.

인류역사상 20세 이하가 창의성 분야에 기여한 일이 있는가?

엄청난 사고를 20년 이상을 해야만 한다. 나이에 따라 분야마다 수준이 매우 다르기 때문이다. 창의성은 어벙한 개념이 아니다.

셋째, 방법이다.

온갖 이야기가 난무하지만 원초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 자연과학의 방법은 자연법칙에 따라 움직인다. 우리는 겉보기 현상만 보기 때문에 일반상대성이론이 나오기까지는 뉴턴 이래로 별다른 발전이 없었다. 그동안에는 감각을 통해서 상대적인 것만 보았다. 상대방이 되어 보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관찰에는 한계가 있어 발전할 수 없었다.

근대과학의 방식 중에 뉴턴의 제2법칙인 가속도의 법칙은 F=Ma이다. 자연을 극복하는 데는 상호교감이 되어야한다. 겉보기현상은 감각이 하는 것이어서 제한적이며 상대적이다. 인간이 상대적 감각을 파악하면서부터 발전하여 방법론이 나왔다.

감각은 제한적이어서 자기중심적으로 보기 때문에 타인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현미경, 망원경으로 인해 시야가 넓어졌다. 근대과학의 힘으로 감각의 영역을 벗어난 것이다. 자기의 영역을 벗어나야 다른 것을 볼 수 있어서다.

우리들의 세계는 감각의 영역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벗어나기 위해서는 브레인의 뉴런을 잡아줄 수 있는 기둥 즉 기억이 필요하다. 기억이 없으면 감각중심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항상 저 멀리 보는 시각을 가져라. 시각은 내 근처와 저 멀리가 있다.

내 근처는 일시적, 즉각적, 즉시적, 주관적이다.

저 멀리는 객관적, 미래적, 현재적이다.

대부분의 시각은 일상에 매몰되어 있으므로 감각에 구속되지 않도록 훈련해야 한다. 그렇게 되려면 저 멀리 보는 습관을 익혀야한다.

몽골로 탐사를 오는 이유는 끝없는 평원을 보기 위해서다. 학습탐사의 본질인 저 멀리 보기 위해서 이기도하다.

근대과학은 감각을 벗어나면서 각자의 입장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커뮤니케이션이 되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상대적 교환관계를 유추하게 된 것이다.우리들의 경험은 제한적이어서 새로운 경험을 많이 해야 한다. 그 중에서 저 멀리 보는 것은 사고가 객관적이며 논리적이 된다.

또 하나는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하는 것을 훈련해야 한다. 그래야만 겉보기현상에서 벗어난다. 그것이 자연과학공부이다.

 

다음으로 조장희 박사님 강의가 있었다.

우리는 먼저 공부할 수 있는 마당을 만들어 써 먹을 수 있게 해야만 과학이 발전할 수 있다. 놀 수 있는 마당이 발전의 터전이 되기 때문이다. 많은 훈련과 공부를 하는 마당을 만들도록 해야 한다.

산을 넘어 보아야 다음 산이 보이듯이 인내심을 가지고 차곡차곡 쌓아가야지 빨리 건너뛰려고 하지 말아야한다. 공부하는 자세는 거짓이 없어야하기 때문이다.

전통이 중요하지만, 폭 넓게 생각하고 구별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학자만이 아닌 외국학자들을 적극 추천하여 같이 공동연구를 할 수 있도록 해야 발전 할 수 있다. 동경대학의 예를 들면, 외국에서 우수한 교수 30 여명을 초청해 30년간 일본인 제자를 가르치고 기르게 해서 한 사람으로 우뚝 서게 함으로서 동경대학이 세계유수대학의 반열에 올랐던 것이다. 동양에는 싱가포르대학과 홍콩대학이 그 제도를 받아들여 발전을 거듭해 지금은 유수대학으로 손꼽힌다.

"조장희 박사님은 100편의 논문만 써도 세계적인 학자의 반열에 오르는데 현재 350편이 넘는 논문을 발표한 대학자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잘 아는 CTMRI등의 개발은 물론, PET도 개발한 분으로 세계적인 과학자이다." -박사님의 보충설명이다.

논문은 시간을 두고 연구해서 제대로 된 논문을 써야 한다. 공부할 때는 바보가 되어 바보같이 살아야 연구생활을 지속할 수 있다.

논문은 새로운 것을 쓰는 것이며 지구상에 없는 것을 처음으로 쓰는 것이다라고 끝내셨다. 마지막 말씀이 귀에 쟁쟁하다.

 

9시 반쯤 출발했다. 오늘은 흉노무덤이 있는 유적지와 암각화를 보러간다고 한다. 아침에 들었던 강의를 상기하며 저 멀리 초원을 바라본다. 도중에 염소와 양떼가 몰려와 길을 건너려한다. 크락션을 울리니 놀라서 냅다 달린다. 그 모습이 우습기도하고 미안하기도 했다. 너무 겁을 준 것 같아서다.

 

11시경 초원에 내려 휴식시간을 가졌다. 식품당당 대원들은 필요한 생필품을 사러가서 시간적 여유가 좀 생겨 초원에서 풀을 뜯고 있는 말들이 보이기에 천천히 걸어가 보았다. 백 여 마리의 말들이 한가롭게 풀을 먹는가하면 한편에서 쉬는 말도 있고 달리는 말도 보인다. 지키는 사람도 없이 자유로이 노니는 걸 보니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의 대관령목장이 크다 하지만 비교가 안 된다. 드넓은 몽골초원이 모두 자기들 것이기에.

돌아오라는 소리에 걸음을 재촉해가니 박사님은 펠식(felsic), 화산석의 일종인 유문암(流紋巖) 등을 들고 강의를 하고 있다. 설명이 끝날 무렵에 도착해 앞부분은 하나도 듣지 못해 아쉬웠다. 박사님은 시간만 나면 풀이면 풀, 나무면 나무, 돌이면 돌 뭐든지 손에 잡으면 설명이 줄줄 흘러나온다. 그야말로 박학다식하다.


오후 1시경 흉노유적지에 내렸다. 흉노족의 무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곳이다. 흉노는 특이하게 아침마다 해를 보고 절하고 저녁에는 달을 보고 절을 한다. 또한 사후세계를 믿어 무덤에 부장품을 같이 묻었다. 흉노는 우리나라와 관련이 깊다. 흉노의 이치사 선우 때 흉노의 휴도왕은 한의 무제와 싸워 패배했으나 투항하지 않아 살해당했다. 부인 알지와 아들 일제는 한의 무제에게 투항해 나중에 일제는 김씨 성을 받았다. 나중에 경주 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흉노의 무덤은 적석목곽으로 되어 있었으나 세월의 흐름에 따라 바깥에 쌓은 흙이 무너져 내려 돌이 드러나 있다. 주위를 돌로 네모나게 두른 무덤은 높은 지위를 가진 이의 것이고 둥글게 두른 무덤은 지위가 낮은 이의 무덤이라 한다.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은 지하에 무덤 광을 파고 나무덧널을 넣은 뒤 그 주위와 위를 돌로 덮고 바깥은 봉분을 씌운 무덤을 말한다.

신라의 문무왕 비문에 의하면 8대 조상이 흉노족의 휴도왕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 후손들이 신라에 와서 살았으므로 그 영향인지 신라의 무덤도 적석목곽분이 많다.

 

흉노무덤이 있는 데서 좀 떨어진 곳에 암각화가 남아있다고 해서 걸어가기로 했다. 가는 도중에도 크고 작은 흉노무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몽골은 초원과 모래가 많고 나무와 돌이 귀한 나라이다. 흉노족은 무덤을 만들기 위해 돌이 많은 곳을 찾아 무덤을 만들었다고 전한다. 그러고 보니 일대가 거의 돌밭이다. 흉노무덤과 관련이 있는지 이 일대를 흐르는 강 이름을 흉노하(匈奴河)라고 부르고 지금까지 그렇게 부른다. 흉노에 대한 기록은 중국 역사책에 많이 나온다. 그러나 위구르나 돌궐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 흉노의 무덤에서 중국 물건이 많이 나오는 걸로 추정해보면 서로 교류가 많이 있었던 것 같다. 또한 그리스 신상이 나온 무덤도 있어 비잔틴제국과도 교류가 있었다는 걸 말해준다.


암각화가 있는 곳은 가이드 유로 선생님도 말만 들었지 가보지 않았다고 한다. 보기에는 가까워 보였지만 조금 멀었다. 걸어가는 도중에 독수리 두 마리가 머리 위를 빙빙 돌았다. 나르는 방향에 따라 햇볕을 받은 부분은 깃털이 유난히 반짝거렸다. 암각화가 있는 산은 온통 돌이 쌓여서 된 바위산이다. 바위에는 주홍과 빨강, 노랑과 하양, 연두와 갈색 등 갖가지 색깔의 지의류가 곱게 피어있다. 지의류는 균류와 광합성 박테리아의 합성으로 잘 죽지 않는다. 어떤 지의류는 수명이 4천년을 가는 것도 있다.

암각화는 여러 군데 그려져 있다. 사슴이 제일 많고 그 외에 다른 동물들도 그려져 있다. 크게 그린 것은 없고 거의가 작은 그림이다. 위에 올라가니 생각 보다 평평해 울퉁불퉁한 바위가 이리 저리 있긴 해도 20여명은 너끈히 앉을 수 있는 공간이다.

 

내려가는 길은 반대편으로 경사가 완만하다. 박사님은 우리가 올라간 바위산보다 조금 높은 산을 다시 올라갔다. 대원들도 같이 따라갔으나 나는 거기까지는 다리에 무리가 올 것 같아 버스가 있는 쪽으로 쭉 걸어내려 갔다. 20여분 걸어가니 오보가 우뚝 서있는 언덕이 있고 초원이 펼쳐진 곳에 버스가 자리 잡고 있다. 오보가 있는 언덕 아래에도 흉노의 무덤이 몇 기나 보인다. 흉노무덤이 이 지역에 많이 몰려 있는 듯하다.

 

산에 올라갔던 대원들이 돌아와 같이 점심을 들었다. 오후 240분이다. 뜨거운 물을 부어 10분간 기다리면 밥이 익어 고추장을 넣어 비비기만 하면 비빔밥이 되는 간편식과 라면이다. 후식으로 야크의 젖으로 만든 시큼한 야쿠르트를 맛보았다. 달지 않아 좋았다.

식사 후 세시 반에 내일 일정과 지금까지 지나갔던 도시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 있었다.

350분에 버스에 올라 10분후에 내렸다. 타고 오는 도중에도 흉노무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내린 곳은 트루크족의 묘비와 무덤이 있는 곳이다. 큰 묘비가 3개로 흉노와는 다른 양식의 무덤이다. 무덤 주변에는 크고 작은 돌 들이 흩어져 있고 발굴을 한 흔적인지는 모르지만 가운데가 움푹 패여 있다. 묘비에는 사슴뿔이 새겨진 것도 있고 순록도 새겨져 있다. 묘비 중에 두 개는 직사가형으로 길고, 다른 하나는 넓적한 모양으로 길이가 작다. 직사각형 묘비는 양각으로 조각을 해 사방이 연결되어 있다.

 

유목민인 스키타이민족은 산양, 사슴, 순록 등을 많이 그렸고 금제품을 애용한 민족이다. 순록은 다른 동물보다 엄청 커서 반은 방목을 하고 반은 가두어서 키웠다. 당시 유라시아 대륙의 먹이는 순록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스키타이민족은 최초의 기마민족으로 BC 6세기3세기에 걸쳐 러시아 남부초원에서 살다가 몽골초원으로 일부가 이동해 흉노족이 되었다. 그 후 흉노의 일족이 한반도로 이동해왔다고 전한다. 그런 영향을 받아 신라왕관의 모양은 사슴뿔을 모티브로 만든 것이다.

조금 떨어진 곳에 트루크족의 묘비가 또 있다. 아래에 연꽃이 음각되어 있는데 아주 선명하고 사슴뿔 모양도 음각인데 사선으로 조각되어 특이하다. 사면이 같은 넓이로 긴 직사각형 묘비의 제일 위에는 둥근 해가 음각되어 있다. 네 면의 귀퉁이를 약간 둥글게 깎아 부드러운 느낌이 든다.

 

박사님의 보충설명이 있었다.

동굴벽화는 후기 구석기 시대에 그려진 것이다. 종교가 생긴 것은 3만년이 되지 않는다. 3만 년 전까지 네안델타르인이 살았으나 무덤에서 목걸이가 나오지 않았다. 사용언어는 모음 위주로 중간 절음(絶音)이 없었다. 현대에 통용되는 법률용어, 군사용어에는 자음이 많다.

호모사피언스의 무덤에서는 목걸이가 나왔다. 인식의 유동성이 있었다는 증거다. 초기 부장품에서 달력도 나왔다. 인류사적 흐름은 상징에서 모아지고 상징에서 정신이 나온다. 도구, 자연, 언어, 사회는 지능과 관계가 있다.

 

버스에 올라 조금 가다가 5시경에 내렸다. 암각화를 보기 위해 작은 산을 올라갔다. 사슴이 그려져 있는 암각화가 몇 개 있다. 산에서 내려다보니 이곳에도 돌로 사각형과 원형으로 둘러놓은 흉노무덤이 수십 기나 보인다. 산 뒤쪽으로 내려오니 돌궐무덤이 무너져 내려 움푹하게 패여 있고 묘비는 깨어져 조각이 나서 세 개나 뒹굴고 있다. 묘비는 풍우에 시달려 뭐가 새겨져 있었는지 잘 보이지 않았다.

 

오후 6시경 숙영지에 도착했다. 다른 날에 비해 빠른 시간이다. 위치는 아르한가이(Arkhangai) 아이막의 체체를렉에서 조금 올라온 곳으로 한가이 산맥에 가까운 곳이다. 내린 곳이 드넓은 초원이어서 마음마저 넓어지는 듯하다. 여기에서 몽골 운전기사들이 전통양고기 요리인 허르헉(Horhog)을 만든다고 한다.

아까 시장으로 식품 구입하러 갔을 때, 양 두 마리를 잡아 손질을 해서 가져왔기 때문에 오늘은 요리하기가 쉬울 거라고 말했다. 허르헉을 요리하는 커다란 찜통도 가져와 본격적인 요리를 한다고 한다. 기름기를 싫어하는 한국 사람들을 위해 기름을 제거하고 요리한다고 하니 기대해 볼만 하다. 유로선생님을 포함해 몽골운전기사 8명이 부지런을 피우며 준비한다.

 

다른 날보다 일찍 도착해 텐트를 빨리 쳤다. 해가 너무 쨍쨍해 그늘이 없어 저녁 먹을 때까지 텐트 안에서 쉴 작정이었다. 이젠 손발이 척척 맞아 금방 완성이 되었다.

그러나 날씨가 이상하다. 낮에는 그렇게도 맑더니 조금 전부터 천둥이 울기 시작한다. 하늘에는 어느새 날아 왔는지 검은 구름이 꽉 끼었다. 건너편 산은 하늘이 파랗건만. 게다가 돌풍까지 불어 요리를 하려고 불을 피우던 몽골기사들이 어쩔 줄 몰라 한다.

비가 오기 전에 침낭과 케리어를 챙겨 텐트 안에 두려고 나오자마자 우르르 쾅쾅 하는 소리와 함께 폭우가 퍼붓기 시작한다. 깜짝 놀라 가장 가까운 버스 안으로 얼른 몸을 피했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버스에서 내다보니 광풍에다 폭우까지 겹쳐 우리 텐트가 이리 저리 흔들리더니 폭삭 내려 앉아버린다. 그런데 어인 일인지 옆에 쳐놓은 텐트는 위쪽만 바람에 흔들리고 몸체는 꼼짝 않고 버티고 있지 않은가. 다른 텐트들도 거의 우리텐트와 마찬가지로 다 무너져버린 상태여서 너무나도 이상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텐트를 친 조원 6명이 앉아서 쉬다가 한 명도 나오지 못하고 갇힌 몸이 된 것이다. 거센 바람에 텐트가 무너질까봐 기둥을 하나씩 붙잡고 버티었다고 하니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20여 분간 비바람이 몰아치더니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비도 뚝 그치고 바람도 잠잠해졌다.

 

기껏 잘 쳐놓은 텐트가 무너져 버렸으니 기가 막혔다. 안에 둔 짐이 물에 젖어 먼저 꺼냈다. 텐트를 덮은 덮개부터 가장자리의 물을 털어내었다. 고여 있던 물이 주르륵 소리를 내며 쏟아진다. 남자 대원들 몇 명이 와서 우리를 도와주었다. 수해복구중이라는 단어를 쓰며 서로 쳐다보며 웃었다. 텐트를 치는 와중에 하늘에 무지개가 떴다고 누가 알려준다. 각자 텐트를 다시 치느라고 정신이 없어 보러가는 이가 하나도 없다.

텐트 안에도 물이 들어가 매트는 꺼내서 말리고 텐트 덮개는 물을 활활 털어서 다시 덮었다. 정말로 육이오 때 난리는 난리도 아니라더니 지금이 그런 것 같다. 사막의 변화무쌍한 날씨는 예측할 수 없다더니. 된통 경험하게 된 것이다. 텐트를 다 치고 나서 하늘을 보니 무지개가 그때까지 하늘에 버티고 있다.

수해복구 현장을 MBC가 드론을 띄워 촬영했다고 한다.

 

양고기를 손질하다 비바람에 놀란 몽골기사들은 고기를 버스 안으로 가져가서 손질을 한 모양이었다. 내가 탔던 4호차에서 요리하던 곳으로 도로 옮겨 가고 있다. 필요한 것이 있어 가지고 갈려고 버스에 오르니 고기비린내가 확 난다. 내가 찡그리니 운전기사가 청소를 하면서 나를 보고 씩 웃는다. 미안하다는 표정이다. 내일은 2호차를 타니까 나는 괜찮지만, 내일 이 차를 타는 사람은 괜찮을 런지 모르겠다. 문을 열어 놓았으니 내일 아침까지는 냄새가 다 빠져나가리라.


몽골의 해는 길다. 여덟시 반이 지났는데도 해가 아직 떠 있다. 한바탕 소동이 지나가자 이제야 사물이 눈에 보인다. 초원 저편에 양과 염소 떼가 몰려가며 소리를 낸다. 대충 봐도 천여마리는 넘는 듯하다. 가축을 모는 이가 말을 타고 양과 염소 무리를 이끌고 간다. 어쩌면 그리도 말을 잘 듣는지. 무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질서를 지키는 것은 이들에게 배워야 할 것 같다. 이럴 땐 가축이 사람보다 낫다는 생각이 든다. 어느 선생님이 요즘 초등학교 애들은 한 반이 삼십 명밖에 안 되지만 너무 말을 안 들어 그만 두고 싶을 때가 많다는 하소연을 들어서이다.

대초원을 배경으로 해질 무렵에 떼지어가는 양과 염소의 무리들. 영화의 장면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을까. 무리들이 점점 멀어져 간다. 저 멀리 가버리니 흰 점과 검은 점이 줄지어 서서 가는 것처럼 보인다.

 

9시 반이다. 허르헉이 완성되려면 30분 더 기다려야 하니까 그 동안에 자기소개를 하기로 했다. 하는 도중에 허르헉이 다 되었다는 연락이 와서 중단되었다. 950분에 저녁으로 허르헉을 먹었다. 허르헉을 만들 때 넣은 감자와 당근이 맛있어 많이 먹고 고기는 조금 먹었다. 아무래도 젊은 학생들은 식욕이 왕성해 많이 먹는 것 같았다. 몽골 아저씨들이 고기를 통째로 들고 뜯는 걸 보니 맛있어 보였다. 몽골 운전기사인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따라온 몽골꼬마 바인다와(9)는 먹어본 솜씨라 그런지 야무지게 먹는다. 4호차 운전기사가 꼬마의 아버지여서 때론 4호차에 올라와 뭐라고 나불거리며 깔깔 웃어대었다. 알아들을 수는 없으나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항상 웃는 얼굴이어서 대원들이 다 예뻐하는 귀염둥이다.

 

11, 하늘에 구름 한 점이 없다. 별을 관측하기 좋은 날이다. 머리 위에서 밝게 빛나는 별 베가, 여름철 이등변 삼각형, 북두칠성과 북극성, 봄의 대곡선 등 박사님의 설명이 이어진다. 밤하늘에 흐르는 은하수가 오늘따라 더 잘 보인다. 밖에 깔아 놓은 매트 위에 누우니 하늘의 별이 온통 자기에게로 쏟아지는 듯하다. 별에 홀려 침낭 커버도 없이 너도 나도 비박을 하겠다고 난리다. 결국은 12시까지 누워서 별을 보다가 들어간 모양이었다. 나는 저만치 멀리 떨어져 혼자서 별을 관측하다가 자정을 넘기고 잠자리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