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사산 사막의 오아시스 월아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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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은 에너지를 지불하여 기억을 사는 행위의 연속이며, 우리는 과거부터 현재와 미래의 기억을 만들며 살아간다. 기억하는 혹은 기억을 만드는 과정만큼 살아가는 것이라면 나는 지금 실크로드에 살고 있다. 과거형이라 양보해도 그러한 계산법에 다르면 실크로드에서 족히 한 달은 살고 온 셈이다. 일상에서 어떤 경험을 하고 그것을 기억으로 심는 과정은 그 경험에 집중해서 생각을 되풀이하여 축적하는 과정이다.  실크로드는 출발 전 1주일동안 나에게 긴장되는 과제였고, 현장에 가서는 생동감 넘치는 경험이었으며, 돌아온 뒤로는 되새김의 연속이었다. 눈을 뜨면 집 앞의 푸른 동산이 거칠은 천산과 오버랩되고, 눈을 감으면 이런 나의 증상에 대해 질문하며 그곳을 떠올리고, 잠이 들면 월아천 아래를 말없이 거닐었다.

 

 

 

  600여쪽의 탐사 책자를 거실 앉은뱅이 책상에 얹어두고 표지를 눈으로 쓸어보고 실크로드에서 메모한 수첩을 꺼내어 본다. 하루에도 몇 번씩 습관처럼 탐사 대원들의 일지를 다시 읽는다. 그 시간만큼 나는 실크로드에 살고있다. 앞으로 탐사 자료집을 꼼꼼하게 읽고 생각을 정리하여 글로 옮겨두면 내가 그곳에 머무는 시간은 더 늘어날 것이다. 내가 원하면 지금 이 순간도 삼장법사 현장처럼 실크로드 고비 사막을 걸으며 과거의 기억을 불러내어 그 시간과 접속하고 미래를 만들수 있다. 하여 학습탐사 실크로드는 시공간의 경계를 넘나드는 하나의 플랫폼이 된다. 그리고 이 시간, 이 기억들이 쌓여가는 과정이 선재 동자가 53 선지식을 만나는 과정과 동질의 것임을 믿는다.


 

 

  자주 실크로드가 생각날 것이다. 신라와 고구려의 벽화를 보거나 옛 절을 방문하면 돈황의 막고굴이 생각나고, 스산하고 삭막하여 헛헛한 기운이 들면 서진묘 가는 길에 만난 사막의 모래 봉분 공동묘지가 떠오르며, 힘겨운 하루가 저물어 청보라색 하늘의 쪽달을 보면 문득 월하천을 마주할 것이다. 가르치는 제자들에게 서안 섬서성 역사 박물관을 가득 메운 중국 학생들의 열기를 전하면 공부하라는 잔소리를 대신하는 훈수가 될 터이고, 그 효과가 좀 약해진다 싶으면 공부하지 않고 학습탐사를 갔더니 눈에 뵈는 게 없더라는 나의 경험을 반면 교사로 삼는 자기희생도 감수하겠다.

 


 

  욕심나게 달리고 싶을적엔 투르판 쿠므타크 모래 사막을 떠올리면 된다. 모래속을 푹푹 빠지며 두 걸음 올라갔다 싶으면 기어이 한 걸음은 아래로 밀려나던, 뛰자면 숨차고 지치는데 밀려나는 것을 마다않고 천천히 걸으면 결국 모래산마루에 이르던 새벽. 그런 경험을 불러오면 삶의 속도를 가늠하고 조절할 수 있겠지. 무엇보다 지금처럼 집 앞 동산에서 거칠고 황막하게 주름잡힌 천산을 자주 보고싶다.     

 


 

기억을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잡아두는 좋은 방법이 이야기 만들기다. 과거의 기억을 현재까지 엮어두는 훌륭한 이야기를 만나면 사람들의 입과 손은 바빠진다. 이야기가 사라지기 전에 받아쓰고 주변 사람들에게 알려주어야 한다. 그럴때 우리는 다음 세대 아이들을 위한 전기수이며 문화의 전승자가 된다. 가욕관 성루에 놓인 한 장의 벽돌은 바로 이런 이야기의 전형이다.

 


  하서주랑의  내륙 도시 서안에서 시작한 비단길은 란주, 무위, 장액, 주천과 가욕관을 지나 돈황까지 이르는 좁은 길로 무려 800KM나 된다. 이 도시들은 위로 고비사막과 아래로 기련 산맥을 두고 길다란 복도처럼 이어져 있다.  내륙에서 시작한 비단 장사가 하서주랑을 거쳐 유럽의 로마에 이르기만 하면 금보다 비싼 이문을 남길 수 있었으니 성공하기만 하면 몇 대가 누릴 부를 축적하는 대박 사업이었다. 그러나 이문만큼 위험도 높아서 사막을 건너지 못하거나 가서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들도 열에 서너 명 이상이었다. 그러니 돈황에서 본격적으로 나선 비단 장수들이 유럽까지 직통으로 모두 가는 게 아니라 중간의 투르판이나 서역 도시에서 적당한 가격에 파는 중간 유통상도 많았다. 하서주랑은 문화와 경제가 오간 실크로드의 중심회로였다.


 

 

  그중에서도 길의 폭이 가장 좁은 곳에 위치한 가욕관은 만리장성의 서쪽 끝 도시다. 말이 뛰어넘지 못하는 높이로 장성을 쌓았는데 처음엔 군사적 목적이었으나 나중엔 관세 부과의 비중이 더 커졌다. 국경의 관문에 다다르기 전에 출입국 비자를 관리하고 수출입 상품에 관세를 매기는 곳이니 공항의 출입국 관리 사무소와 비슷했을 것이다. 가욕관 정문 앞에는 드넓은 황무지를 배경으로 낙타가 대기중이고, 벌판 왼편에는 용해 철도라 불리는 열차가 지나고 있다. 60년대 소련이 지원해서 건설했는데 우루무치까지 연결되어 있다. 지금은 낙타의 길을 철마가 지치지도 않고 달리는 중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이 많이 드나드는 곳엔 돈이 따르는 법인데 가욕관은 고가의 비단과 향료 등을 실은 낙타 방울 소리가 끊이지 않을 정도였다. 물이 귀해 논농사는 어렵지만 남쪽 기련산맥에서 내려오는 만년설 녹은 물로 밭농사는 가능했다. 기후 또한 시원한 편이라 여름이 견딜만하였다. 여러모로 먹고 살만한 이곳은 요즘으로 치면 국제 무역으로 유지되는 변방의 소비도시였다. 성 안에는 각지에서 착출되어 와 장성을 지키는 병사들이 주둔하고, 무역으로 한 몫 잡아보려는 야심찬 상인들과 그 틈에서 뭐 좀 건져보려는 뜨내기들이 넘쳐났다. 더불어 부유한 상인의 주머니를 노리는 각종 유희와 야바위꾼의 노름판도 있다. 지금도 공연장에서 큰 북을 치는 남자의 팔뚝엔 굵은 힘줄이 보인다. 커다란 쇠구슬을 입에 넣어 삼키는 척 능청을 떠는 모습도 700년 동안 있어온 모습이다. 가욕관 성의 관리 중에도 야바위꾼 못지않은 사기꾼이 있었으니 성 건축과 관련한 설화를 통해 짐작해 본다.

 


  가욕관 성을 지을 적에 실무 책임자인 관리는 자신이 아는 사람에게 건축을 맡겨서 중간의 이득을 취하고 싶었다. 그러나 워낙 명성이 자자한 다른 건축공이 있었기에 부득불 그 에게 일을 맡겨야 했다. 건축공은 솜씨도 좋을뿐 아니라 청렴결백하여 공사에 들어가는 건축 자재들을 정확하게 예측하고 그대로 집행했으며 그 과정에서 부정한 이득을 추구하질 않았다. 그이는 조금이라도 자신의 계산에서 어긋나면 목숨을 내놓겠노라 장담했고 마침내 공사를 마쳤다. 그러나 한 장의 벽돌이 남았고 못마땅한 관리는 그걸 트집삼아 건축공의 목숨을 앗으려 했다. 건축공은 그 벽돌 한 장을 접착제를 사용하지 않은 채 높은 성루의 문 위에 얹어 두었다. 그리고 자신이 죽더라도 절대로 그걸 치우지 말라고, 그렇지 않으면 성이 무너지고 말 것이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렇게 얹혀진 벽돌 한 장은 비바람에도 끄떡하지 않고 부정한 관원을 경계하는 건축공의 청렴결백한 눈이 되어 지금까지 놓여있다. 설화를 들은 성루의 후세 사람들은 벽돌을 올려다보며 탐관오리와 강직한 건축공을 동시에 떠올린다. 그리고 가욕관이라는 번성한 성을 지탱해온 것들이 무엇인지 기억해낸다. 정직과 신의, 자부심과 고집, 맡은 일에 목숨을 거는 기개까지. 자칫하면 숨어버리는 이런 정신들을 표상하는 벽돌 한 장은 오늘도 제 역할을 충실히 하며 성루에서 오가는 사람들을 내려다본다. 가욕관 입구에서 실크로드를 향해 떠나는 상인들은 의리를 중시여긴 관우를 신으로 모셔 관우 사당에서 향을 피우며 앞날의 안전과 부귀영화를 기원한다. 그리고 관문을 지날적마다 벽돌 한 장을 눈여겨보고 의미를 되새김질했을 것이다. 이야기를 통해 본 그들의 번영은 마땅한 이유가 있었다.

 

[ 하서주랑에 위치한 가욕관 성루의 벽돌 한 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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