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은 고정된 공간에 살면서 시를 통해 우주를 확장 시킨다.

아인슈타인과 같은 과학자는 인간의 상상력의 범위를 벗어난 우주를 수학적 계산으로 끌어와

자신 안에 우주를 새겨 넣는다.

 

다르면서 같은 세계를 맛 보았다.

 

시인은 공간을 시에 집어 넣고 하나의 세계를 탄생 시킨다. 시에 들어가는 재료는 세계에 대한 하나의 해석이 아니라 섞이고 얽힌 이야기 이다. 가마솥에 모인 재료가 세계를 탄생 시킨다.

 

과학자가 생각하고 바라본 세계는 인간의 상상력이 넘어선 세계를 설명하려는 노력이었다. 우리가 속한 우주가 천 억 개도 넘게 있고, 그 우주가 또 천 억 개도 넘게 있는 세계를 증명하려 했다.

 

시인이 만든 세계와 우주를 담으려는 과학자의 노력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시는 견주는 것이라 얘기하는 문태준 시인의 이야기를 빌리자면 인간이 만들고 확장시킨 우주와 인간의 뇌가 받아들일 수 있는 우주의 크기를 증명하려는 과학자의 노력은 어쩌면 서로 견주고 있는 세계이다.

 

문태준 시인의 강연은 영화 이야기로 시작되었다.

 

천재 무용수의 세계를 다룬 영화 피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다. 피나에 나온 무용수들의 춤은 단순히 육체의 움직임을 넘어 공간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하였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일종의 암시로 작용하였다. 무용수가 공간을 활용하여 자신의 세계를 해석하고 표현하고 있다면 시인은 공간을 재배치 시키면서 시의 세계를 만들고 있다는 얘기를 바닥에 깔고 있었다.

 

처음 시를 쓰는 사람은 공간을 움직이는데 아주 많은 어려움을 가진다고 말한다. 실재 현실에 존재하는 돌담 길 옆에 서 있는 굽은 감나무를 일반 사람들은 그들의 기억의 세계에서 바꿀 수 없다. 그러나 시인은 그 위치를 재배치 한다. 시적 상상력이 확장되며 돌담 옆에 있던 감나무가 돌담 위로도 가고, 감나무에 돌담이 열매처럼 열리기도 하고, 심지어는 가을이 돌담에서 나무처럼 자라기도 한다.

 

문태준 시인은  김종해 시인의 가을길을 일례로 든다.

 

가을길 - 김종해

한로 지난 바람이 홀로 희다
뒷모습을 보이며 사라지는 가을
서오릉 언덕 너머
희고 슬픈 것이 길 위에 가득하다
굴참나무에서 내려온 가을산도
모자를 털고 있다
안녕, 잘 있거라
길을 지우고 세상을 지우고 제 그림자를 지우며
혼자 가는 가을길

 

가을길의  글 중에

굴참나무에서 내려온 가을산도 모자를 털고 있다.’

 

굴참나무는 땅에 박혀 있는데 그 위에 가을 산이 올라가 내려 온다. 실재 현상에서는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다. 산이 굴참나무에서 내려 온다니. 심지어는 가을산이 모자를 털고 있다는 표현은 논리적으로 타당하지 않다. 하지만 시적 상상력은 나무위에 가을 산이 자라게 한다. 아마도 나무잎이 가을산에 떨어지는데 산 밑에 있는 굴참나무까지 잎사귀가 지고 있는 것이다. 가을산이라는공간이 나무에 자라나고 있는 것이다. 일종의 공간 옮기는 작업이다.

 

문태준 시인의 말을 그대로 전하자면

시에서 공간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공간이 있는 그대로 들어 난다면 그것은 시적으로 가치가 없습니다. 공간에 대한 안목이 없는 것이지요. 공간을 깨고, 배치를 바꾸는 것이 시적 상상력입니다. 연상을 합니다. 그리고 관습적인 궤도를 벗어나는 것을 연습합니다. 궤도를 벗어나는 노력이 예술가의 몫이 됩니다. 관습적 연상의 고리를 끊는 것을 시인이 하는 것입니다. ‘ 라고 하면서 김종해 시인의 가을길을 일례로 듭니다.

 

두번째로 설명하고 있는 시는 유종인 시인의 빈 화분을 보며를 설명한다.

 

빈 화분을 보며 / 유종인

꽃 대신 고추 모종을 빈 화분에 심는 노파여

당신의 머리에는 백초(白草)가 성성하여

가벼운 몸분()엔 벌써

저승꽃이 거뭇해라



한 계절을 비워냈기로 관()으로 쓰일 소냐

여우비를 심어볼까

천뢰(?)의 시를 옮겨볼까

아니야,

광야를 불러다

숨통 하날 틔워보자

 

마지막 구절의 광야를 불러와 숨통을 하날 틔워보자라는 구절을 말한다. 시인이 화분을 보고 있다. 고추 모종을 화분에 심은 노파를 보면서 자신은 화분에 무엇을 심을지를 생각한다. 화분에 여우비를 심고, 천뢰 벼락을 심는다. 고민 끝에 광야를 불러와서 화분에 심고 숨통을 틔워보자라고 마지막 구절을 완성한다. 시인의 상상력으로 또 하나의 세계를 바꾼다. 화분에 광야를 불러온다는 상상력이 바로 시인의 상상력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오규원 시인의 접시와 오후를 말한다.

 

접시와 오후 / 오규원

붉고 연하게 잘 익은 감 셋
먼저 접시 위에 무사히 놓이고
그 다음 둥근 접시가
테이블 위에 온전하게 놓이고
그러나 접시 위의
잘 익은 감과 감 사이에는

어느 새 "사이"가 놓이고
감 곁에서 말랑말랑해지는
시월 오후는
접시에 담기지 않고
밖에 놓이고

 

감 세 개가 있다. 최소의 사건으로 실재 사건을 표현한다. 언어화 한다. 관계가 생긴다.

감을 보면서 말랑해지는 가을을 본다. 접시에 담기지 않는 가을을 표현한다. 가을에 먹기 좋게 익어 접시에 놓인 감을 보면서 조그만 접시 밖에 있는 모든 가을을 시에 담아 버린다. 시는 공간을 넘어서고 관념을 넘어선 세계를 선물한다.

 

공간 안에 살고 공간을 매개로 삶을 살아가는 우리네의 모습은 변함없는 공간 위에 존재할 수 밖에 없다.

건물 위에 살고 있는 우리가 바닥이 무너진다고 생각하면 그 자리에 서 있을 수 없다. 하늘이 무너질까봐 하늘만

보았다던 옛 고사의 이야기처럼 우리는 공간이 무너진다는 상상은 벗어나기 힘들다.

 

그러나 시인의 세계는 공간을 넘나 든다. 137억년 우주 진화를 공부하는 박자세 회원들에게 시인의 이야기는

생소하기도 하고 역시 시인이구나 하는 감탄을 선물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게 문태준 시인의 이야기는

시라는 세계는 연합피질이 만든 세계를 살고 있는 인간의 의식의 확장성을 느끼게 한 강연이었다.

 

동물들이 1차적 감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먹을 것을 주면 먹고, 낯선 물체가 지나가면 소리를 내어 울거나

짓는 것이 당연지사 이다. 그러나 연합피질이 생기면서 인간은 연합피질이 만든 세계에서 정보를 얻고 의미를

찾게 되었다.

 

공간을 깨고 배치를 바꾸는 시인의 상상력은 인간의 추상적 사고를 확장시키는 장치로 작용한다.

 

위대한 천문학자들도 이와 같은 사건을 경험했을 것이다. 우주가 멈추지 않고 확장되고 있다는 놀라운 공간의

재해석이 우리의 천문학적 사고에 전환점을 가져 왔으니 말이다.

 

상상력은 인간을 더욱 인간답게 하고 문명을 탄생 시켰다. 지금의 시대를 철학자와 시인이 부족한 시대라고

말한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시를 읽는 사람을 손에 꼽을 정도이다. 왜 시가 인간의 의식과 사고를 확장시키는

도구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계속