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8. 12

 

새벽녘이라 생각하고 눈을 떠보니 텐트 안이 훤하다. 누군가 손전등을 켰나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이상해서 텐트의 지퍼를 열고 밖을 내다보려하니 잘 열리지를 않는다. 홍총무님이 일어나 얼른 지퍼를 열어주었다. 열어보니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다. 야트막한 산등성이에는 붉은 기운이 감돌아 아침을 알리고 있었다. 아쉽다! 정말! 새벽별을 보지 못해서......

텐트 안의 세 사람 다 잠꾸러기여서 못 일어났나? 잠귀가 어두워도 그렇지? 셋 다 못 들었다니! 속으로 한탄하고 있을 때였다. 홍총무님이 “김현미 선생님은 반드시 일어나서 새벽 별을 보았을 걸요.” 했는데 옆 텐트에서 김현미님이 나오면서 아침인사를 했다. “잘 주무셨어요. 저도 이제 일어났어요. 박사님도 새벽에 못 나오셨어요.” 했다. 그 소리를 듣자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미국서부 해외학습탐사 때 침낭이 부실해 너무 떨었기 때문에, 새로 침낭을 구입했다. 새 침낭은 따뜻해서 돈을 준만큼 제 구실을 톡톡히 했다. 매트리스도 두꺼워서 좋았다. 잠자리 정리를 한 뒤 간이텐트로 만든 임시 화장실에 다녀왔다. 누구의 아이디어인지 정말 좋았다. 볼일보고는 메우고 다른 구멍으로 옮기도록 여기저기 구덩이를 파놓아서 쓰기 편리했다. 불편한 점은 바람이 불면 가벼워서 넘어가기 때문에 누군가가 잡아주지 않으면 넘어가는 약점이 있었다.

식사당번은 아침준비로 분주했다 누룽지의 구수한 냄새가 풍겨왔다. 빨리 먹고 싶다는 생각을 일으키게 했다. 박사님을 비롯해 몇몇 대원들은 멀리까지 산책을 나가서 보이지를 않는다. 아침이슬이 많이 내려서 내가 신은 신으로는 무리여서 산책을 갈 수가 없었다. 이슬이 신 안으로 들어와서 양말이 푹 젖기 때문이었다. 다음 학습탐사에는 물이 들어오지 않는 단단한 신을 신고 오리라 다짐했다. 아침은 따끈한 누룽지와 밑반찬 서 너 가지였다. 김철원님, 공송심님 부부가 정성스레 준비해 온 반찬들이었다.

사방에 보이는 것은 넓디넓은 초원뿐이다. 우리가 텐트를 친 곳은 허브향이 나는 풀이 지천으로 깔린 곳이라 향이 강하게 풍겨왔다. 사진작가 김성미님이 지나가면서 ‘허브 맛사지를 전신에 받은 것 같다’고 표현했다.

떠나기 전에 짐을 정리하려고 내려놓은 짐들이 가득했다. 식료품만 싣는 식량차를 따로 만드느라 분주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으니 찾기도 어려워 일에 능률이 오르지 않고 시간도 많이 걸렸기 때문 이였다. 낮에 샌드위치를 만들 피클도 어디에 박혀있는지 못 찾았고, 일회용 커피도 어디다 두었는지 못 찾았다. 나중에 보니 우리가 탄 버스의 짐칸에 커피가 올라앉아 있었다.

어제 초저녁엔 극성이던 모기가 밤이 깊어지자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아침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풀밭의 이슬에 신발과 양말을 적시더라도 산책을 하려고 걷고 있는데, 솔다렐라가 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솔다렐라는 별명으로 이름은 이진홍이다. 봄에 제일 먼저 눈속에서 피는 솔다렐라라는 꽃을 박자세 사이트에 쓰고 있는데, 내 별명인 변산바람꽃도 같은 뜻이다. 희부옇게 회색을 띤 물이 흐르고 있었다. 물색은 그렇지만 더러워 보이지는 않았다. 강의 폭은 좁아도 조그마한 모래톱도 보였다. 강 너머로 거란성터의 깃발이 보인다. 평지 위에 조그만 봉우리가 솟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 위에 천 조각 같은 깃발이 펄럭이고 있는데, 가까운 거리인 듯하지만, 제법 먼 거리 인 것 같았다. 초원을 가운데 두고 야트막한 산들이 저 멀리 사방으로 보였다.

임동수님이 멀리까지 가서 촬영을 하고 있었다. 언제나 무거운 촬영 장비를 들고 사진을 찍는데, 젊어서 그런지 피곤한 기색이 보이지 않아 젊음이 부러웠다.

아침 누룽지는 모자랄 것 같다고 물을 더 붓더니 충분했다. 반찬은 양념 김, 멸치볶음, 볶음고추장(김성미님이 참치넣고 볶은 것), 깻잎장아찌였다. 누룽지 두 그릇으로 배를 채웠다. 이러다가는 살이 더 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지금 우리대원들이 야영을 한 곳은 박사님 말처럼 사방 100리 이내에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다. 하늘과 땅, 자연 그대로를 흠뻑 느꼈다.

어제 저녁 별이 총총하더니 오늘은 맑음이다. 밤에 별자리를 볼 때, 안드로메다 갤럭시가 어디쯤 있느냐고 박사님께 물었는데, 설명을 들어도 보이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을 갖고 있는데, 남영진님도 안 보인다고 야단이었다. 박종환님이 놀리느라고 “맘 나쁜 사람은 안 보여요. 그 마음을 버려야 보여요”라고 말하자, 곧이듣고 애타하는 모습을 보니 어린 소년 같아서 저절로 웃음보가 터졌다.

이틀이나 지났지만, 차가 출발하기 전에 가이드와 기사를 소개했다. 열흘간 학습탐사대의 갈 길을 안내할 유로선생님을 먼저 소개했다. 유로 선생님은 한국에 7년간 살아서 우리말을 잘했다. 그 다음에 차례로 버스 기사 바타 아저씨와 아들 마그네, 마그네는 지금 중국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는데, 방학기간이라 아버지를 도우려고 온 착한 아들이다. 1호차 스타렉스 승용차기사는 뭉크 아저씨, 2호차 스타렉스 식료품짐차 기사는 바트라 아저씨, 로시아차 부르봉기사는 바크티 아저씨라고 소개했다. 모두 박수로 환영하고 무사안전을 빌었다.

아침 9시 출발하기로 했지만, 조금 넘어서 출발했다. 오늘은 될 수 있는 대로 화산분화구까지 갈 예정이라고 박사님이 말했지만,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톨고이의 거란성 폐허에 도착했다. 징지스칸 직계의 마지막 칸이 살았던 곳이라고 했다. 이름은 촉특타이지(太師)이다. 당시 거란성에는 2만 명의 거란군사와 7백 명의 중국인 포로가 있었다고 하니 그 규모가 꽤 컸으리라 짐작이 갔다. 촉특타이지는 청나라의 강희제와 옹정제, 두 황제와 싸워서 졌다. 그때 싸움에 져서 중국 청해(靑海-중국 서부에 있는 성)에 남겨진 몽골사람들이 아직도 그곳에 살면서 조국인 몽골을 그리워한다는 이야기를 유로선생님을 통해서 듣고 가슴이 찡했다.

460p, 청해는 1724년에 멸망해서, 청나라 번부의 하나인 와라부가 되었다.

어제 까지는 포장도로도 있었지만, 오늘 부터는 비포장도로를 달려야한다. 달리는 도중에 회색 재두루미를 두 마리 보았다. 푸른 초원에는 보라색 구절초와 들국화가 지천으로 피어있고, 진 보라색 엉겅퀴도 무더기로 있었다.

박 박사님의 버스 강의.

184p-187p, 한(韓)민족은 바이칼에서 온 순록유목민의 후손이라는 설이 있다. 조선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조(朝)는 ···을 향해서, ···를 따라서, ···를 찾아서 라는 의미이고, 선(鮮)은 이끼라는 의미가 있다. 선(鮮)에 초두(艸)가 붙으면 이끼 선(蘚)이 된다. 이끼를 찾아서 순록을 키우던 몽골, 시베리아 서쪽에 있는 순록 유목민인 선(鮮)과 코리(高麗)족이 이끼를 따라 한반도로 이동했다는 것이다. 부여족은 순록유목민이고, 몽골은 기마유목민이다. 이와 같이 고대사는 먹이사슬을 링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청나라 학자 정겸은 『후한서오환선비전지리고증(後漢書烏桓鮮卑傳地理考證)』에서 ‘대선비산(大鮮卑山)의 원형이 지금의 알타이․샤안(鮮) 산맥지대에 있다’고 말했다. 따라서 알타이․샤안 산맥은 고조선의 선(鮮)과 깊은 관계가 있는 산맥이라 할 수 있다. 붉은 가지 버드나무 산맥은 홍유(紅柳), 유화(柳花) 등 성모신앙이라고 할 부르칸과 알혼섬, 부르칸 바위와 재미있는 연결고리를 이루고 있다. 부루칸은 ‘붉’이라는 뜻이다. 북방민족들은 죽어서 돌아가는 곳을 ‘붉은 산’이라고 표현한다. 또 부르칸은 투르크몽골말로 하느님 또는 무당이라는 뜻이다. 북방민족계열이라는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의 박은 ‘밝’이 아니고 ‘붉’, 즉 붉다 라는 뜻으로 볼 수 있다..

비포장으로 이어지는 도로 양옆의 산은 경주 남산을 떠올리게 했다. 너무나도 많이 닮았기 때문이었다. 초원의 곳곳에 말똥과 소똥이 많이 보였다.

버스 강의에서 제국의 수도가 건설되는 다섯 가지 조건중의 하나가 모기가 없을 것이 그 하나인데, 모기가 없으려면 바람이 많이 불어야 한단다. 재미있는 말이기도 하지만,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는 말이기도 했다.

길 없는 길을 가다보니 물어서 가기도 한다. 얼마 전부터 비가 많이 와서 길이 없어진 곳이 많았다. 지금도 유로 선생님이 길을 알아보러 간 사이에 휴식을 취했다. 버스에 앉아 있으니 환호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인지 궁금해서 나가보니 경주에서 온 안채순님의 닐니리야 노랫가락에 맞춰 최설희 교수님이 춤을 추고 있었다. 모두들 흥에 겨워 즐거워들 했다. 초원에는 이름 모를 작은 새, 솔개, 까마귀 등도 살고 있었다.

길을 알아 와서 다시 버스에 올랐다. 얼마 안가서 큰 비석이 있는 곳에 내렸다. 비석에 새겨진 글자는 어디 글자인지는 몰라도, 몽골 글자는 아닌 것 같았다. 가로 2m정도, 세로 1m정도의 기단석 위에 길이 3m정도의 비석이었다. 앞면은 라마교 경전이 적혀 있고 뒷면은 고 몽골어로 똑같은 내용을 적은 비문이라고 했다. 그 앞에 화산석으로 만든 돌확이 놓여있는데 안에 잔돌이 들어 있었다. 종이 같은 것도 들어 있어서 보니 돈이었다. 돈이 날아가지 않도록 돌로 눌러놓았던 것이다. 비문 주위로는 하얀 돌로 빙 둘러서 표시해 놓은 걸 보니 신성한 장소라고 여기는듯했다.

이곳은 징기스칸의 마지막 후손들이 1601-1617년까지 성을 쌓고 살았던 곳으로 건물 흔적도 남아 있었다. 성은 작은 돌과 벽돌로 지어졌고, 아래는 돌을 갈지자 모양으로 서로 엇갈리게 쌓았고, 위는 벽돌쌓기로 되어 있었다. 그 위에 흙을 바르고 흰색을 칠했기 때문에 White House 즉 백악관(白堊館) 이라고 불렀다 한다. 또 한쪽으로는 큰 벽돌을 길이로 세워서 쌓은 곳도 있었다. 성안에는 돌로 만든 기다란 원통형의 돌확이 양쪽에 놓여 있었다. 어디에 썼던 물건인지 알 수 없었다. 성에 올라가서 자세히 보니 벽돌은 구운 것으로 붉은 벽돌도 보였고 청기와 조각도 많이 있었다. 하얀 성에 푸른 청기와! 아름다운 그림이 그려지는 성이였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벽은 겹으로 쌓아 올려서 성벽의 두께가 대단히 두터웠다. 이 성은 청나라 군사에 의해 멸망되었고, 비문에는 건물의 설계구조, 불교에 관한 것도 적혀 있고, 그 외에 멸망한 년대 등이 자세히 적혀있다고 했다. 성에 올라가서 바라보니 가까이에 늪지도 있고 작은 강도 흐르고 있었다.

204p, 오이라트족 마지막 황제는 기황후의 아들로 당시 북원이라는 나라였다. 서쪽은 오이라트, 동쪽은 할하몽골로 갈라져 있었다. 징기스칸의 직계는 할하몽골이고, 촉특타이지는 오이라트 쪽이다. 그래서 칸이 아니고 타이지라고 부른다. 타이지는 군사령관이라는 의미이다. 몽골제국의 변화는 355p 도표를 참조하였다.

버스로 얼마를 달렸는지는 몰라도 거란족의 성터에 내렸다. 성터만 남아 있는 곳이었다.

거란족이 성을 만든 이유는 연우 16주를 정벌해서 다스렸기 때문 이였다. 유목민족은 이합집산(離合集散)하기 때문에 성을 쌓기 어려웠으나 중국을 지배한 경험이 있는 거란은 성을 쌓을 수 있었다 한다.

작은 박물관이 있어서 들렀다. 옆에 게르가 있고 남매가 둘이서 자전거를 타면서 놀고 있었다. 한 칸짜리 조그만 박물관 내부에서 눈에 들어온 것은 아까 봤던 비석의 비문을 앞뒤로 탁본을 한 것이 있었다. 그 중에서 특별한 것은 자작나무의 껍질에 불교경전을 필사한 것이었다. 불교용품과 함께 전시되어 있었고, 그 위에는 촉특타이지의 흑백사진도 걸려 있었다. 아마 영화에서 촉특타이지로 나온 사진인 것 같았다. 박물관 앞에는 비석의 기단만 남아있는 것이 두 개 놓여있었다. 또 돌에 입체적으로 파서 만든 부처님도 있었는데 그 위에 색깔을 입혀 놓았는데 벗겨져있었다.

성은 거의 허물어져 있었고, 남아 있는 부분은 그리 높지 않았으나, 돌로 빼곡하게 쌓았다.

쌓은 구조는 주로 네모진 큰 돌은 아래로, 얇고 잔 돌은 흙과 함께 위로, 번갈아 쌓아올렸다. 그렇게 양쪽으로 겹겹이 쌓은 구조였다. 성벽의 폭은 대략 1m-1,5m정도였다. 무너져 내려 없는 곳도 있지만, 쭉 둘러쳤던 성벽자리가 남아 있는 곳도 있었다. 성벽 위에 전망대로 쓰였던 건물도 남아 있고, 여러 채의 무너진 성의 건물이 흩어져 있는 대규모의 성이었다.

거란의 불교는 밀교 쪽 이였는데, 밀교의 초월적인 힘을 빌려 자연의 힘을 제압하기 위해 왕성주위로 불교가 번성했었다. 풍토와 자연과의 관계, 먹이사슬과 생존, 토질에 의한 가축 의 생산 등, 자연과의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였다.

거란은 유목을 하는 자기부족은 남명관에서, 농경을 하는 다른 부족은 북명관을 두어 다스리게 하였다.

422p, 케세이와 성 요한 전설, 키타이는 동아시아의 대명사가 되어 러시아어로 중국을 키타이라고 하고, 영어의 고어로 케세이라는 것도 여기에서 나왔다. 몽골제국이 건설 되었을 때, 로마 교황과 프랑스 국왕이 사절을 파견한 것은 몽골을 성 요한의 나라로 착각했기 때문이었다. 유럽이 비약하는 계기가 된 대항해시대는 성 요한 전설에서 비롯되었다.

점심은 즉석 샌드위치와 우유, 그리고 오렌지주스였다. 햄, 치즈, 쨈, 오이 등으로 속을 채워서 든든했다.

출발해서 가다가 수백 마리의 낙타를 만났다. 어디로 이동하는지 질서정연하게 단체로 이동을 하고 있었다. 낙타가 우는 소리는 우웅우웅 거리며 처량하게 들린다. 리더가 움직이는 대로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리면서 가고 있었다. 길 건너편에서 한 무리의 낙타들이 또 오는데, 숫자가 더 많았다. 사막과 낙타! 가장 어울리는 그림이었다. 한국의 야산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꿀풀이 초원에 가득 피어 있었다.

야영할 곳을 마련하고 텐트를 치고 있는데 어디서 왔는지 꼬마가 말을 타고 왔다. 딱딱한 낙타치즈를 갖고 왔기에 컵라면을 주었더니 가지고 갔다. 치즈는 너무 말라서 먹기 어려웠다. 먼 곳에서 보니 사람들이 웅성거리니까 보러온 것 같았다.

저녁 준비하는데 비가 와서 부산스러웠다. 간이천막 아래서 모두들 삼삼오오 무리지어 얼큰하게 끓인 수제비에 햇반을 말아 얼른 먹어치웠다. 공송심 주방장님 솜씨로 비오는 날에 딱 맞는 메뉴였다.

오늘은 예정대로 화산분화구까지 갈 수 없었고, 비가 와서 별도 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