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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3-27(1진 전체일지 후반부)

 

723(목요일: 탐사 7일째)

 

사막을 빠져 나왔다. Nemegt 공룡계곡을 뒤로 하고 1진의 탐사 여정도 후반부로 들어서고 있다. 이른 봄 새싹이 날 때 산에는 매일 조금씩 연두 빛이 더해가는 것을 느낄 수 있듯이 사막을 벗어나는 과정 또한 비슷했다. 맨 땅에 거의 보이지 않던 푸른 풀이 모래를 비집고 나오고 있고 덜컹거리며 버스가 북쪽을 향해 올라감에 따라 눈에 띠게 녹색이 드리워지고 어김없이 그 풀을 뜯는 염소나 양, 소나 말 떼가 증가한다. 이제 다시 인간의 대지로 들어간다.

 

비치기틴 암으로 가는 길에 사막을 벗어났다는 신호로 물이 넉넉하게 나오는 우물을 만났다. 물을 보는 것만으로도 심신의 갈증이 해소되는 것을 느낀다. 물이 부족하다는 것은 엄청난 스트레스를 준다. 물 부족으로 미래에는 지역 간 분쟁이 잦을 거라는 우려가 새삼스럽게 현실감을 준다. 우리도 물을 떠날 수 없다.

 

공룡이 서식지를 독점하고 있던 중생대에 포유류는 밤으로의 진출을 꾀하여 서식지의 타임 쉐어링이 가능하게 했고, 밤의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고안들은 지적 능력을 가진 포유류의 출현을 가져오게 했다. 생물들에게 성과 식은 생존에 가장 근본적인 것으로 인간에서도 모든 문화와 경제 활동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암각화는 이미 인간이 상징을 이용해 기억의 외재화를 시도했고 시공의 한계를 벗어나는 정보 전달의 수단을 찾았다는 증거가 된다. 큰 바위산 전체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암각화들은 대개는 산양을 그린 것이다. 암벽을 타는 길목마다 산양 똥이 수북이 쌓여 마치 스펀지 위를 걸어가는 느낌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이곳엔 산양이 많이 살았나보다.


724(금요일: 탐사 8일째)

 

오늘은 구석기인의 마음을 알아보는 날이다. 선조들의 마음을 알고 싶다. 현생인류의 사고 구조는 후기 구석기 문화의 대폭발에 잘 나타나 있다. 구석기는 100만년부터 일 만 년 전까지 긴 기간이었지만 90% 이상의 기간은 거의 변화 없이 지내다 마지막 3-1만년 사이 문화적 폭발 상태가 일어나는데 이 시기가 현생인류의 마음을 들여다 볼 열쇠를 가지고 있다. 최고로 오래된 동굴벽화도 4만년을 넘지 못한다. 구석기인들의 내면의 세계는 동물이나 자폐인과 비슷한 특징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본다. 영국인 험프리는 동굴벽화를 분석하면서 그려진 동물들이 무척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지만 배경이 없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주변 배경과 상호 교류하는 감정 상태가 없는 격리된 삶을 살았을 거라고 주장한다.

 

고비알타이에 있는 구석기 동굴인 차강 아구이(white cave)에는 4개의 층이 발견된다. 70만 년 전 구석기 시대의 유물에서 티벳 승려의 의례 도구, 북송시대의 동전 등이 출토 된 곳이다. 3년 전 몽골탐사 때 유로아저씨의 소개로 방문했을 때는 협곡을 지나서 왔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번에는 들판을 가로질러 왔다. 게다가 주차장도 만들어져 있고 동굴 가는 길은 데크 처리를 해 놓았다. 동굴 내부에도 구석기인의 모습을 조각해 세워 두었다. 3년 전에는 없던 일이다. 몽골도 이렇게 서서히 변해 가고 있다. 몇 년 후에는 또 어떻게 변해 있을지...

동굴 속 곳곳에 수정이 환하게 박혀 있다. 굴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더 넓게 퍼져 있고 내부도 여러 곳으로 뚫려 있는 듯하다. 어둡지만 서늘하고 쾌적하다. 답사를 마치고 나온 대원들이 삼삼오오 앉아서 공부를 하고 있다. 작년 서 호주 탐사 때부터 따라붙은 EBS팀이 박사님을 모시고 촬영을 마무리 할 때까지 묵묵히 앉아 공부하며 기다리는 대원들의 마음이 넉넉하다. 오늘도 촬영이 길어진다. 마침 점심시간이다. 밥이나 먹자.

 

우린 그늘 막을 치고 점심 준비를 했다. 점심은 늘 샌드위치. 울란바토르에서 산 빵을 사막으로 끌고 다녔으니... 날이 갈수록 건조해지는 빵 먹기가 쉽지 않다. 오늘 식사 팀이 불을 피울 것을 고집한다. 샌드위치는 잼이든 치즈든 양배추든 있는 대로 바르고 집어넣어 쥬스나 우유로 삼키는 정도의 식사다. 오늘은 햄과 소시지를 구워 줄 참이란다. 구우니 풍미도 더하고 느끼한 기름도 빠져 담백하다. 약간의 수고가 많은 이들을 행복하게 한다. 특히 어린 순서대로...

 

차강 아구이를 떠나 우리는 북쪽을 향해 열심히 달린다. 역사 시대 속으로... 하지만 길은 험하고도 멀고 버스는 속도를 더 냈다가는 뒷좌석 사람들 모두 머리가 깨질지도 모르고... 도중에 야영을 하기로 한다. 유로 아저씨가 안내한 곳은 물 가까이 있는 초지. 좀 습하고 모기도 많아 대원들이 걱정하자 다시 이동을 했다. 조금 더 가서 멀리 산이 보이는 초원에 야영지를 잡았다. 막상 텐트를 치려 하니 가축들이 쓸고 지나간 자리인 듯. 흔적이 많지만 대충 걷어내고 그 위에 텐트를 친다.

 

그동안 급하면 먹었던 전투식량, 박자세 탐사에 처음 소개되는 음식인데 장점은 햇반 보다 가벼워 짐 꾸리기가 좋고 그것 하나로 한 끼를 해결할 수 있고, 요리도 아주 쉽다는 점이다. 더운 물만 끓여 부으면 끝. 하지만 큰 단점으로 몇 번 먹으면 질리게 된다는 점이다. 오늘 저녁도 그 전투식량이 배당 되었다. 지치고 힘든 대원들에게 조금이라도 맛있는 밥을 줄 수 있을까 고심하던 황해숙 대원이 아이디어를 냈다. 궁하면 통한다던가? 있는 야채와 남은 햄, 전투식량을 넣고 볶음밥과 감자 된장국을 끓이기로 한 것이다. 손이 더 가고 정성이 더하여 좀 더 행복한 음식이 제공되고 이는 다음 날 탐사의 원동력이 됐다.

 

탐사동안 내내 남은 식량을 파악해서 메뉴를 정하고 때마다 간식을 챙기며 대원들의 상태를 살펴가며 애쓰던 대원들, 매일 넣다 꺼냈다 수많은 장비를 관리하고 챙기는 대원들, 어디든 도착하면 화장실부터 설치하는 대원, 각자의 텐트를 폈다 접었다 관리하는 모든 대원들, 대단한 우리 대원들... 하루가 다르게 학습 효과를 보이더니 이제는 손발이 척척 맞아 들어간다  

 

725(토요일: 탐사 9일째)

 

이제 아침에 눈이 닿는 곳까지 산책하는 대원들이 늘었다. 화상을 입은 것처럼 확실한 이미지 몇 장 얻어 갈 수 있으면 성공이다. 그런 이미지는 새로운 곳으로 지평을 열 수 있게 하여 뇌 지도를 바꾼다. 너른 하늘, 너른 땅, 그리고 거칠 것 없는 지평선만으로도 대원들 모두 그런 이미지 몇 장은 얻었을 것 같다. 고비를 벗어나 올라갈수록 푸른빛은 짙어지고 야생화도 더 다채로워진다. 점심과 휴식을 위해 버스에서 내렸다. 얼마 전부터 간간이 버스가 포장도로로 운행하고 있다. 하지만 샛길은 비포장이다. 초록의 풀밭과 황토 색 대지 사이에 노란 유채 밭이 넓고 길게 띠 모양으로 펼쳐져 있다. 시내물가에는 각종 꽃이 피어있다. 지금이 몽골은 가장 아름다운 계절이 아닐까.

 

오늘은 카라코룸과 에르데니조 사원을 보고 위그루성까지 가는 것이 일정이다. 이에 대한 학습이 며칠 전부터 계속 되었는데 우선 에르데니조 사원의 역사를 통해 알아보기로 한다. 이 사원은 1585년 아브타이 사인 칸 시대 조카인 촉트타이지와 그 어머니 타이할 왕비가 세운 몽골 최초의 사원이다. 쿠빌라이가의 마지막 왕인 차하르부장 릭덴 칸은 촉트타이지와 연합하여 쿠빌라이 시대를 재현하고자 사캬파의 사원을 지었다. 이 후 이 사원은 서 몽골을 평정하여 세워진 준가르의 지도자 갈단에 의해 (1688년 동 몽골을 침공했을 때) 파괴된다.

 

10여 년 동안이나 티벹에서 달라이라마에게 달라이라마의 환생자로 승려 수업을 받던 갈단이 왜 사원을 파괴한 것일까? 역사는 이렇다. 우만호의 투메드 부에서 알탄 칸이란 영웅이 나오는데 자신의 부족들을 이끌고 청해로 이주하여 근거지로 삼았다. 여기서 세기의 만남이라 부르는 소남가쵸 (겔룩파)라는 티벹 고승과 만나 달라이 라마란 칭호를(여기서부터 달라이 라마 시스템이 만들어진다.) 부여하고 자신은 전륜성왕의 칭호를 받는다. 따라서 이곳의 불교는 겔룩파로 사캬파사원은 파괴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종파가 다르면, 생각이 다르면 없애야 할 적이라는 미망은 참 뿌리가 깊다.

 

에르데니조 사원 관람은 전문 가이드의 안내를 받았다. 그녀는 마이크 대신 우리가 이번에 조용한 학습을 위해 새로 준비한 free talk (수신기)를 이용했다. 우리는 부처님의 청년-중년-노년기 모습을 모신 법당에 대해 설명을 들었고 그 중에는 황모를 쓴 쫑까파를 모신 곳도 있었다. 몽고의 역사공부에서 티벹 불교와의 관계를 모르면 절반은 모르는 것이라고 강조했건만 이들의 얽힘이 간단치 않고 후반부에는 몽골, 티벹 간을 뒤에서 조정하는 홍타이지, 강희제의 입김까지 겹쳐 복잡하기 그지없다. 정치와 종교가 자신들의 이해관계로 뒤엉켜 세상을 어지럽히는 형국이랄까. 티벹 고승의 환생이라 알려진 잔나바자르(1635-1723)는 티벹에서 달라이라마 5세인 룹상가초(룹산자초)의 제자로 있다 돌아온다. 돌아 올 때 티벹 승려 600명을 대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현재 몽고의 국보인 청타라, 백타라를 만들고 에르데니조 사원을 비롯하여 아마르바야스갈랑트, 간단사원 등을 설계하거나 건립하였다. 그는 몽골의 달라이라마 격인 젭춘담바 호톡투 (복드 칸)1세가 되어 정치와 종교의 수장이 된다. 달라이라마 5세는 포탈라 궁을 세웠을 뿐 아니라 자신을 도와 준 구시칸의 집안이 대대로 티벹의 왕이 되도록 했다.

 

 

그 후 자그마한 박물관에 갔다. 옛 카라코룸의 배치도와 흉노(훈누), 선비(시안비), 유연(주장/네룽), 돌궐(투르크), 위그루(오이그르), 키르키즈, 거란 (게당), 몽골제국에 이르기까지의 영토 지도와 유물이 있는 곳이다. 가는 길에 게르 커피숍, 민속품 가게 등이 있다. 오랜만에 문명사회에 들어선 우리에게 눈에 띄는 것이 박물관 기념품 가게였다. 들어서니 먼저 지도가 보였다. 작은 걸로 하나 사고, 만둘하이카툰이 표지에 나온 씨디를 샀다. 다들 기념이 될 만한 것들을 둘러본다. 다시 촬영이 길어진다. 앉아 있기도 하고 일부는 박물관 안에 있다. 헌데 좀 뒤늦게 화장실이 떠올랐다. 수돗물이 나온다. 발 빠른 대원들은 벌써 다 씻었다. 그제 우물물 한바가지 뒤집어 쓴 후 처음 보는 깨끗한 물이다. 깨끗한 물에 손발을 씻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행복하던지...

 

카라코룸을 뒤로 하고 우리는 하르발가스(위그루성)를 향해간다. 하르발가스는 흙으로 쌓은 토성으로 사방이 터져 있는 곳에 덩그마니 폐허로 남아 있다. 그래도 우리는 성벽 위 길을 따라 걸어본다. 그 길에도 말똥이 있는 걸로 봐서 말까지 성벽 위로 걸어 다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실제로 다음 날 아침 말을 탄 사람이 그 위에 서있는 장면을 보기도 했다. 위그루는 744-840년 사이 백 여 년간 이 몽골고원의 주인으로 등장한 때도 있었다. 하지만 몽고인들이 팍스 몽골리카를 이룩하는데 유능한 상인으로 경험이 많은 위그루인들은 높은 관직에 올라 상업과 재정 부분을 담당함으로써 세계 제국 경영에 참여하게 되었다. 

 

오늘은 위그루성 앞에 텐트를 쳤다. 식료품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도 대원들은 기발한 음식들을 만들어 모두를 즐겁게 한다. 저녁메뉴는 북어가 들어간 국수였다.(메뉴가 음식 족보에는 있남?) 이젠 그룹을 짓지 않고 다들 둘러서서 밥을 먹는 일이 자연스럽다. 따뜻한 음식이 고맙다. 오늘 밤은 1진이 초원에서 자는 마지막 밤이다. 저녁 후 우린 둘러 앉아 시도 읊고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탐사 내내 틈을 내서 좋아하는 시를 외운 대원들이 많다. 달빛 아래서 시 낭송이 몇 차례 지나가자 조금 어색한 침묵이 돌았다. 이때 송찬옥대원이 노래를 부르겠단다. 피곤으로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지만 용기를 내서 최선을 다해 불러준 노래는 그 밤의 분위기를 싹 바꾸어 놓았다. 그리고 몽고인 기사 들이 자신들의 전통노래를 불러 주었다. 그들의 노래에는 유목민들의 원초적인 외로움이 배어 있어 초원의 막막함이 온 몸으로 전해지는 것 같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그들은 우리에게 몽고 전통음식을 만들어 맛을 보도록 했다. 양고기와 감자를 차돌을 달궈서 익힌 음식이었다. 담백하고 맛이 있었다. 하지만 양고기는 우리에게 친숙하지 않고 사람에 따라 호불호가 나뉘는 음식이다. 기름진 고기요리를 오랜만에 먹은 대원들 중 몇몇은 다음 날 설사를 하고야 말았다.

그래도 몽골 기사 아저씨들의 성심을 다 한 협조와 풋풋한 인정은 가슴 뭉클하게 오래 남을 것이다.

 

726(일요일: 탐사 10일째)

 

초원에서의 마지막 아침이다. 벌써 여기저기로 산책을 나간 대원들이 눈에 띈다. 텐트를 걷는 일이 많이 익숙해 졌는데 이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몰론 남은 일정이 있는 대원들은 아직 그런 감회가 없겠지만 내일이면 떠나야 하는 사람들에겐 이 초원이 벌써 사무친다. 언제 또 이런 초원에 있게 될까.

 

아침을 먹고 잠시 강의가 있다.

인간 : 시공의 제약을 벗어나다. DNA, 신경체계, 언어를 가진 존재로 진화를 함으로써...

강의가 끝나고 기념촬영이 있었다. 대원들은 모두 울란바토르를 출발 할 때와는 달리 새카맣게 타고 씻지도 못하여 노숙자 내지는 방랑객에 딱 어울리는 모습들이 되어 있다.

 

오늘의 일정은 거란성(하르 보긴 발가스)과 촉친 차강 발가스를 거쳐 저녁 전에 울란바토르에 도착하는 것이다. 3년 전 탐사 왔을 때에는 울란바토르를 출발해 첫 밤을 거란성터 앞에서 지냈던 기억이 난다. 3시간쯤 달려서 거란성에 도착했다. 위그루 성 보다 규모가 훨씬 크다. 성 내부로 들어가는 길목에도 철책을 해 놓아 짐승들이 마음대로 들어갈 수 없게 해 놓았다. 거란족은 916년 야율아보기가 세운 요나라의 근간으로, 926년 발해를 멸망시키고, 936년 한족의 치욕으로 알려진 만리장성 아래쪽의 연운 16주를 통치함으로써 정주민을 통치하는 경험이 있는 유목민족이다. 효율적인 통치를 위해 남명관-한족을 다스리는 조직과 북명관-동족을 다스리는 조직을 이분 시켜 운용하였으며 정식으로 성을 쌓은 유목민이다. 위그루성과는 달리 벽돌을 구워 쌓은 성이어서 더 견고하고 규모도 있다. 성위에 올라서서 사방으로 툭 터진 이 평원에 게르가 가득 있었을 것을 상상해 본다. 그들이 훗날 몽골제국에 군사력을 보태며 세계경영의 또 한 축을 담당했었단다. 그리고 오늘날의 이 적막한 초원을 본다. 몽고의 속담 그 어떤 영웅도 화살 한방이면, 그 어떤 부자도 춘설 한번이면 사라진다.”라는 말이 가슴에 꽂힌다.

 

아골타의 금나라에 쫒겨 서쪽으로 간 야율대서기는 서요 (카라키타이)를 세운다. 유럽에서는 이 나라가 중국을 대표하는 나라로 여겼다. 1142년 서요는 셀주크 투르크와 대치하다 그들을 격파했는데 십자군 전쟁이 한창이던 시절이라 본인들도 모르게 기독교인들을 도와 준 꼴이 되었다. 기독교인들은 이들을 성 요한의 나라로 생각했다. 바스코 다가마의 탐험 여행이 이 성 요한의 나라를 찾는 것을 목표로 했다한다. 유럽의 대항해 시대를 열게 된 계기가 서쪽으로 쫓겨 간 유목민들과 연관이 있다니 우리는 세계사를 보는 관점을 바꿀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거란성 옆에는 아주 조그만 박물관이 있고 그 내부에는 촉토타이지의 상과 사진(?)이 있었다. 촉토타이지 역을 맡았던 몽고 배우의 사진이었지... 박물관을 둘러보고 성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는 탑도 둘러 보았다. EBS팀이 또 바빠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점심을 먹기로 했다. 빵에 잼을 발라 들고 그늘을 찾았다. 이제 이 식빵은 물 없이는 삼킬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우린 작은 건물 뒤편에 생긴 그늘에 한 줄로 앉아 빵을 먹는데 그 동네 개가 한 마리 나타났다. 우린 너나 할 것 없이 개 친구에게 빵을 던져주기 시작했다. (마침 먹긴 힘들고 처치 곤란인지라 굶주린 개와는 잘 만난거지)

 

식사를 마치고 마지막 목적지인 촉친 차강 발가스로 갔다. 촉토타이지와 그 어머니 타이할 왕비가 살았던 성터이다. 이 두 사람은 몽고의 문예부흥을 일으킨 사람들로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으며 성터 근처에 있는 커다란 비석은 이들의 공적을 새겨놓은 공덕비인 듯하다. 남아있는 성벽을 보니 아름답고 정교하게 쌓아져 있었다. 이렇게 마지막 일정을 마쳤을 즈음 이미 시간은 오후 7시 가까이 되었다.

 

여기서 울란바토르까지 3시간은 더 가야 한단다. 무사히 가기를... 속도를 높여가며 포장도로를 달리길 2시간여. 갑자기 A호 차가 길가로 차를 세운다. 내려보니 4대뿐. B호 버스가 보이지 않는다. 시원치 못하더니 주저앉았나? 다들 걱정을 하고 있는데 조금 손을 봤는지 오기는 왔다. 하지만 조금 더 가더니 B호차의 대원들이 모두 A호차로 옮겨온다. 작은 차에도 좌석 남는 대로 옮겨 탔다. 더 지연되었다가는 저녁도 못 먹고 길에서 자야 될 지경이었다. 겨우 목적지에 도착해서 예약한 몽골 전통 음식점에 들어가니 10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다 퇴근한 종업원들을 불러 오고 민속공연을 하는 악사들이 불려오고 대원들까지 나서서 서브를 도와주고 하면서 늦은 만찬을 먹을 수 있었다. 이제 무사히 끝났구나. 모두들 안도하는 분위기 속에 서로 아쉬움을 달랜다. 12시 전에 우리의 숙소인 찜질방으로 가야 한단다.

 

727(월요일 : 탐사 11일째)

 

자다가 추워서 찜질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래도 어제 밤에 샤워도 하고 쾌적하다. 아침에 다시 한 번 씻는다. 이런 호사가... 모두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 왔다. 아니 다들 이렇게 멀끔하셨단 말인가? 집에 갈 짐 정리를 하면서 계속 여행을 해야 하는 대원들에게 쓰일 만한 물건들은 인수인계를 했다. 아침으로 식당에 차려진 밥을 먹어보는 것도 오랜만이다. 4년 전 실크로드 탐사 때 대원 중 몇 명이 개인사정상 사흘 먼저 귀국하고 나머지는 탐사를 계속했던 적은 있지만 이렇게 1진을 보내고 2진을 받아 탐사를 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전체 일정을 소화하는 대원들이 18일이라는 긴 여정을 무사히 잘 마치기를 바란다.

탐사 중반을 넘어가는 어느 아침 잠시 2진에 합류해 볼까 욕심을 냈었지만 그날이 다 가기 전에 포기했던 나는 조성연 대원의 말처럼 평생에 가장 잘한 결정을 한 건지 아니면 혼자서는 평생 못 가볼 곳을 놓치고 뼈아프게 후회를 하는 건 아닌지 반반인 마음으로 (시원 섭섭--이런 복합적인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것은 내 뇌 안의 연합영역이 발달되어 있다는 말씀) 남겨진 대원들의 배웅을 받으며 칭기스 칸 공항을 떠났다.

2진이 타고 들어온 비행기를 우리가 타는구나. 그러니 서로 엇갈릴 수 밖에 없겠다.

2진과 바톤 터치를 못하고 나온 게 못내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