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곁에 가까이 앉아 시인의 음성을 들으니
나도 모르게 시세계로 접속되어 버린다.

 

메트릭스 가상 공간에 네오가 빠져들듯
너무나 쉽게 마치 내가 시인이 된 듯
시 언어의 세계에 익숙하게 젖어든다.

 

출렁출렁

 

은근과 고요

 

견준다

 

이런 단어들이 생동감있게 살아 움직인다.
시인의 언어는 시어.
시어들과 함께 사는 시인의 관점이
올곶이 드러나는 3시간의 박자세 초청강연,

 

전 존재가 실오라기 하나 붙질 않고
자세하고 정확하고 바르고 예리하게
투명하게 들여다 보여졌다.

 마치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람마냥.


그 분은 네팔의 힌두교인의 담벼락을
말하였으나,
내 머리 속엔 우리네 시골 골목길
아직은 살아있는 훈훈한 질그릇같은
흙돌짚 담벼락이 출렁대고 있었다.

 

된장 김치 황토빛 토기 곶감
툇마루 흙마당, 이런 우리  안에
깊게 체화되어 있던 그것들이
이제는 옹송하고 아스라히 남아 있던 그들이
시인과 함께 하는 시간,
피나의 춤꾼들처럼 일어나 움직이기 시작했다.

 

잊혀진 꿈의 동굴이란 다큐 영화를
이대 아트하우스에서 3D로 보았었다.
거기서 만난 3만년 전의 고대인이 그린 암각화는
마치 인두로 그린 듯
가슴 속을 지지면서 선이 살아나곤 했었다.

 

그 선에 대하여
공감하는 시인의 첫 음성이 얼마나 반가왔던가.
영적인 교호 란 표현을 하셨다.
만남에 대하여 진한 인상을 그 언어로 표상한다.

 

은근과 고요
한 사람의 분위기가 이 두 단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면 그는 이미 시인일까?
새벽은 은근하다 고요하다.
그 새벽에 의식의 흐름들이 교호하는 그 순간들은
참으로 은근하고 고요하다.
시가 달궈지는데도 은근한 화롯불이 붙어
익혀지고 단련되어서 은근을 화두처럼 말씀하시는가.

 

사이를 채우는 고요,
고요사이 작은 움직임들일 뿐인데,
그 맛을 알고 글로 바꿔주는 사람을 만나서 참 달다.

 

아마도 20대때 문시인과 조우했더라면
내 삶은 달라졌을 텐데... 독백이 일어난다.
같았더라도 연두빛 비단 보자기 같은 시세계를
품고 살았을 텐데 싶다.
청소년 아이들의 멘토로서 서 주시면 좋겠다.


뭔지 모르지만 살아갈 날들에 기대심리가 자란다.
새로운 세상을 열어갈 것만 같아서.

한 사람이 거기 서서
단지 마이크 잡고 자기 말 한 것 밖에 없었는데
듣고 있던 사람의 전 인생이 반응하고 있었다.
참석하기 전 기대하지 않았던 여운이
지금까지 지속된다.

 

시적 모티브가 착상하는 순간부터
시적 감흥이 발흥하고
시적 락흥이 지배하는 그 순간까지
시인은 시를 읽고 그 밖은 차단하고
키운 감수성 만큼의 예리한 어휘를 준비한다고
문시인이 전해준 시세계,
그 절대적 시공간이 그의 메트릭스다.

 

부러웠다.
시란? 견주는 것이다 라고 하신 말씀처럼
견주어봐도 부럽다.

고독은 똑같은 고독인데
저 고독은 이 고독보다 폭발있는 고독같다.
시인의 표현대로 부러운 폭발,
시에서 일어나는 부러운 폭발이
내면의 부러운 폭발이 안일어나고서 어떻게
현상화할 수 있겠는가.

 

부러운 폭발의 물결이 온누리 가득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