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제 10차 박자세 해외학습탐사 실크로드 제 3일 8월 19일 월요일

 

 

호텔로비에서 방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박사님이 말했다. “세상에 이런 일이 있네요.” 새벽 2시를 넘긴 시간이었다. 생각지도 않았던 일이 생겨 또 하나의 이야기꺼리를 제공한 셈이다. 산사태로 인해 5시간이나 지체할 줄이야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나마 늦게라도 도착해서 내일 일정에는 차질이 없다하니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가이드 말에 의하면 얼마 전에 온 일행은 산사태가 심해서 맥적산도 못보고 되돌아갔다니 우리는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나는 목적의식을 가지고 열심히 하는 사람에게는 행운이 따른다고 굳게 믿는다.

 

아침을 드는 자리에서 이익우님이 “뭔가 연결고리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기신론 내용이 더 재미있을 것 같은데.....”라는 아쉬움과 함께 열의를 보였다. 나 역시 자연과학 분야가 생소해서 아직도 헤매고 있으니까 그런 마음을 충분히 이해한다. 박사님은 용어를 빨리 익히는 것이 어떤 분야라도 쉽게 들어갈 수 있는 지름길이 된다고 했는데, 수긍은 가지만 좀처럼 실천에 옮겨지지 않는 현실이다. 용어도 내용도 처음엔 설었지만 조금씩 익어가는 중이니 하는 만큼 빨리 이해가 되리라 생각한다.

 

매일 아침마다 버스 안에서 박순천님의 활달한 동작과 밝은 목소리에 맞추어 손뼉을 세게 치는 것부터 시작해서 아침운동을 한다. 오늘은 어제의 피곤을 풀기 위해 밖에서 문순표님의 구령에 맞추어 밖에 모여 운동을 했다. 하루를 힘차게 시작하는 것이다.

 

천수에서 맥적산을 향해 9시 반에 출발했다. 주차장에 내려 10분간 걸어 올라갔다. 길가에 가래나무 과의 추자라고 호도 비슷한 것과 구기자라고 하는데 크기가 제법 큰 건과를 파는 상점이 죽 늘어서 있다. 또 추자껍질을 이용해 만든 공예품으로 꽃병, 필통, 바구니 등을 만들어 함께 파는 곳도 있었다.

 

맥적산(麥積山)은 글 그대로 보리 가마를 쌓아올린 것 같이 생겼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올라가는 길에 서응사(瑞應寺)라는 절이 있는데 최근에 새로 지어진 것 같다. 산의 높이는 142m이고 동서로 194개의 석굴이 있다. 시대는 북위, 서위, 북주, 수, 당, 송, 명에 걸쳐서 만들어진 석불, 소상, 부조, 벽화 등이 남아 있다. 그 중에 일부만 공개되어 있어 직접 본 석굴만 기록해 놓았다. 번호순서는 뒤죽박죽이지만, 본 순서대로 적었다.

 

제 27굴, 북주(北周 557~581), 법화경 벽화(변상도(變相圖)라고도 함)가 그려져 있다.

 

제 13굴, 수(隋 581~618), 주불(主佛)과 양쪽에 협시보살(挾侍菩薩)이 양각으로 조각되어 있다. 이 주불은 맥적산에서 가장 큰 불상이며 높이가 15,7m이다. 주불은 앉아 있는 모양이고, 양쪽의 협시보살은 주불 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어 부처님을 보좌하는 형상이다. 주불의 미간에 잇는 백호상(白毫相)을 수리할 때 소흥(1157년)이라고 적힌 백자가 나왔다고 한다. 남송에 해당하는 년대이며 역사적 자료로서 가치가 크다.

 

제 11굴, 불상 위로 연꽃이 양각으로 조각되어 있는 특이한 형태이다.

 

제 5굴, 절벽 위쪽에 앉아 있는 석불이 조성되어 있다.

 

제 3굴, 북주(557~618), 송나라와 명나라 때 다시 세웠다. 상하 6열로 천불상이 조성되어 있다고 해서 천불랑(千佛廊)이라고도 부른다. 피정장랑식(披頂長廊式)의 절벽누각은 길이가 36,5m이다. 당시 목석 혼합구조의 건축양식을 반영하고 있다. 현존하는 것은 천불 중에 297체로 전부 석태(石胎-대리석으로 만든 것 같이 단단하고 묵직하게 만든 도기 )의 니소불상(泥塑佛相-진흙으로 만든 불상)이다. 불상의 높이는 0,9m, 모두 결가부좌 모양을 하고 있다. 조형은 중후하고 순번으로 정리되어 있어 그 장면은 장관을 이루고 있다. 상부에 열거되어 있는 불상은 송, 명에 재건한 것으로 원작을 모습을 그대로 갖추고 있다.

 

제 4굴, 북주(557~618), 당, 송, 명나라 때 다시 세웠다. 별명은 산화루(散華樓), 또는 상칠불각(上七佛閣)이다. 그 당시 대도독인 이윤신(李允信)이 만든 칠불감실(七佛龕室)이 있는데, 북주의 문학자 유신(庾信)이 대방무전정애각(大方廡殿頂崖閣)이라 작명을 했다. 전체 길이는 31,4m이고 조각은 정밀하고 치밀하며 웅장하고 아름답다. 현존하는 입체조각과 석불과 니소불상은 85체, 칠불감실의 주불은 칠불로 구성되어 있고, 당, 송, 명, 청나라 때 다시 세우고 손을 보았다. 또 각 감실에 현존하는 영소(影塑)는 700체 정도이며 모두 북주의 원작이다. 현존하는 벽화의 면적은 250평에 달한다. 낭하(廊下)의 위와 감실 밖에 있는 벽화는 북주시대의 회화 레벨을 나타내고 있으며, 감실 위의 앞에 있는 5조(五組)의 “박육소”(薄肉塑- 진흙으로 얇게 빚은 것)로 빚은 비천벽화의 조형은 우아하면서도 아름다워서 풍격이 참신하다.

 

제 148굴, 북위(北魏 386~534), 사각형의 평면에 삼벽이감(三壁二龕)식의 동굴이며 현존하는 불상은 크고 색다른 형태로 16체이다. 동굴 안의 소상은 웅장하고 고풍스러우며 질박하다. 의복의 문양은 세밀한데, 간다라 풍격이 있다.

 

제 155굴, 북위(386~534), 사각형의 평면에 삼벽삼감(三壁三龕)식의 동굴이다. 현존하는 것은 원삭(園塑) 6체, 영소 55체이다. 소상은 가늘고 길게 표현되어 있고, 표정은 엄숙하다. 옷의 문양은 섬세하고 부드럽다. 좌우 벽에 있는 두 제자는 맥적산 동굴 가운데서 제일 먼저 발견되었다.

 

제 90굴, 북위(386~534), 북주시대에 다시 그리고, 송나라 때 다시 만들었다. 정면 벽에 있는 불상 왼쪽의 가섭존자는 침착하고 온건하며, 오른쪽의 아난존자는 매우 총명한 인상이다. 송나라 때 만든 소상은 세속화 되어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동굴 안의 벽화와 공양인은 북주시대에 다시 그렸다.

 

제 60굴, 서위(西魏 535~556), 수나라 때 재건했다. 동굴 안에 있는 불상의 두부(頭部)와 왼쪽에 있는 보살은 수나라 때 재건한 것이다. 보살의 몸체는 모양이 날씬하고 아름다우며 표정은 기쁨을 나타내고 있는 가작(佳作)이다.

 

제 62굴, 북주(557~581), 삼벽삼감식의 동굴이다. 현존하는 삼불육보살이제자 일력지(三佛六菩薩二弟子一力持)는 전부 우수한 작품이며, 북주시대 소상의 중후하고 원만하면서도 윤택이 나는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제 74굴, 북위(386~534), 수나라 때 재건하다. 삼세불(三世佛)과 협시보살은 높이가 높고 크며, 표정은 엄숙하다. 서역의 소상 과 같은 풍격이 확실하게 나타나 있다. 맥적산에서 제일 먼저 발견된 소상이다.

 

제 78굴, 북위(386~534), 수나라 때 재건하다. 동굴에 있는 삼불은 웅장하며 똑바로 우뚝 솟아있다. 소상은 확실하게 외래의 영향을 받은 모습이다.현존한 소상 중에 제일 빠른 시기에 조성되었다. 오른쪽 벽의 기단 앞에 있는 남성 공양인은 손에 연꽃 봉오리를 들고 경건하고 공손하게 서 있다. 그 옆에는 묵서로 “ 구지진경생왕구구공양(仇池鎭經生王口口供養)”이라는 게시(揭示)가 적혀 있다. 무슨 뜻인지는 잘 모르겠다.

 

제 191굴, 서위(535~556), 송나라 때 재건하다. 현존하는 소상은 7체이다. 감실 밖의 아래에 화생역사(化生力士)의 소상이 있고, 양옆의 위에는 소상의 교각보살상(交脚菩薩像)이 있는데 구상은 진귀하며 풍격은 참신하다.

 

제 59굴, 송나라 경우(景祐)2년(1035), 마애(磨崖)에 묵서로 1200자 정도 적혀 있으나, 희미해서 거의 보이지 않는다. 사문(沙門-승려를 말함) 혜진(惠珍) 등이 모금을 해서 동서에 있는 양 절벽에 불상을 조성했다. 불상을 바꾸는데 금전으로 보시한 것을 기술하고 있어 사료의 가치를 갖추고 있다. 여기까지가 맥적산에서 안내문을 직접 보고 적어 온 것을 기술한 것이다.

 

점심은 소열루(所悅樓)라는 곳에서 들었다. 시골이었지만 음식도 깔끔하고 맛이 있었다. 메뉴로는 오이 소금 절임, 숙주와 부추 볶음, 배추 비슷한 짠지를 넣은 잡채, 버섯과 구기자를 넣은 시원한 탕국 등이 나왔는데 입맛에 정말 맞았다.

 

식후에 맥적산에서 난주(蘭州)로 향했다. 예외 없이 버스에서 강의가 시작되었다. 597페이지부터 605페이지는 강석경 작가의 “능으로 가는 길”에서 발췌한 것인데, 박순천님이 감칠맛 나게 읽었다. 특히 605페이지가 인상적이었다. 그 다음은 19페이지는 불교용어에 익숙해야 하니까 외우라고 강조했다. 용어에 익숙해야 불교를 이해하기 쉽다고 “깡그리 외어야 한다.”를 거듭 외쳤다. 박사님의 18번이다.

 

연이어서, 선재동자가 53선지식을 만나러 가는 선재동자 구도기가 바로 화엄경 입법계품이라고 하면서 그에 대한 강의가 있었다. 중중무진세계가 펼쳐지는 부처님의 장엄세계가 화엄경에는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어 누구라도 읽으면 발보리심을 내게 하는 경전이라 최상승의 경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차창 밖을 내다보니 옥수수, 땅콩, 수수, 해바라기 등이 심어져 있고, 우리나라에서 논두렁에 콩을 심듯이 여기는 밭두렁에 해바라기를 심어놓은 곳이 많다. 벽돌집도 보이지만, 거의 흙벽돌로 집을 지었다. 홍수가 많은지 갑자기 쏟아지는 폭우를 대비해서 계곡마다 물이 잘 흐르도록 만든 곳이 더러 보였다. 이곳의 해바라기는 땅꼬마인데도 씨를 까맣게 달고 있다. 유달리 키가 작은 종자가 있는지 우리 절에도 씨를 구해서 심고 싶다. 우리 해바라기는 키가 커서 바람이 세게 불면 잘 넘어지기 때문이다.

 

작은 산이나, 구릉, 언덕 등에 층층이가 나있는데 비바람에 의해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이라고 한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보고 계단식 논밭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길가에 접시꽃을 많이 심어놓아서 곳곳에 피어 있다. 가로수는 수양버들 비슷한 양류(楊柳)가 길가에 길게 줄지어 있어 보기 좋았다. 아직 크진 않지만, 몇 년 지나면 잘 크는 나무라서 이내 우거질 것 같다.

 

난주로 가는 길은 유난히도 기다란 굴을 많이 지난다. 생각해보니 오늘만 그런 게 아니고 어제도 그랬다. 산악지대라 굴을 뚫지 않고는 길을 낼 수 없었나 보다. 길이도 1, 2km가 아니라 수십 킬로미터에 달하는 굴들이다. 굴을 지날 때마다 어두워서 책을 볼 수 없어 박사님이 강의를 멈추지 않을 수가 없는 형편이 되었다. 하긴 우리들이 가는 경로가 천산산맥을 따라가는 일정이니까 어쩔 도리가 없지 않는가?

 

정서(定西)라는 곳을 지난다. 이 지방은 물이 없어 집집마다 빗물을 받아 두는 저수지를 만들어 그 물을 먹는다고 한다. 감자가 유명한 곳으로 비가 적게 오니까, 수분이 적어 감자에 분이 많아 맛이 있다는 가이드의 설명이었다. 시계가 오후 5시를 넘겼다. 휴게소에 내려 다 같이 체조를 하면서 몸의 근육을 풀었다.

 

오후 강의가 시작되었다. 126, 127페이지의 의상조사법성게는 종교를 불문하고 무조건 외우라는 박사님의 명령이었다. 외울만한 가치가 충분하니까 외어 놓으면 평생의 재산이 된다고 거듭 말했다. 149페이지부터 165페이지까지는 초기불교와 대승불교에 대한 내용이 있으니 쭉 읽어 보라고 했다. 그다음에 166페이지부터 221페이지는 중국불교에 대한 내용이 주로 있는데 이 대목도 머릿속에 익혀두도록 당부했다. 이런 기회가 아니면 불교에 관한 공부를 상세하게 알 수 없으니 차안에서 할 거라고는 공부밖에 없으니 열심히 하라고 하면서 중요한 대목을 읽어가면서 설명했다. 박사님이 먼저 읽어보고 중요한 부분은 밑줄을 그어놓았기 때문에 읽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도 이해하기가 훨씬 쉽도록 해놓았다.

 

 난주시내로 들어서니 누런 물의 황하가 흐른다. 이곳은 황하의 상류라고 한다. 책에서만 보던 황하를 보니 중국 땅에 있다는 실감이 난다. 공업도시라 좀 지저분하고 집들도 다닥다닥 붙어 있다. 도로 한쪽 편에 있는 공원에 곽거병 장군의 동상이 서있다. 공원은 아직 공사 중이라 주위가 정리되어 있지

않아 장군님은 내심 좀 불편하실 것 같다. 시내의 가로수는 회화나무가 심어져 있는데 하얀 꽃이 피어 있었다.

 

저녁은 난주시내에서 들었다. 음식도 문화체험의 하나라서 어떤 맛인지 일일이 보았다. 연 두부, 콩나물볶음, 양배추볶음, 돼지고기 오향장육, 셀러리 볶음, 도마도 계란볶음 등이 나왔는데 맛있었다.. 난주는 감숙성(甘肅省)의 성도여서 큰 빌딩도 많아 도시냄새를 흠씬 풍긴다. 물은 천수와 마찬가지로 부족하지만 황하가 흐르고 있어 괜찮다고 했다. 수질은 좋지 않아 끈끈해서 비누가 풀리지 않았다. 몽골 학습탐사 때를 생각하면 감지덕지라고 고맙게 여기기로 마음을 다잡았다.

 

밤에는 호텔의 1715실의 좁은 공간에 빼꼭하게 앉아 실크로드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시청했다. 지쳤을 터인데 모두 한 곳을 집중하며 열심히 보는 모습에 다시 한 번 감동을 받는다. 자발적으로 학습하는 박자세 회원님들을 위해 아자 아자 파이팅! 외쳐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