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차 박자세 해외학습탐사 몽골 2, 201581


201581일 일지

 

벌써 5일째다. 새벽 1시가 넘어 잠이 들었다. 잠이 들었을 땐 몰랐는데 잠결에 빗소리가 들린다. 얇은 텐트지붕이라 유난히 크게 들려와 선잠을 깨운다. 빗소리와 함께 잠이 들다 말다를 반복하다가 6시경에 일어났다. 밖에는 굵은 비가 내리는지 텐트지붕을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하다. 게다가 바람까지 불어 텐트자락 펄럭이는 소리도 합세해서 들린다. 어떻게 되었나하고 걱정이 되어 나오니 아니나 다를까 텐트 안쪽에 짐 놓은 자리가 물바다다. 일용품을 넣은 헝겊주머니가 푹 젖어 무겁다. 안에 든 머플러, 잠바, 손수건 등은 물에 젖어 물이 줄줄 흐른다. 우선 갖고 나와 물기라도 짜려고 해도 바람과 함께 세차게 몰아치는 비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민혜숙님의 캐리어는 방수가 안 되는 가방이라 속까지 물이 스며들어 울상을 지었다. 비가 개어야 물기도 짜고 잠간이라도 널어 말릴 수 있을 텐데. 나는 폭 젖어 물이 줄줄 흐르는 운동화를 휴지로 대강 닦아 신었다. 아침식사는 어떻게 하나 싶어 가보니 아침은 조별로 텐트로 가지고 가서 먹어야 된다는 말이었다. 아침 7시가 넘자 김화자님이 쟁반에 미역국과 누룽지, 반찬을 날러와 텐트 안에서 먹었다. 조그마한 공간에서 밥을 먹으며 이야기꽃이 피었다. 소리가 새어 나갔는지 조용히 하세요.”라는 박사님의 경고소리가 들려왔다. 모두 찔끔해서 소리도 낮추고 말수도 줄였다. 비가 와서 어쩔 수 없이 텐트 안에서 먹게 되었지만, 하나의 추억꺼리라며 셀카 사진을 몇 방 찍었다. 찰칵, 찰칵 하고. 식사가 끝나고 나가니 신기하게도 비가 그쳐 있다.

 

질컥거리는 운동화를 휴지로 닦아내어 다시 신고 밖으로 나왔다. 어제 저녁에 못 다 쓴 일지를 쓰려고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를 깔았다. 은박지자리도 물에 젖어 꿉꿉하긴 해도 그냥 앉았다. 비가 그쳐주어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오늘 식사당번이었다면 고생했을 터인데 어제 라서 다행이라는 생각만 할 수 없었다. 비가 오는 데도 불구하고 식단을 차려낸 대원들에게 감사의 말을 올리지 않을 수 없다. 현재 시각은 742분이다. 아침 8시 출발은 글렀나보다. 비 때문에 아직 텐트도 걷지 못했으니 말이다. 비는 그쳤으나 아직 하늘은 잔뜩 흐려있다. 젖은 채로 텐트를 걷어 말았다. 자고 일어난 자리에 풀들이 납작하게 누워서 일어날 생각을 않는다. 자는 우리는 풀이 깔개가 되어 편히 잠들었지만, 풀에게는 미안한 노릇이다. 물에 흠씬 젖은 텐트가 무거워 낑낑대니까 홍경화님이 능숙한 솜씨로 도와주어 얼른 끝냈다. 이렇듯 상부상조하는 힘이 모여 박자세를 이끌어가는 원동력이 되지 않았을까. 그 외에 알게 모르게 도와주는 대원들도 마찬가지다. 참으로 고맙고 감사할 따름이다.

 

아침강의가 820분에 시작되었다.

15세기-대항해시대(몽고제국이 대항해시대를 촉발함)

16세기-종교개혁

17세기-시민혁명, 과학혁명

18세기-산업혁명(자본주의와 제국주의가 생김)

17세기20세기까지 서양이 많이 달라짐으로 인해 아직까지는 모든 면에서 미국이 앞서고 있다. 15세기부터 서양은 급진적으로 발전했으나 동양은 멈춘 상태로 오래 계속되었다.

다시 말하면, 서양은 기하급수적으로 발전했고 동양은 거의 제자리걸음이다.

그라프로 표시하면 서양은 일직선으로 가다가 갑자기 수직상승했고 동양은 거의 변동이 없이 일직선상태다.

서양은 1215년 대헌장1628년 권리청원1683년 권리장전1776년 미국독립선원1785년 프랑스 대혁명을 거침으로, 서양은 모든 백성들이 창의성을 발현 할 수 있는 국민국가로 발전한다.

 

9시 출발했다. 가면서 보니 비가 내려서인지 풀들이 시퍼렇게 자라 건강해 보인다. 915분경 포장도로에서 비포장도로로 바뀌었다. 한참을 달려 1035분쯤 포장도로가 나오고 제법 큰 도시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세첸칸 박물관을 견학할 예정이다. 비는 여전히 질금질금 내리고 있다. 지명은 온도르항(Ondorhaan) 헨티(Khentii)아이막(Aimag)으로 징기스칸의 고향이다. 그래선지 박물관 앞에 말을 탄 징기스칸의 동상이 늠름하게 서있다. 1828년에 세첸칸이 지어 살던 집이었으나 지금은 박물관이 되어있다. 우리가 다녀온 다리강가도 예전에는 세첸칸에 속해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건물이 여러 채였다. 정확하게 1046분부터 박물관 투어가 시작되었다.

 

청나라 순치황제가 몽골의 귀족들에게 자삭이란 칭호를 주었다. 몽골에 8개의 자삭을 내렸는데 우익에 4개 좌익에 4개였다. 알타이산맥을 중심으로 서쪽은 우익, 동쪽은 좌익이었다. 투시에트칸과 세첸칸은 좌익이었고 자샤트칸과 샤인노얀칸은 우익이었다. 투시에트칸은 곰보도로지의 자손이다. 자샤트와 투시에트에 내분이 일어났다. 투시에트칸의 동생인 잔나바자르는 준가르의 갈단과 철천지원수였다. 1655, 갈단과 싸움이 벌어졌을 때 쟈사트와 투시에트는 세첸으로 이주하여 지금까지 내려왔다. 잔나바자르는 이흐후레라는 이동식성단을 이끌고 600여명을 데리고 다녔다. 이흐는 크다는 뜻이고 후레는 이동하는 승려집단을 말한다. 이흐후레는 울란바토르의 간단사가 대표적이다. 간단사는 겔룩파의 방장이 계시는 곳이다.

 

박물관 안의 부처님 앞에는 8개의 향로, 곡식이 담긴 8개의 그릇이 있고, 각각 모양이 다른 나무에 조각된 나무판이 세워져있다. 연꽃, 법륜, 금강저 등 각각 다른 모양을 조각한 것이다. 송첸캄포는 티베트불교를 처음으로 받아드린 왕으로 왕비 2명은 보신이 되어 청타라 백타라로 모셔져 있다. 타라(tara)의 종류는 21개다.

 

티베트만다라를 액자로 만든 것 3개 중에 관불의식이 그려져 있다. 음력 사월 초파일에 행하는 관정식(灌頂式) 혹은 관불식(灌佛式)은 밀교의 영향이다. 옹곤이라는 인형은 바늘이나 침 등을 찔러 상대방을 해롭게 하는 주술용으로 쓴다. 여러 종류의 옹곤들이 보인다. 또 여러 종류의 금강저도 전시되어 있다. 꽃을 던져 부처를 이루는 투화득불(投華得佛)로 부처를 이루면 금강저를 얻는다고 한다.

 

전시관 안쪽에 있는 부처님의 왼쪽에는 윤장(輪藏), 오른쪽에는 보주(寶珠)가 드리워져 있다. 불구로는 향로, 경전함, 뼈로 만든 금강저, 나팔, 요령, 동으로 만든 삼각탑, 만다라조각, 보석염주, 동 발우, 동그란 모형에 사방에 금강저가 양각으로 조각된 것, , 음악소리를 내는 악기(Gandan). 바라, 소라나팔 등이 전시되어 있다. 특이한 것은 나팔로 길이가 2m정도로 길다. 총도 있는데 총대와 총구에 금속으로 조각이 섬세하게 되어 있다.

 

중앙에 새로 지은 건물에는 역대 칸들의 초상화가 죽 걸려 있다. 양쪽으로 건물이 있는데 왼쪽은 방금 보고 온 박물관이다. 오른쪽 전시관은 역대 칸들이 사용했던 탁자 4개와 의자 2, 거울 등이고 나무로 만든 말채찍은 길이가 1m가 넘었다 불교적 문양이 새겨진 옥쇄, 인장 등이 25개나 전시되어 있다. 자세히 보니 그 중에 태극문양도 있다. 동으로 만든 해태상, 녹색 옥으로 만든 옥그릇 등이 있고 특이한 것은 상아와 동으로 만든 소라모양의 불구인데 여러 빛깔의 비단 천을 길게 매놓아 눈에 띤다. 혁대 2개는 바클 장식에 불교문양이 새겨져 있고, 칼은 칼집의 장식도 요란하고 문양도 화려하다. 몽골식 은컵도 있고 마구는 안장과 발걸이, 쇄기 등이 놓여 있다. 그 외에 각종 못, 연장, 도끼, 도구 등을 만드는 작은 연장들이 전시되어 있다.  한쪽 옆에 마지막 세첸칸이었던 나왕느루의 초상화와 사진이 걸려있다. 나왕느루는 1937년 라마승을 대량 숙청할 때 총살을 당했다. 스탈린 당시로 30만 명의 승려가 죽음을 당한 슬픈 역사가 있다. 나왕느루의 초상화 옆에는 세첸칸의 계보와 족보 2장이 나란히 걸려 있다.

 

박물관 건너편에는 청나라 건물양식의 건물이 둘 있다. 하나는 지붕위에 용마루가 없이 앞에서 기와를 쌓아 기와가 뒤로 넘기며 쌓은 것으로 위쪽에서 기와가 둥글게 넘어가는 지붕형태다. 옆에 옛날양식의 건물이 하나 더 있는데 여기는 용마루가 있다. 용마루가 있는 건물은 글씨와 그림 등이 전시되어 있다. 징기스칸이 머물었던 게르 모형을 도자기로 만든 것이 전시되어 있고  위그르 그림족자는 위쪽은 그림, 아래쪽은 문자로 되어있다. 사냥, 전쟁, 전쟁막사 등을 주로 그렸다. 왕의 그림 하나와 왕비의 그림 두 개가 모란꽃 무늬의 비단 족자로 된 것도 있다. 전쟁 때 썼던 투구, 칸이 관전하고 있는 민속놀이 그림, 동그란 투구, 굵은 철사로 만든 갑옷, , 포환, 살촉, 말에 쓰였던 도구, 아름다운 경치를 그린 그림이 13개가 전시되어 있다. 죽 둘러보고 바삐 나오느라 주마관산(走馬觀山)이었지만 많은 걸 배웠다.

 

박물관을 나오니 희한하게도 비가 그쳤다. 너무 급히 보고 나와 체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1148분이었다. 버스에서 보니 길거리 가로등에 말머리 장식이 달려 있다. 말갈기가 날리는 것 같은 문양이다. 조금 달려서 12시에 군트가로블란이라는 티베트 사원에 내렸다. 세첸칸이 만들어 스님들께 보시한 절이다. 티베트 양식의 불전에 들어가니 의식을 진행 중이었다. 짙은 향내음과 함께 염불소리가 흘러나온다. 부처님을 모신 양옆으로 작은 불상들이 사방에 빼곡하게 차있다. 1번부터 번호가 매겨져 있어 지나가며 죽 보니 800번 이상까지 나가는 걸로 보아 1,000불정도 모셔져 있는 성싶다. 법당에는 스님들이 앉아서 경을 읽는 경상이 앞에 따로 놓여있고 뒤로는 신도들이 앉는 의자와 경상이 몇 줄 있다. 경상은 비단으로 만든 덮개가 깔렸고 스님들이 앉는 자리에는 경전, , 향로, 소라모양의 작은 나팔이 놓여있다. 기도를 드리는 곳은 불전의 오른쪽으로, 스님과 신도들이 마주보고 앉아 있다. 스님은 두 분이고 신도는 네 명이다. 라마스님은 접시에 향로와 초를 놓고 요령을 흔들며 염불을 외우고 신도들은 합장하고 앉아 있다. 스님은 연이어 금강저를 오른손에 들고 곡식알을 던지며 염불한다. 옆의 스님이 동판에 곡식으로 옴 이라는 진언을 만들어 주니 접시를 들고 계속 염불하다가 내려놓고 이번에는 접시에 성냥개비 같은 나무로 쌓아올린 탑에 불을 붙이고 염불하면서 곡식으로 만든 진언을 불속에 던져 태운다. 다 타도록 깨알 같은 글씨로 가로로 쓰인 경전을 독송한다. 다음은 불꽃모양이 그려진 구리정병(淨甁)을 들고 옆의 스님은 진언을 썼던 빈 동판을 들고 같이 진언을 외운다. 그런 다음 정병에 든 물을 다른 그릇에다 세 번을 따른다. 옆의 스님은 동판에 달린 천으로 동판을 세 번 깨끗이 닦는다. 정병에 물을 따를 때마다 동판을 닦는 것을 계속한다. 그릇에 다 따라낸 물을 다시 정병에 붓는다. 그동안 신도들은 계속 합장을 하고 있다. 불공의식을 하는 제단에는 쌀과 밥, , 향 등을 담는 작은 그릇들이 각각 9개씩으로 둥글게 만든 대를 중심으로 죽 늘어놓았다. 어린 동자승 둘은 법당에 놓인 의자에 앉아 탁자 위에 놓인 경전을 보며 독송하기도 하고 진언을 외우기도 한다. 어리니까 염불소리가 낭랑하게 들린다. 다 끝났나 했더니 또 시작한다. 진언이 적힌 종이를 젓가락으로 집어 들고 진언을 하더니 내려놓는다. 그 다음은 갖가지 손 모양을 만들며 진언을 한다. 그러더니 진언이 적힌 종이를 신도에게 건넨다. 진언을 받아 든 신도는 불전 앞으로 붉은 카펫을 깔고 오체투지를 한다. 신도들 넷이 차례로 오체투지로 절을 올린다. 그러는 동안 스님들은 제법 두꺼운 경전을 빠른 속도로 독송한다. 경전은 넘기기만 하는 걸 보니 전부 외운 성 싶다. 다 읽어 가는지 몇 장 남지 않자 푸른 천을 들고 독송한다. 동자승 둘도 책이 없어도 독송하는 걸 보니 전부 외워서 하는 것 같다. 푸른 천을 내려놓더니 향에 불을 붙여 향로에 꽂는다. 향을 세 번 꽂으며 독송하더니 손뼉을 세 번치고 염불을 끝낸다. 염불을 끝내자 기도드린 조그만 곡식그릇을 옆에 놓더니 신도가 가지고 온 쌀에 같이 붓는다. 신도가 스님에게 뭐라고 물으니 대답을 하는 것 같다. 무슨 말이 오갔는지는 모르겠다. 아까 정병에 담은 물을 따라 작은 유리병에 부어 신도에게 건네준다. 남은 물은 신도들에게 따라주고 마시게 하자 마시고 남은 물은 머리와 이마에 바른다. 그 때 젊은 스님이 한 사람 들어와 동자승 옆에 앉아 독송을 한다. 때로는 박수를 치면서 한다. 동자승들은 가만히 앉아만 있다. 그동안에 불전에 올렸던 공양물은 신도들에게 다 싸준다. 신도들은 준비해 온 비닐봉지에 소중하게 담아서 가져간다. 동자승들은 일어나 불전에 향을 올린 다음 자리로 가서 계속 염불한다. 언제 끝나려는지 모르겠다. 내가 열심히 불공하는 모습을 적을 동안 EBS 촬영감독은 이곳저곳을 연신 찍어댔다. 라마불교의 의식을 보는 것은 나도 처음이라 너무나도 신기했다.

 

사원을 나오니 1250분이다. 몽골에는 예전에 906개의 사찰이 있었으나 스탈린 정권 때 다 파괴되어 지금 남아 있는 절은 몇 안 된다. 이 절도 그중의 하나다. 아직도 비가 오락가락 하는 가운데 식사당번과 김현미 이사는 장을 보러 간 모양이다. 대원들이 사찰에서 견학을 할 동안에 가서 과일과 빵 등을 사왔다. 점심은 오후 1시 반에 먹었다. 시리얼, 우유, 주스, 잼을 바른 샌드위치, 아침에 남은 미역국이다. 배는 그다지 고프지 않았지만 후다닥 먹어치웠다. 다행히 비는 그쳐 길 한쪽에 자리 잡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 그러나 비가 그치자 햇볕이 정말 따갑다. 그늘이 없어 등위로 따가운 볕을 받으며 사찰주위를 둘러보았다. 금강저 무늬를 넣은 벽과 기둥이 죽 연이어져 있었다.

 

오후215분에 버스에 올랐다. 아까 시장에서 양고기 전통요리의 하나인 허르헉을 저녁에 해먹으려고 양 한 마리와 다리 살을 샀다고 한다. 시내에서 차에 기름을 채우고 목적지를 향해 달린다. 4시 반쯤 10분간 쉬는 시간을 가졌다. 그쳤던 비가 또 내린다. 게다가 바람도 세차게 분다. 몽골의 날씨와 기온은 변화가 심해 변덕스런 날씨와 더불어 하루 동안에도 봄부터 겨울까지를 맛 볼 수 있다. 어떻게 될지 도저히 종잡을 수 없는 날씨다.

 

오후 610분경, 비포장도로로 접어들었다. 여기서부터는 산에 나무들도 듬성듬성 보이고 바위와 돌들도 보인다. 지금까지는 풀이 깔린 초원만 보다가 돌과 바위를 만나니 왠지 반가운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의 산은 돌이 많아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나 몽골에서 보니 좀 이상하다. 산들도 지금까지 보아온 산하고 달리 좀 높은 산이다. 해의 방향에 따라 산에 그늘이 생겨 한 폭의 수채화를 보는 듯 신선하다. 파스텔 물감으로 저 느낌을 그려낼 수 있을까. 자연 그대로가 그대로 예술인 것을. 해가 있는 곳은 밝은 연두색, 그늘은 짙은 녹색을 이루어 음악소리처럼 콘트라스트를 이룬다. 비가 와서 물이 지나갔던 도랑에는 자갈돌이 드러나 있어 주변에 돌이 많다는 것을 알려준다. 지금 시각은 오후 7시다. 버스를 멈춘 곳에서 야영을 할지 어떨지 미정이다. 다리강가에서 호흐노루 호수를 향해 가고 있는 도중이다. 조금 더 가서 숙영지로 알맞은 곳에 자리 잡았다. 710분이다. 숙영지는 호흐누르(Khokh Nuur) 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

 

도착하자마자 유리선생님과 몽골기사 5명이 양고기요리를 하려고 즉각 준비하기 시작했다. 대원들은 텐트를 치고 나서 양고기요리가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 궁금해서 모두 보러갔다. 주변에서 장작을 주워와 불을 피워놓고 돌들도 주워와 불 위에 올려놓는다. 훨훨 타는 불 위에서 돌이 구워진다. 큰 들통을 두 군데 준비해 놓고 하나는 장작, 또 하나는 가불 위에 올린다. 돌이 잘 달궈졌는지 양고기에 대보아 시커멓게 되면 다 된 것이라 좀 더 달군다. 덜 달구어진 돌을 넣으면 고기가 맛이 없고 질기다고 말한다. 다 달궈진 돌을 양고기 한 켜, 돌 한 켜를 차곡차곡 채우며 차례로 넣는다. 다 넣은 뒤 고기가 잠길 정도로 물을 부으니 김이 올라오며 펄펄 끓는다. 아직 불에 올리기도 전에 끓는 들통을 불에 올린다. 찬 물을 옆에 준비해 두고 끓어 넘치려고고 하면 물을 조금씩 부어가며 끓인다. 저녁이 되어 추워지니 모두 불 옆에 서서 구경한다. 피어오르는 불을 사이에 두고 빙 둘러서서 언제 완성되려는지 기대를 안고 말이다. 어느 정도 물이 졸았는지 넘치지 않는다. 이대로 50분정도 더 끓여야 한다고 하니 배가 더 고파지는 모양이다. EBS촬영감독은 쉴 새 없이 찍느라고 제일 바쁘다. 화면에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 모르겠다. 불 앞에 서있으니 몸도 훈훈하고 마음도 따뜻해져 잠이 슬슬 오려고 한다. 바람이 불어오니 불이 벌겋게 타올라 불기운이 왕성해져 잘 끓는다.

 

드디어 요리가 완성되었다. 저녁 10시를 넘긴 시각이다. 허르헉이란 요리가 선을 보이는 순간이다. 끓는 동안 텐트에서 기다리는데 식사하라는 소리가 들린다. 어떤 모양일까 궁금해 바로 쫒아가니 들어내고 있는 중이다. 양고기와 함께 까맣게 탄 돌도 함께 나온다. 양고기 위에 얹어 둔 감자와 당근은 따로 다른 그릇에 담는다. 껍질 채 넣은 감자와 당근은 푹 익어 맛있어 보인다. 양고기와 곁들여 먹으라고 양배추와 오이로 만든 매콤한 샐러드도 나왔다. 나는 푹 익은 당근이 맛있어 감자보다 당근을 많이 먹었다. 양고기는 좀 질겨서 조금만 먹었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 기온이 떨어져 불 주위에 모여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즐겼다. 몽골기사들은 껍질이 맛있다며 잘 먹기에 씹어보니 고무줄처럼 질긴데 몽골사람들은 먹어버릇해서 그런지 질긴 줄 모르고 잘도 먹는다. 유목민의 모습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양고기는 의외로 기름기가 많아 기름을 떼어낸 고기만 조금 먹었다. 어떤 맛인지 궁금해서였다. 누린내도 나지 않고 느끼하지도 않다. 먹고 나서 찬물을 먹으면 안 된다고 해서 뜨거운 물을 한 컵 먹었다. 촬영 팀은 늦게야 와서 양고기를 먹었다. 촬영하느라 늦은 저녁을 드는 걸 보니 하나의 다큐멘터리가 저런 노력의 결정체에서 나오는구나 하는 걸 느꼈다.

 

한편 박사님은 아침에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형성된 나라의 순서와 년대를 대원들에게 외우라고 했다. 허르헉이 다 될 동안 미리 외운 대원들이 박사님께 차례대로 점검을 받았기 때문에 늦게야 드시러 왔다. 전번에 양고기를 먹고 속이 좀 안 좋았다며 양고기는 사양하고 감자만 조금 먹겠다더니 맛있다고 더 청해서 먹었다. 술 금기인 박자세지만 마지막 날은 어느 정도 풀어주어 마시도록 해주었다. 실제로는 내일이 마지막이지만 내일은 그럴 시간이 없는 빡빡한 일정이라 오늘 술과 보드카를 준비해주었다. 먹는 것도 중요하지만 박자세가 추구하는 탐사는 쉴 틈 없이 공부하는 환경을 만들어 읽고 보고 듣고 외우는 현장학습의 연속이다. 그러하기에 일반여행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보람찬 학습탐사다.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모두들 환한 얼굴로 학습현장의 열기를 즐긴다. 학습탐사 내내 물 한번 발라보지 못한 얼굴이지만 학문을 향한 열기로 눈들이 반짝인다. 말로는 표현 안 해도 점점 학습의 깊이에 빠진 듯하다. 별도 달도 보이지 않는 하늘이지만 마음은 개어 학문의 희열이 점점 크게 다가오지 않았을까.

너무 피곤해서 양치도 하지 않고 텐트로 들어가 침낭 속에서 잠을 청했다. 호후누르(Khokh Nuur) 호수에서 가까운 곳이다. 호수 주변에는 몽골사람들이 많이 야영하는 곳이라 위험성도 있다는 유리선생님의 말을 따라 조금 떨어진 곳에 숙영지를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