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차 몽골 해외학습탐사 일지

 

2012, 8, 10

인천공항 KAL A카운터 오후 5시 집결. 인천 공항에 오후 5시 10분전에 도착했다. 경주에서 11시 동서울행 버스를 탔다. 인천공항 직행은 37,500원, 동서울은 20,200원과 동서울에서 인천공항은 9,300원 이니까 8.000원이나 쌌다. 동서울행을 타니 오후 3시 10분 도착, 3시 20분 인천공항 버스에 올랐다.

도착하니, 반 이상의 대원들이 보였다. 옆에 놓여 진 짐 보따리를 보니 공용으로 사용할 짐이 많아서 이삿짐 수준이었다. 텐트, 매트리스, 버너 , 요리기구, 햇반, 라면, 반찬거리등 큰 짐만 해도 대충 일곱, 여덟 개쯤 되어보였다. 공용 짐뿐만 아니라 개인 짐에도 번호를 부치고, 각자의 짐에는 이름이 적힌 꼬리표를 달았다.

『제 8차 몽골 해외학습탐사』7백 페이지에 달하는 두툼한 책을 김연숙님이 나눠준다. 이틀 전에 박사님께 연락받고 밤새 제본해서 만들었다는 책! 부피가 큰 베게만 하다. 이걸 언제 다 읽나? 부담이 가면서도 기쁘다. 만드느라 얼마나 수고하셨을까? 학습을 빡세게 시키려고 하는 박사님의 의지가 돋보이는 책이었다.

짐이 많았지만 다행히 짐 값을 물지 않고 부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내친 김에 각자 들고 가기로 했던 까만 비닐봉지의 햇반도 부치려고 갔다가 도로 가지고 왔다. 90만원을 더 물어야 해서 처음에 했던 것처럼 한사람이 하나씩 들고 가기로 했다. 김종광님은 들어오다가 짐 검사할 때 카레 봉투가 걸렸다. 햇반인줄 알았는데,카레가 액상이라 반입이 안 되서 두고 오게 되어 아까웠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였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걸!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공항로비에서 대평여행사 이사장을 만났다. 운문사 명성스님을 비롯해, 주지 일진스님, 학감 진광스님 등 제자스님들을 모시고 러시아로 간다고 했다. 공항에서 만나니 더욱 반가웠다. 박사님도 운문사에서 강의 하신 적이 있어 일진스님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명성스님께서는 우리스님 안부와 함께 언제 자수전시를 하느냐고 물었다. 하게 되면 꼭 연락을 드리겠다고 했다.

KE867 SEOUL-ULAANBATAL 19:35 출발, 좌석은 60H였다. 출발시간이 늦어져 50분에 출발했다. 옆 좌석은 이화종님 이였다.

기내식은 밥과 돼지고기가 나왔는데 너무 맛이 없어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옆에 앉은 이화종님은 앉자마자 몽골어 외우기 삼매경에 빠졌다. 나보고도 몇 개 가르쳐 주었는데 감사합니다(바야흘라) 밖에 못 외웠다. 레드와인 한 잔 했더니 피로가 몰려왔다. 커피는 너무 맛이 없어 반 이상을 남겼다. 기내음식이랑 커피, 홍차 등 기호품은 왜 그리 맛이 없는지 모르겠다. 정성을 들이지 않아서 그런 것 같다. 공항에 닿은 것은 밤 11시경이라 밖은 깜깜했다. 내리자마자 선진 사우나라는 찜질방으로 가서 목욕도 하고 잔다고 하는데......

울란바토르의 징기스칸 공항은 생각보다 작았다. 짐 찾는데 시간이 많이 소요되었다. 30분 이상 기다려도 짐이 나오지 않는다. 짐 찾는 곳이 한 곳뿐이라 기다리다 지친 표정들이다. 빨리빨리 문화에 익숙한 사람들이라 기다리는 것에 익숙하지 않아서이다. 김현미님은 침낭을 빠트리고 왔다고 걱정했다. 추울 텐데 내일부터 어떻게 하려나?

찜질방 잠자리는 남녀 혼숙이었다. 홍총무님이 내 자리를 잡아 놓아 한쪽에서 잘 잤다. 자다가 기침소리가 자꾸 들려서 쳐다보니 내 윗자리의 몽골 남자가 1분 간격으로 캑캑거리며 기침을 해댔다. 부부가 같이 왔는지 둘이 나가는가 싶더니 도로 와서 기침을 해댄다. 잠을 설치기는 했지만 방은 따뜻해서 좋았다.

 

2012. 8. 11

아침 8시 식사이지만, 일찍 잠이 깬 나는 뜨거운 찜질방 안에서 몸의 피로를 풀었다. 몸 전체가 따뜻해지면서 몸도 풀리는 것 같았다. 아침에 샤워를 간단히 마치고 배낭을 가지고 1층으로 내려갔다. 아침식사는 한식이었다. 된장찌개와 콩나물무침이 맛이 있었다. 해외여행을 가서 한식당에 가면 짜증이 날 정도로 맛이 없는데, 이 식당의 식단은 먹을 만 했다. 몽골에서 맛있는 한식을 먹을 수 있어서 행복했다.

먼저 식사를 마친 대원들은 새벽 3시 올림픽 축구에서 일본과의 3, 4위전 한 것을 중계하는 걸 보며 환호성을 질렀다. 2대 0으로 통쾌하게 이긴 한판이었다. 여행 둘째 날의 분위기는 최고였다.

짐이 많아서 차를 하나 더 수배하기로 했다. 그 동안 박물관에 가서 박사님 설명을 듣기로 했다. 3시간 걸린다고 하면서 내어준 책 645p, 316p에 있는 몽골과 금나라의 관계를 버스가 가는 동안 읽어보라고 했다. 특히 말갈(여진), 거란(요), 그 밖에 금나라가 1234년에 여진에게 멸망한 것, 원-몽골 등의 관계에 대해 읽으라고 했다.

아침 9시 몽골 울란바토르 국립박물관 도착.

큰 사슴돌이 입구에 있었다. 몽골에는 순록이나 사슴은 없지만, 북쪽에서 내려 온 북방계 민족이라 그런 돌들을 여기 저기 많이 세웠다고 했다. 또 입구에 쇠로 만든 큰 종이 놓여 있었는데 설명이 없었다. 무쇠종의 위는 실 국화 무늬가 양각으로 새겨져 있고 둘레는 목단, 연꽃, 사슴, 새, 용, 해태 등 동식물이 양각으로 입체적인 분위기를 살려서 새겨져 있었다.

사슴돌에 관한 내용은 333p에 있고, 구르칸이라 부르는 무덤은 127p, 얼음공주는 141p에 내용이 상세하게 나와 있다고 읽어 보라고 했다. 피지라크 고분군에서 발견된 얼음공주의 무덤은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으로 경주 황오동의 고분군과 같은 형태이다. 흉노의 무덤형태도 적석목곽분이다. 금(金)의 이동과정과 신라 김 씨의 시조 김알지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박사님의 자세한 설명이 있었다.

조장족 시대는 유연(330-552)으로 인도의 불경을 거란문자로 번역하는 등으로 문화와 종교를 발전시켰다. 투르크시대는 돌궐(552-630, 682-744)이며, ‘양’이라는 말은 돌궐 말이라고 했다. 일본인들은 신라를 시라기라고 부르는데 이 말은 자작나무라고 한다. 천마총에서 나온 천마도도 자작나무 껍질에 그린 것이다. 그러니까 신라는 자작나무가 많이 있는 북방 유목민이 흘러 들어와서 세운 나라라고 볼 수 있다. 183p, 김해 대성동에서 발견 된 구리솥의 기원은 북방 초원지역의 흉노에게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다는 설명이 있으며 152p, 금관과 각배에 대한 설명이 있다. 금관은 신라 마립간(4-6세기)시절 김 씨 왕족들은 북방 초원문화, 즉 로마- 스키타이, 알타이로 연결되는 문화를 받아드려 묘제(적석목곽분)에 금관, 금팔찌, 금귀거리를 남겼다. 마립간의 간은 칸(Khan)을 말한다. 또 153p, 각배(角盃)는 기마민족과의 상관관계를 잘 보여주고 있고, 로마지역에서 만든 유리그릇도 많이 나왔는데 북방초원 루트를 통해서 신라에 들어 온 것들이다. 백제와 고구려에선 나오지 않는 유물이라 했다.

박사님이 버스 강의실에서 몽골과 관계되는 민족 이름을 꼭 외우라고 했다. 흉노, 선비, 유연, 돌궐, 거란, 몽골의 여섯 민족이다.

일층 박물관 안에는 신라의 귀면와를 닮은 기와가 두 개 있었는데 입체적인 조각이었고, 연꽃무늬의 와당도 눈에 띠었다. 태종무열왕 비석의 아래쪽 받침대와 같은 돌 거북도 놓여 있었다. 이 돌 거북은 주로 돌궐민족의 양식이라고 했다.

박사님의 설명을 들으면서, 좁게만 보았던 우리의 역사에 대한 인식을 폭 넓게 볼 수 있게 되어서 기뻤다. 이번 학습탐사에서 얻게 된 소득이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귀한 보물을 갖게 된 것이다.

돌궐은 기마민족으로 우리나라와도 관계가 깊다. 말을 타고 있는 기마인물상토기나, 천마도 등은 우리가 기마민족의 후예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몽골도 돌궐민족으로부터 기마를 배웠다. 흉노족은 무덤에 말과 함께 부장하는 풍습이 있을 정도로 말을 아끼고 좋아했다고 한다.

이번 탐사에서는 역사공부를 많이 할 것 같다. 우리나라의 역사는 서아시아, 동아시아 , 중앙아시아를 넘어 유럽의 로마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어찌 놀랍지 아니한가? 자신의 조상이 어디로부터 왔는지도 모르고 이때까지 살아왔다는 것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거란족이 한민족을 지배할 당시, 남면관은 거란민족을 다스리고 북면관은 한민족을 다스렸다. 흉노는 문자가 없었지만, 거란은 한자에서 거란대자(契丹大字), 위구르 문자에서 거란소자(契丹小字) 등 두 문자를 가지고 있었다. 거란(요나라, 916-1127)은 210여 년 동안 존재했는데 금나라의 침략으로 흩어졌다. 416p, 몽골계 거란족인 아율아보기는 당의 멸망 후 세력을 확장해서 916년에 요나라를 건국했고, 10년 후 926년에는 발해(渤海)를 멸망시키고 몽골고원을 재패해 대제국이 되어, 936년에는 후진의 건국을 도와 연운(燕雲)16주를 획득했다고 했다.

박물관 이층은 몽골의 옛날 복식이 전시 되어 있었다.

왕과 왕비의 복식, 귀족과 서민들의 복식, 미혼녀와 기혼녀의 복식 등이 있었다. 또 다양한 모자도 전시되어 있었는데, 라마승들이 쓰는 모자도 있었다. 모자 꼭대기는 매듭으로 되어 있는데 위쪽으로 매듭이 볼록 나오도록 되어 있었다.

박물관 삼층에는 전쟁터에서 입는 장수들의 철갑옷이 있었고, 나무로 된 목관이 하나 있었다. 안을 드려다 볼 수 없었지만 부장품을 넣어둔 관 같았다. 한쪽 벽면에는 계속해서 징기스칸의 영화를 하고 있었고, 그 옆에 징기스칸의 가계도가 적혀 있었다.

징기스칸의 말탄 모습을 전신모형으로 복원해서 전시해 놓았는데 왼쪽 손에는 긴 하얀 털로 장식된 삼지창을, 오른쪽 손에는 긴 검은 털로 장식된 창을 높이 들고 있었다. 작품성은 없었지만 징기스칸의 위용이 느껴졌다.

게르(몽골유목민의 집)의 실제모형과 몽골인 들이 일상생활에 쓰는 도구와 용구, 살림살이에 쓰는 그릇 등이 놓여 있었다. 그릇들은 동, 백동, 나무 등을 재료로 만들었고, 도구나 생활용구는 무쇠나 나무, 억센 풀을 엮어 만든 것이 많았다. 다른 전시실을 보니 양털을 물들여서 옷이나 카펫을 짜는 틀이 보였는데 화려한 색상이 돋보였다.

대충 둘러보고 있는데 몽골인 보다 외국인 관람객이 눈에 많이 띠었다. 아시아 쪽은 일본사람 몇이서 몽골 가이드의 일본말 설명을 듣고 있는 외에는, 유럽이나 미국에서 온 사람이 많은 듯 했다. 중국인 단체 같은데 가이드가 영어로 설명하고 있어 물었더니, 뉴욕에 살고 있는 화교단체라고 말했다. 로시아인도 더러 보였다.

몽골 가이드는 귀여운 아가씨였다. 가이드의 영어 설명은 영어도 잘 모르는 네게는 어려웠다. 발음을 알아듣기가 힘들어서 더 그러했다. 몽골 가이드는 박사님이 가는 곳마다 설명이 길어지니 마냥 기다렸다가 걸어가면서도 얼굴에 싫은 내색 하나 하지 않았다. 3시간을 그렇게 따라다니며 열심히 설명하는 모습을 보며 속으로 그 인내심에 감탄했다. 박사님의 설명은 계속 이어지고 7백 페이지나 되는 무거운 책을 들고 있으니 팔이 아파서 잠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공부란 해도 해도 끝이 없는 것같이, 탐사대장인 박사님의 설명도 끝이 안 보였다.

아까 본 게르에 대해 설명을 하자면, 내부의 천정은 원형으로 되어 있고 가운데는 구멍이 나있다. 공기통도 되고 방에서 난로를 피우면 연기가 나가게 되도록 되어있다. 그 원형을 중심으로 원형 부채꼴 모양으로 가는 서까래가 펼쳐져 있다. 벽면은 마름모로 만들어진 나무를 엇대어서 벽을 빙 둘러싸고 그 위에 서까래가 얹혀 있다. 게르의 바깥은 양털로 만든 담요 같은 것으로 지붕으로부터 벽까지 감싸는데 한군데는 뚫어 문을 달아 사용하도록 설계가 되어 있었다. 게르의 문은 붉은 색으로 칠해져 있고 가운데 난방 겸 요리를 하는 난로가 놓여 있고, 벽으로 부친 침대가 두개 있었다. 가운데는 아(亞)자 무늬로 된 장식장이 있고 그 위로 연꽃과 목단이 그려진 꽃병이 두 개 놓여 있었다.

마지막으로, 몽골박물관에서 본 몽골의 근현대사는 사진으로 보았는데 그야말로 파란만장이었다. 현재몽골은 경제성장 율이 10%이상이라 고도성장을 하고 있다. 박사님 말씀이 2년 전 하고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셨다.

세 시간 동안의 박물관 투어를 마치고 점심을 먹으러 갔다. 한식으로 나왔는데 반찬이 푸짐했다. 된장찌개, 김치찌개, 돼지고기 볶음, 오징어 볶음, 그 외에 김치, 콩나물 무침, 두부양념구이 등이 나왔다. 맛도 괜찮았다.

짐차 하나가 더 늘어서, 작은 버스, 현대 스타렉스, 현대 겔로퍼, 소련제 부르봉, 이렇게 4대가 서쪽을 향해 떠났다. 처음 공항에서 버스에 올랐을 땐 ‘이런 고물차가 어떻게 열흘 동안 달려가려는지!’ 난감했었다. 박사님 말씀이 “지금은 그래도 떠날 때쯤은 이 차가 그리울걸요” 했는데 그 소리 들을 땐 ‘뭘 그럴까봐’ 라고 생각했었다.

버스 안에서 박사님의 강의내용을 적으려니까 흔들려서 내가 적어놓고도 읽기가 어렵다.

아래에 적은 것은 버스에서 한 강의를 요약한 것이다.

징기스칸은 1206년에 네 부족을 정벌한 뒤 대칸에 등극했다. 네 부족의 첫째는 메르키트로 말갈족인 발해주민을 말한다. 두 번째 타타르는 수달과 산달을 말한다. 수달은 물에서 살기 때문에 붉은 버드나무(紅柳)와 관계가 있고, 산달은 너구리를 말하며 산악 지역에서 살기 때문에 자작나무와 관계가 있다. 타타르는 달달 이라고도 한다. 수달은 예(濊), 산달은 맥(貊)에 해당되어 예맥(濊貊)을 말하며 우리나라의 선조와도 관계가 깊다. 셋째는 키레이트이고, 넷째는 나이만, 즉 서요(西遼)를 말한다.

오는 도중에 보이는 것들은 양쪽으로 보이는 구릉들, 어린 처녀의 젖가슴 같은 산들이 끝없이 이어지고 , 온통 푸르른 초원만 보일 뿐이었다.중간에 잠깐 내려 휴식을 하고 사과 한 알씩 먹었다. 작은 사과인데 달고 맛있었다. 초원에 많이 나는 풀인데 허브 향이 강해 휴식시간에 산책하면서 조금 뜯어 버스 좌석 앞에 꽂아 놓으니 허브향이 솔솔 났다.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향이 더 짙었다.

해가 지기 전에 거란 성터가 가까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오늘의 야영지이다. 제각기 역할분담대로 텐트치고, 식탁을 조립하고, 식품 내어주고, 식사 만들고, 화장실 자리마련 등으로 부산하게 움직이더니 어느새 제자리를 다 잡았다. 10일간 먹을 양식을 꺼내 놓는데 보니 그 양이 어마 어마하게 많았다. 매일 조금씩 줄겠지만, 저걸 우리가 다 먹는다니 너무 놀라웠다.

『아시아의 진주』에서 알타이 탐험대가 모기 때문에 고생했다는 것을 읽고, 몽골은 모기가 없는지 걱정이 되어 박사님께 물었더니“으응! 2년 전에는 모기가 없었어요. 괜찮을 겁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모기떼가 극성을 부렸다. 보기에는 날 파리처럼 힘없어 보이는 모기였다. 일하는데 모기가 달려드니까 유로 선생은 운전기사 아저씨들에게 마른 소똥과 말똥을 주워오라고 시켰다. 대 여섯 군데 마른 똥을 피워놓으니 모기가 달아나서 다니기가 훨씬 쉬워졌다 .나도 마른 똥을 주워 와서 타는 불 위에 얹어 놓았다. 현지 몽골인의 순발력 있는 조치로 모기떼를 퇴치하고 저녁을 먹을 수 있었다. 야영장 가까이 강이 흐르고 있어서 모기가 더 많은 것 같았다.

저녁은 햇반과 카레, 나가사끼짬뽕 컵라면, 김치와 함께 먹으니 꿀맛이었다. 식사시간은 언제나 대원들을 즐겁게 했다.

우리 텐트는 박순천님, 홍종연님, 나 이렇게 셋인데, 다 들 몸집이 큰게 특징이었다. 저녁에 잘 때, 텐트 속으로 모기가 들어와서 같은 텐트의 박순천님은 모기한테 많이 물려서 학습탐사여행 중 밤마다 벅벅 긁어서 온 다리에 모기자국이 벌겋도록 선명하게 드러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